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어느 날, 홍대 앞 사무실로 미팅 갔던 디자이너 김형진은 클라이언트 앞에선 꽤 프로인 척 포즈를 잡았지만 사실 매킨토시 컴퓨터도, 쿽익스프레스 프로그램도 다룰 줄 모르는 초보 디자이너였다. 영상집단 아이공에서 ‘페미니즘 비디오 액티비스트 2005’ 페스티벌에 맞춰 기획한 책 『카메라를 든 여전사』로 북 디자이너 커리어를 시작한 때의 기억이다. 이후 초보 디자이너였던 김형진과 그가 속한 워크룸 프레스의 눈부신 동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디자이너 김형진의 관점에서 북 디자인은 한 권의 책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
이 질문은 앨범의 아트워크가 음악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와 비슷해 보인다. 비틀스의 <서전트 페퍼스 론리 허트 클럽 밴드>의 아트워크와 음악 사이엔 어떤 영향 관계가 있을까? 각각은 별개의 사물이고 별 관계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책이 잘 팔린다고, 혹은 안 팔린다고 표지 덕이거나 탓인 것도 아니고, 책 내용을 심오하게 반영해야만 좋은 디자인인 것도 아니다. 예전 대학가 문화사에서 만들던 불법 제본 책들을 보면 재밌는 조합이 많았다. 혁명을 주제로 한 책 표지에 하와이 바닷가 석양 사진을 쓴다든가, 가부장 제도를 비판하는 책에 히말라야산 사진을 넣었다든가 하는. 난 이게 영 엉터리라고 생각하진 않는 편이다.
김형진 디자인의 특징을 말한다면?
이런 건 남이 말해줘야 하는 건데… 최대한 단순한 레이어를 사용한다 정도 아닐까. 물질적으로나 의미의 수준에서나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표면 위에 머무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이건 제목, 이건 동그라미, 이건 노란색, 그렇게 누구나 파악할 수 있는 표면에서 가능한 한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한다. 도금된 시계 같은 거랄까, 그 얇은 도금 아래 뭔가 추악한 진실 같은 게 있을지 모르지만 일단 나에게 중요한 건 도금의 반짝거림이다.
오늘을 포함해 가장 최근 당신의 디자인 영감을 자극한 것(오브제, 책, 문장, 컬러 등등)들이 궁금하다.
2020년 3월 12일, 오늘에 충실하게 답해보면,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라는 이선희 노래의 가사, 맑은 군청색, 원의 반지름과 원주, 그리고 필립 시모어 호프먼.
어느 인터뷰에서 ‘정말 아니다 싶은 일은 거절할 수 있는 여유’를 언급하기도 했다. 북 디자인에 한정하면, 정말 아니다 싶은 일은 어떤 걸까?
저자의 글이 후지면서 편집도 안 좋은 책. 하지만 이 두 조건을 고루 갖춘 원고를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표지도 본문도 과하게 장식적이고 별 의미도 없어서 좋아하는 책이다.
디자이너 김형진을 말해주는 단 한 권을 꼽는다면?
앙투안 볼로딘의 『미미한 천사들』.
자신이 디자인한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 세 권을 꼽는다면?
출간 순서대로,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 제안들 총서. 『미스테리아』 10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북 디자이너로서 ‘남들에게’ 인정받게 된 책이다. 내가 좋아하는 비유를 사용하면, 비로소 ‘껌종이’의 세계에 진입하게 해준 책이랄까. 김뉘연 편집자와 함께 작업하고 있는 제안들 총서는 오랜 시간, 가장 고통스럽게 작업한 책이라 특별히 애착이 간다. 『미스테리아』 는 원래 신덕호 디자이너가 기본을 탄탄하게 잡아놓은 잡지였다. 그가 독일로 유학 가는 바람에 엉겁결에 떠맡게 됐지만 신덕호의 규칙들을 비집고 들어가거나 변형하는 게 꽤 힘들었다. 어떻게 해도 별 티도 안 나고… 10호 작업에서는 신덕호의 색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표지 전면에 유광 은박을 흩뿌렸다. 연말 특집호니까 이 정도 호사는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잡지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내가 작업한 ‘티’도 낼 수 있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북 디자이너 김형진이 처음 '남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 책이다.
제안들 총서는 글자 크기와 색지의 조합으로만 운용한다는 원칙을 적용한다.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디자이너 김형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가 있다면?
작업 요청서를 받고 난 후 24시간, 길어야 48시간 이내에 디자인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다 내린다. 판형, 표지 그래픽의 큰 방향, 폰트와 스타일 세트, 판면의 밀도. 이 중 스타일 세트와 이것들이 만들어낼 판면의 밀도(얼마나 어둡고 얼마나 밝은지)에 대한 결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표지 전면에 유광 은박을 뿌렸다. 잡지 아이덴티티도 유지하고, 작업한 '티'도 낼 수 있었다.
가장 즐거운 시간(단계)은 언제인가?
1교지를 받아 교정하는 시간. 수정 사항이 많을 수록 좋은데, 그 작업을 하면서 텍스트의 디테일, 예컨대 어떤 단어 사이에 쉼표나 줄표를 넣었는지 등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책의 전체 리듬을 점검하기도 한다.
결과와 상관없이 작업이 가장 즐거웠던 책도 궁금하다.
김용언 편집장과 함께하는 『미스테리아』 작업이다. 나의 과잉 노동과 그분의 과잉 노동이 마주치는 가학적 상황을 즐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인쇄 감리 과정에서 나누는 쓸모없는 수다를 좋아한다.
온전히 자신의 디자인을 적용할 수 있는 워크룸 프레스의 북 디자인을 조금 상세하게 풀어놓는다면?
민구홍 편집자와 함께 작업하는 실용 총서5 얘기를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나온 세 권의 실용 총서 뒤표지엔 각각 앵무새와 여우, 곰 사진이 실려 있다. 앞표지엔 SM 견출고딕으로 조판한 제목과 워크룸 프레스 로고 외엔 아무것도 없다. 혹자는 앵무새가 스파이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생활공작』 ), 여우 털로 방한복을 만들어 입을 수도 있으며( 『헤비듀티』 ), 곰같이 우직하게 작업해야 히트곡을 낼 수 있다( 『히트곡 제조법』 )는 기막힌 해석을 하기도 했지만. 이 작업을 준비하던 여름밤이 생각난다. 그날 편집자와 나는 반쯤은 어색한 기분으로 종로 거리를 걸으면서 토끼와 펠리컨, 앵무새 이야기를 나눴고 그 동물들이 표지에 등장하는 책은 무조건 아름다울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얘길 하며 웃었다. 위에서 말한, 하와이의 석양과 혁명 같은 조합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워크룸 프레스의 책이니 가능한 시도다.
앵무새와 여우, 곰이 책 내용과 무슨 관계냐고 묻는다면 정말이지, 전혀, 아무런 연관이 없다.
디자이너이면서 직접 글을 쓰기도 한다. 개인 트위터에는 좋은 글을 읽고,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을 드러내던데, 준비된 게 있다면 귀띔해달라.
『디자이너를 위한 미술사』. 제목도, 목차도 다 정해져 있다. 쓰기만 하면 된다. 이 상태로 5년쯤 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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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한 천사들 앙투안 볼로딘 저/이충민 역 | workroom(워크룸프레스)
볼로딘의 작품 세계 기조를 이루는 ‘포스트엑조티시즘(post-exotisme)’의 기점이 된 작품이다. 프랑스 현대 소설의 일반적 경향과 거리를 두고 있는 볼로딘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입문하기에 가장 적절한 책으로 꼽힌다.
정다운, 문일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