<채널예스>에서 황석영 소설가의 신작 『마터 2-10』을 매주 월/수요일 연재합니다.
일제가 항복하기 전에 얄타회담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전승 연합국의 신탁통치를 제안한 것은 원래 미국이었다. 미국은 조선이라는 이 전리품에 대하여 영국과 중국이 편들어 주리라 생각했고 소련 혼자서는 다른 주장을 펼 수 없으리라 보았다.
해방이 되고 나서 그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다시 모였을 때 소련은 조선에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긴급함을 밝히고, 일제의 오랜 식민통치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청산하도록 협정의 최종안에 삽입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은 연합국 대표들로 구성된 행정부가 신탁통치 기간에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행사해야 하며 그 기간은 5년 또는 10년 연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이 기간에도 임시 조선정부가 주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하고 연합국 4개국은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여러 원조나 후견적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견제 실시 여부도 조선 임시정부와 미소 공동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최종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테면 민족의 운명에 관계된 가장 중요한 사항이 조선의 대표가 아닌 강대국에 의해서 결정되고 처리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모스크바 삼상 결정은 미소 두 강대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상황 아래서 분단을 해소하고 통일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 안은 임시정부를 통한 조선 민중의 주권행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어떤 형태의 제국주의적 침탈도 허용하지 않으며 특정 강대국의 독점적 지배도 배제하고 있었다. 여기에 우리의 자주적 역량만 충분히 준비된다면 목적하는 바대로 통일 독립 국가를 이루는 방책이 될 수도 있었다.
미국은 본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말이 지어지자 매우 곤란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제국주의 식민지배와 민중에 의한 통치권 행사는 근본적으로 대립되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조선인 자신에게 통치의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 모스크바 삼상결정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이해에 전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미국 내의 냉전주의자들은 즉각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모스크바 삼상 결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전면 배치되는 일이고 심지어는 무모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모스크바 회담은 미국 소련이 이루어낸 마지막 협상이자 파산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이후 미국 정부 내에서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국제문제를 풀어가고자 해왔던 일단의 정책집단은 급속히 후퇴하게 되고 소련과의 전면적 대결을 추구하는 냉전주의자들이 정책 결정의 주도권을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말에 모스크바 삼상회의 소식이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미국 냉전주의자들과 국내 친일파들은 심각한 은폐와 왜곡을 자행한다. 진상은 숨겨지고 남한의 언론에 의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소련의 주장으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어이없이 날조된 기사가 남한 언론에 연일 대서특필 되었다. 한민당과 이승만 휘하의 독립촉성국민회의 등은 자신들의 간행물을 통하여 ‘소련이 신탁통치를 강조했고 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옹호했다’는 그릇된 선전을 늘어놓았다. 이승만과 친일파들은 미군정 당국의 보호와 지원 아래 있지도 않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실질적으로는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작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반탁운동을 반소련운동과 결합시켜 나갔다. 이제 반탁은 곧 반소련운동이 되었고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는 것은 조국을 소련에 팔아먹으려는 행위로 매도되었으며, 이들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불법적 탄압이 공공연해졌다. 미군정의 행위는 틀림없이 이율배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협정에 찬동했으면서도 손으로는 그것을 지지하는 세력을 탄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달이 못 가서 이러한 광풍은 잦아들게 되었으니 모스크바 협정의 내용이 자세히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련 측은 모스크바 회담 경과에 대한 전말을 기자회견에서 공개했다. 첫째, 처음에 신탁통치를 제안했던 것은 미국이었다. 둘째, 미국의 제안에 의하면 신탁통치는 앞으로 십 년까지 계속될 수도 있었다. 셋째, 미국은 신탁통치의 실시에 앞서서 한국 전체의 통일 민족정부를 수립하는 데 아무 관심이 없었다.
반탁운동의 기만성이 폭로되면서 그 대열 또한 급속히 허물어져 갔다. 반탁운동은 이듬해 삼일절 행사까지는 최소한의 대중운동으로서의 의의마저 완전히 상실해버렸다. 이후로는 모스크바 협정의 실현을 촉구하는 민중운동에 대한 반동적 테러운동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시간이 더 지나면서 미국과 이승만 일파가 모스크바 협정의 실현을 방해하고 나섰던 중요한 이유가 단독정부 수립에 있음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김구는 협정을 끈질기게 반대했는데 물론 그 동기는 미국이나 이승만 일파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김구는 지나치게 조급했고 당시 국내외적 조건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즉각적인 독립만을 고창했던 것이다. 결국 김구의 이러한 오판은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민주진영의 분열을 초래하고 스스로는 노동자 농민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게 되었다. 그의 오판은 결국 미국과 이승만의 식민지 예속화와 분단의 음모를 도와주는 것이 되고 말았다.
