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아메드> 모색하는 시간의 윤리로 손에 쥐는 변화
인물에의 밀착을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다르덴 형제에게 카메라는 화해와 더 나은 미래를 목적으로 내미는 진심의 손길이다.
글ㆍ사진 허남웅(영화평론가)
20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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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년 아메드>의 한 장면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현재를 영화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재에 맞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르덴 형제의 말이다. 다르덴 형제는 생계 곤란에 시달려 아이를 팔아야 하는 미성년 부부(<차일드>(2005)),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주민(<로나의 침묵>(2008)), 복직을 위해 회사 동료를 찾아다니는 실직자(<내일을 위한 시간>(2014)) 등 유럽 사회, 아니 지구촌의 사각지대에서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의 현재에 주목해왔다. 

다르덴 형제가 이번에 주목한 ‘현재’는 <소년 아메드>이다. 더 정확히는 ‘무슬림’ 소년 아메드(이디르 벤 아디)다. 아메드에게 이슬람은 종교 그 이상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지침이어서 이슬람 경전 ‘쿠란’에 적힌 내용을 목숨 걸고 따른다. 쿠란의 애매한 조항을 해석하여 알려주는 이맘의 가르침은 법으로 받아들인다. 이슬람을 향한 믿음이 절대적이다 보니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과의 갈등이 심하다. 

여자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쿠란의 내용을 무시한 엄마에게는 술주정뱅이라고 막말을 서슴지 않고, 이슬람을 믿지 않는 남자와 결혼도 하지 않았으면서 과감한 스킨십을 나누는 누나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메드에게 아랍어를 가르친 이네스(미리암 아케듀) 선생님을 향한 단죄의 방식은 도를 넘어선다. 쿠란의 내용을 노래로 가르치려 등 전통적인 이슬람 방식을 따르지 않는 이네스에게 이맘이 배교자라고 하자 아메드는 신의 이름으로 칼을 들어 처단하려는 것이다. 

유럽에서 무슬림과 현지인이 문화 차이로 갈등을 겪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성의 히잡 착용을 두고 곳곳에서 논란이고 프랑스에서는 이슬람교의 마호메트를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테러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르덴 형제의 모국인 벨기에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종교 원리주의에 빠져 극단적 행동에 앞장서는 젊은이들을 보며 다르덴 형제는 이들의 현재를 다루기 위해 <소년 아메드>를 만들 결심을 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는지 영화로 사회적 화두를 제시한다. 


영화 <소년 아메드>의 포스터

인물에의 밀착을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다르덴 형제에게 카메라는 화해와 더 나은 미래를 목적으로 내미는 진심의 손길이다. 혐오와 맹신, 가해와 피해, 분노와 좌절 등과 같은 극단의 감정적 거리감 대신 그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찾으려는 모색의 윤리가 존재한다. 마지막 장면, 아메드와 맞닥뜨린 이네스가 아메드의 칼을 든 손과 빈손 사이에서 과연 어느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 품을 것인가, 갈등 끝에 내리는 그 결정에 다르덴 형제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이는 여운의 형태로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관객에게 과제로 주어진다. 

자기가 믿는 것을 향해 경주마처럼 달리고, 속도를 늦추지 못해 폭주하다 추락하는 종교적 광신의 형태는 한국 사회에도 존재한다. 이런 갈등에 대처하는 일반의 풍경이란 건 광신의 주체를 비난하고 도덕주의자의 위치에서 잘잘못을 판단하는 즉흥의 처벌이다. 그럼으로써 불러온 결과는 더욱 첨예해지는 양극단의 광신의 갈등이다. 다르덴 형제는 소재를 선정하면 오래 두고 헤아려보는 시간을 갖는다. 그런 후 영화로 세상 속에 뛰어들어 집요하게 뒤쫓아 변화를 ‘모색’한다. 그것이 현재에 맞서는 다르덴 형제의 태도다. 미래는 그럼으로써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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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