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남편과 영화 ‘강변호텔’을 보다가 즉흥적으로 촬영 장소인 호텔을 예약했다. 원래 어버이날이어서 각자의 부모님 댁 방문 투어를 할 계획이었지만, 둘 다 일이 빠듯해서 부모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올해는 못 갈 것 같다고 연락을 드린 날이기도 했다. 영화 속 호텔도 좋아 보이고, 알아보니 가격도 저렴해서 ‘가자가자’ 소리쳤다. 물론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뭐든지 이유는 늘 많고, 우리가 저 호텔에 가야 할 이유도 많았다. 남편은 시나리오 마감이 임박했고, 나는 아르바이트로 받은 일거리의 마감이 임박했다. 둘 다 임박 상태인 것도 모자라 하필 이번 주가 우리의 6주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주머니에 이런 저런 이유들을 가득 넣어줘야만 열리는 지갑도 납득해 줬으니 떠나야 했다. 단, 1인당 1방을 이 박씩 예약했다. 각자의 방 값은 각자가 내고, 방에서 홀로 강을 바라보며 각자의 임박 상태를 해결하기로 했다. 우리는 자녀도 없으니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막 하고 살자는 생각이 강한 요즘이었다.
<강변호텔> 속 강변호텔에 도착했다. 영화 속에서는 하얀 눈이 가득했던 곳이지만, 5월 속 지금은 푸르렀다. 남편은 2층 온돌방, 나는 3층 침대방이었다. 각자 짐이랄 것도 없는 짐을 두고 영화에 나왔던 막국수 집을 찾아 가서 순두부와 막국수를 먹었다. 직접 만든 것들이라 성의가 있었고, 성의가 다해서 맛도 있었다. 근처 두물머리로 드라이브도 떠났고, 차가 많이 세워져 있는 카페에 들어가서 거대한 슈크림 빵을 먹으며 사진도 찍었다. 사실 우리 둘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밥풀처럼 붙어서 지낸다. 죽고 못 살아서 라기 보다는 촬영 기간이 아니고서야 집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고, 둘 다 사람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서 놀아도 집에서 노는데, 같은 집에 사니까 어쩌다 대다수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각자의 방에서 일을 할 때도 문자로 삼라만상을 일일이 공유하며 지내지만 이렇게 또 새로운 공간에 오니 기분이 달랐다.
커피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서 각자 방으로 헤어졌다. 그렇다. 그래서 지금 나는 강변호텔 속 호텔방에 혼자 앉아 숙제를 하고 있다. 시간은 밤 12시. 냉장고에는 맥주 4캔이 있고, 내 뒤에는 집에서 싸 온 먹다 남은 위스키가 날 지켜보고 있는 고요한 방. 고개를 돌리면 오른 쪽 창문 너머에는 검은 강물이 흐른다. 그 어느 순간보다 완벽하다.
얼마 전 대구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할 일이 있었는데, 이때도 남편이 동행했다. 남편은 식도락가라서 모든 것을 맛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대구 맛집을 탐방하기 위함이었고, 우리는 배가 찢어지게 먹고 돌아다니다 서울로 왔다. 사실 그때 다짐 비슷한 것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자식을 갖지 않기로 했고, 주변은 부지런히 출산과 양육의 숲에 들어가고 있고, 그 속에서 느끼는 부러움과 두려움이 만드는 소외감에 위축되기도 하니까 그냥 최대한 많은 걸 보러 돌아다니자고 결심했다. 우리 가족은 우리 둘 뿐이니까 각자 양심껏 벌고, 틈날 때마다 돌아다녀야 그나마 어느 미래에 둘 중 하나가 먼저 죽고 혼자가 됐을 때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마침 우리 직업이 은근히 돌아다닐 일이 많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불안정한 직업에 이런 장점도 있었다니. 엄마는 얼마 전 통화에서 내가 자식 안 낳을 거라는 말에 조심스럽게 그렇게 단정 짓지 말라고. 자식 안 낳으면 철이 안 든다는 말을 했다. 앞으로 이런 시선과 이런 말들이 더 무겁게 다가오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남편과 더 많이 새로운 곳을 다닐 것이다. 나 하나 철 안 든다고 사실 아무도 관심 없다는 것쯤은 이제 다 파악했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환경만이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 지금 내가 몇 달 만에 글을 끄적일 수 있게 해 줬듯이.
이 호텔은 무려 5만 원 대인데 조식까지 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 아침 햇살에 빛나는 북한강물을 보며 소박한 조식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 호텔 1층 카페에는 무려 수제 단팥죽과 녹두죽도 판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강물아 흘러라 나는 녹두죽도 먹을 거다.
- 2019년 5월 7일에 쓴 일기
(이 강변호텔에서 쓴 일기를 시작으로 일기란 것을 쓰기 시작했고, 어쩌다 연재란 것도 하게 되었다. 이번 주 연재를 위해 1년 전 이맘때 쓴 일기를 꺼내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럴 수가.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편이랑 나는 똑같은 마감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1년 후 5월에는 부디 다른 마감에 쫓기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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