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얀 버릇이 생겼다. 약속이 생기면 괜히 귀찮아져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 대해 기회 비용을 따져보게 되는 버릇. 감히 내가 뭐라고, 상대와의 시간을 재단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재수 없다는 사실에 코웃음을 치게 된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이 시간이 내겐 낯설지 않고 외려 반가웠다. 이를 핑계 삼아 혼자 있겠다고 해도, 심지어 약속을 취소해도 서로 납득할 수 있으니까.
혼자서 무얼 그렇게 하느냐고 친구가 물었다. 실은 혼자서도 꽤 바쁘다. 내가 당장 무얼 원하는지 들여다보면 할 게 너무나 많아진다. 평일의 일상은 이렇다. 퇴근하는 동네 가게에 들러 장을 보고, 체육관에 간다. 운동을 끝낸 뒤 장 본 걸 들고 걸으면서 어떻게 해 먹을지 미리 계획한다. 집에 가자마자 TV를 틀고 간단하게 저녁을 준비하고, 먹는다. 먹고 나면 치우는 건 잠시 미뤄두고, 빨래를 기다리면서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본다. 무언가 쓰고 싶은 게 생기면 글을 쓴다. 그러다 좀 지치면 밤 산책을 나선다. 뭐 다 귀찮으면 밥을 먹고 바로 잠 드는 때도 있다. 반복을 싫어하던 나는 어느새 나를 돌보는 일상에서의 행복에 젖어있다. 누군가에게 맞추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하면 되는 시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까지 하다.
주말에도 하루는 꼭 혼자서만 지내는 편이다. 주로 일요일을 비워둔다. 안 되면 일요일 저녁이라도 비워두는 습관이 생긴 뒤부터 월요일을 맞이하는 게 덜 부담스러워졌다. 평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 이번 주도 스스로를 잘 돌봤는지 되돌아본다. 산책이나 독서 등 제대로 나를 위해 쓰지 못한 시간이 있다면 이 때에 쓴다. 침묵한 채로 나에게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내가 더 소중해지고, 사랑은 더 샘솟는 것 같다. 채워진 마음은 사랑한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하늘을 조금 더 자주 쳐다보게 하고,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고르는 빈도가 잦아진다. 주고 싶어지는 마음은 혼자 있는 시간을 잘 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건 아닐까.
오늘은 무얼 할까. 영화를 보러 나갈까. 책을 읽다가 요리를 해볼까. 혼자서 자기 자신과 상의를 하는 일. 뭐가 보고 싶은지, 뭐가 먹고 싶은지를 궁금해하는 일. 그러면서, 그녀는 소소한 마음과 소소한 육체의 욕망을 독대하고 돌본다. 외롭다. 그러나 오랜 세월 매만진 돌멩이처럼, 그런 외로움은 윤기가 돈다.
(중략)
오롯하게 혼자가 되어서, 깊은 외로움의 가장 텅 빈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할 차례다. 감정 없이 텅 빈, 대화 없이 텅 빈, 백지처럼 텅 빈, 악기처럼 텅 빈. 그래야 그녀는 좋은 그림이 배어 나오는 종이처럼, 좋은 소리가 배어 나오는 악기처럼 될 수 있다.
- 김소연,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중
본디 말하는 걸 좋아한다.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내 이야기를 하는 데에 솔직한 편이다. 이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야지, 하는 조절이 ‘내 사람들’ 앞에서는 잘 안 되는 편이었다. 허나 고얀 버릇이 생긴 후부터는 그 자리에 나갔을 때 어떤 대화가 오갈지 떠올려 본다. 마음을 터놓는 대화가 가능한 사이인지, 서로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인지, 이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대화를 하게 되는 건 아닐지. 이렇게 떠올리고 난 다음에 만난 그와의 대화는 조금 더 깊어진다. 그와 만나기 전에 그는 어떤 사람인지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게 되니까. 어찌 되었건 그 만남에서 기대하는 대화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 관계를 멀리하게 된 뒤부터, 불필요한 말은 조금씩은 줄어든 것 같다. 필요한 말만 하는 건 아니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는 말을 먼저 하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이 힘이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관심이 줄어들었을 때는 그 관계를 잠시 멀리한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일지라도 이런 시간이 꼭 온다는 걸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잠시라도 그와 소원해지면 영영 멀어질 것이라 생각했던 지난 날들은 섭섭하다는 마음을 꽤 자주 가졌다. 내가 이렇게 관심을 쏟는데, 당신은 왜 그러지 않는지 억울했다. 억울함은 나를 짓눌러서 우울함에 자주 빠져들게 만들었고, 나의 마음은 변질되었다. 변질된 지도 모르고 계속 쏟은 마음은 자꾸만 세상에 불만을 끼얹었다. 불필요한 말인 걸 알면서도 계속했다. 침묵은 더 견디기 어려워서 말을 꺼내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치솟은 말들은 혼자가 된 시간에 내게 흩뿌려져 부끄러움으로, 앓는 소리로 남았다.
섭섭한 마음을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제어하지 않으면 부정적인 마음은 뭉게뭉게 치밀어 나를 억누르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않고 무게도 없는 어떤 것이 나를 뭉갤 수도 있다. 마음은 재화가 아니다. 매번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교환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때 내가 건넸던 마음을 그대로 남겨두는 자세가 필요하다. 손상되지 않은 의도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
- 오은, 『다독임』 중
그러니 말을 줄인다는 건, 나를 돌볼 만큼의 여유는 남겨놓는 것과도 같다. 혼자가 된 시간에 스스로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으려면 나를 맴도는 말들이 없어야 한다. 나누었던 대화가 그 시간, 서로의 마음에 고스란히 남겨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때에 꺼내어 볼 수 있는 ‘온전한 대화’로 남겨지길 원한다.
그 사람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고, 생각도 해 보고 만나서 농도 짙은 이야기로 채워가고 싶다. 이 마음이 들 때까지 만남을 미루더라도 이해가 되는 사람들이면 좋겠다. 우리의 대화가 옅어지기 전에. ‘가끔씩 오래 보자’는 말이 현명하게 느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홀로 남겨진다는 것에 대해 찬양한다. 두려워 말고 혼자가 되어보아요. 정말 편한데요.
추천기사
이나영(도서 PD)
가끔 쓰고 가끔 읽는 게으름을 꿈꿔요.
2020.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