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아영의 잘 읽겠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늦을 거야
우루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남자는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어 우루와 우연히 마주친다. 남자는 우루만 좋다면 함께 생일 파티에 가자고 하지만, 우루는 모든 종류의 파티를 싫어하고 춤추는 사람도 아니며 파티 시간도 이미 늦었다.
글ㆍ사진 인아영(문학평론가)
20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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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다른 소설가의 소설에 대해 쓴 글은 왠지 더 재밌다. 대체로 텍스트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고,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입장이 스며있으며, 무엇보다 소설가로서의 자신이 밀도 높은 성분으로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건 자신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는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움직여지는 현상은 어쩔 수가 없으니까. 배수아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 을 번역한 뒤 ‘옮긴이의 말’에서 쓴 글을 보고서도 그랬다. “아직 아무런 내용도 줄거리도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까지도 아무런 내용도 줄거리도 시작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릴 것만 같으므로, 이 책에 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줄 수 없어. 어쩌면 도중에 읽기를 그만두게 될지도 몰라.”(364쪽) 리스펙토르의 소설을 옮긴 번역가로서의 글이었지만, 내용과 줄거리가 시작되고 진행될 것도 없이 아름답게 흐르기만 하다가 끝날 것만 같은 소설이라면, 그 순간을 간직하듯 그만 읽기를 멈추고 싶어지는 소설이라면, 배수아의 소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

 

배수아의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의 시작에서 우루는 일행과 함께 무녀를 찾아 떠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기억하지는 못하고 단지 감각할 수 있을 뿐인 우루는 마치 어떤 근원을 찾으려 흘러가듯 헤매는 것 같다.   우루, 혹은 여자는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떠오르는 기억에 닿으려는 듯 연필 한 자루를 꺼내 노트에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 다만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서 아주 먼 곳으로부터 와야만 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것을 쓰기 위해서 멀리 온 것 같아요.”(82쪽)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왜 멀리에서 와야 하는 것일까?

 

잠시 우루의 눈을 따라가 보자.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하지는 못하는 우루는, 그러나 무언가를 본다. 하지만 관찰하거나 응시하지 않고 단지 옆으로 흐르듯 비치는 것을 본다. 거기에는 매번 모습을 바꾸는 최초의 여인도 있고, 어느 강가에 있던 꿈도 있고, 멜로디 없는 시 같은 노래도 있고, 무엇보다 사랑과 아름다움이 있다. 우루의 눈은 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사랑과 아름다움에 닿는다. “우루는 보는 것처럼 사랑한다. 멀리서 보는 방식으로, 계속해서 점점 더 멀어지는 방식으로, 영원히 우회하는 방식으로, 오직 멀리서 반짝이는 그것을 향해 짧고 순간적인 일별만을 던지며 흘러가는 방식.”(138쪽) 우루가 멀리서 떠나와 미지의 목소리를 받듯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으로부터 앞서서 시작된 최초의 근원적인 기억에 닿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이미 시작된, 애초에 진행되고 있었던 사랑과 아름다움을 눈에 담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멀리서 보아야 할 테니까. 그래서 우루는 오직 멀리에서 와서 멀리에 있는 것이다.

 

우루와 함께 학교를 다녔던 남자는 대학 졸업 후 교사가 되어 우루와 우연히 마주친다. 남자는 우루만 좋다면 함께 생일 파티에 가자고 하지만, 우루는 모든 종류의 파티를 싫어하고 춤추는 사람도 아니며 파티 시간도 이미 늦었다. 우루는 말한다. “우리는 어차피 늦을 거야.”(154쪽) 멀리 있는 우루는 늦을 것이다. 기억과 사랑과 아름다움은 근원적이고 아득하고 깊은 곳에서 이미 시작되어 있었기에 그것에 닿기 위해 멀리 있는 우루는 늦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서 오는 동안 그 거리만큼의 시간도 한꺼번에 높은 밀도로 몰려온다. 늦은 만큼 쌓이고 중첩되어 몰려온다. 어떤 시간은 앞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증폭되고,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에서 무수한 거울이 영원히 반사되듯 동시에 일어난다. 무언가를 쓰면서 뒤늦게 도착한 기억에는 그 증폭되고 무한한 시간이 있다. 우리는 멀리 있고 늦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달걀과 닭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저/배수아 역 | 봄날의책
그녀는 전 작품을 통해서, 가난한 이민자의 가족으로 북동부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된 후 리우에서의 시절을, 명백한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명백한 브라질인으로서,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추상적으로, 비극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종교와 언어의 질문에 실어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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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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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양이

2020.06.08

"우루가 멀리서 떠나와 미지의 목소리를 받듯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으로부터 앞서서 시작된 최초의 근원적인 기억에 닿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문장이 한참 머릿속에 맴돌았다. 근원적인 기억으로부터 가장 멀리 있어서 늦게 도착할 우류가 아이러니하게도 늦은 시간 만큼 중첩되고 증폭된 시간성으로 그 기억에 가닿는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일까. 어차피 늦을 거라면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을 놓치 않고 따라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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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아영(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비평집 『문학은 위험하다』를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