신금이는 이 무렵부터 이듬해 가을과 그 다음 해 남편 일철이 남쪽에서 사라지던 때까지 길고 긴 꿈속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하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여기 일 년이 다른 나라의 십 년이라구 하지 않더냐. 그러니 여기 십 년은 바깥의 백 년 세월과도 같을 게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들 수백 살씩 먹은 게지.”
영등포는 거리와 사람과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꿈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비누방울 속 같은 반투명의 흐릿한 세상을 만들어냈다. 무슨 엷은 막 같고 안개 같은 거대한 덮개가 허공에서부터 영등포 전체를 감쌌다. 서로 피 터지게 싸우다 맞아 죽고 비명에 간 사람들도 장례를 치르고 나면 매장되어 모습이 사라지거나 하지 않고 회색의 헛것이 되어 이 엷은 막 안에서 너울너울 흘러 다녔다. 집집마다 주안댁처럼 모습도 보이고 말도 통하는 유령들이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니 영등포는 오랜 잠 속에 빠져 있었거나 아니면 불면증에 걸려 있었을 것이다. 늘 자면서 몽유를 했든가 아니면 깨어있는 채로 의식이 흐리멍텅한 채로 나날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에 영등포 사람들뿐 아니라 온 남한 사람들은 쌀을 구하러 다녔다. 분명히 가을까지는 황금들판에 가득한 벼 이삭이 물결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울이 되기도 전에 쌀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신금이도 쌀자루를 착착 접어서 왜바지 허리끈에 질끈 동이고서 쌀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코쟁이들이 마구 찍어낸 조선은행권으로는 점점 개인끼리는 아무 것도 살 수 없었다. 고기 생선은 감히 바랄 수도 없었지만 곡식이나 감자나 고구마 푸성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물물교환이었다. 다만 쌀은 동회에서 배급표를 받아 배급소에 가서 일정량을 지급 받았다. 그런데 수매량은 며칠도 못 가서 동이 났다며 배급소는 문을 닫았다. 신금이는 어느 날 저녁에 처음 보는 배급소 앞을 지나다가 회색빛 연기 같은 헛것들이 바가지 함지 소쿠리 등속을 들고 길게 줄지어 서있는 걸 보았다. 그녀는 무심코 줄의 뒤에 가서 섰다. 줄이 보이면 무조건 서보라고 하던 게 당시의 세시풍속이던 것이다. 보통 주민들 같으면 줄 서서 기다리며 동네 소식도 주고받고 서로 인사도 하고 반기기도 할 텐데 그들은 그냥 시무룩하게 침묵에 빠져서 줄에 널린 빨래처럼 흐느적이며 서있었다. 신금이가 참지 못하고 자기 앞에 섰는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언제부터 여기 배급소가 생겼나요?”
여자는 저고리에 왜바지 차림인데 모두가 얼굴까지도 연기 같은 회색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신금이만 색깔이 선명했다. 질문을 받은 여자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댁은 우리가 보이슈?”
“왜 안보이겠어요? 저 맨 앞에 할머니가 쌀 타 갖구 가시는 것두 보이누먼.”
웅성웅성하면서 줄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제각기 소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편네에게 우리가 보인대.”
“머야 그럼 우리처럼 죽은 모냥이지?”
“아니야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우리네야 산 사람은 식구끼리만 보잖아.”
“그것두 식구 나름이지. 신통하지 않으면 자식두 못 보는데.”
신금이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언제부터 이 배급소가 여기 생겼느냐구요.”
다시 물으니 앞에 섰던 회색이 대꾸했다.
“오늘 첨 열렸다우. 날마다 옮겨 다닌다든가 뭐라나.”
“한 가구 당 얼마나 준대요?”
“뭐든 가져온 것에 가득 채워 준다는데.”
맨 앞의 차례가 되어서야 신금이는 우선 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랬더니 그녀는 자신이 줄에 선 뒤로는 아무도 이어서 줄에 서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에 길게 늘어섰던 회색들은 배급을 타서는 제각기 흐느적흐느적 흩어져 사라졌다. 앞의 컴컴한 출구를 바라보니 안에서 희끄무레하게 누군가 걸어 나와서 손을 내밀었다. 신금이가 문득 바라보니 주안댁이 배급소의 배급을 맡고 있었다.
“애고 어머니!”
놀라서 외치자 주안댁은 활짝 웃으며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루 내놔라.”
신금이가 얼결에 자루를 허리춤에서 뽑아 내밀자 시어머니는 됫박을 놀리며 자루 속에 쌀을 빵빵하게 담아서 주둥이를 묶어 내밀었다. 신금이는 두 손으로 받자마자 하도 무겁고 갑작스러워서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허리를 숙였다가 펴고 나니 배급소고 뭐고 사라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는 외쳤다.
“어머니, 어머니!”
주위는 샛말 외곽의 들판이었다. 분명히 그녀가 돌려받은 자루 속에는 쌀이 그득 들어 있었다.
철도원 삼대
황석영(소설가)
「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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