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신도시의 풍경이 지나간다. ‘행복론’을 광고하는 명함이 흩어져 있는 바닥에는 한 남자가 난도질당한 채 쓰려져 있다. 그 옆에 놓인 피로 얼룩진 서류. 사채를 빌린 사람들의 신상명세서다. 화면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유령에겐 내일이 없단다. 그래서 유령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어제로 걷는단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도시 외곽의 공장에서 일하는 혜정(한해인 분)이다. 그는 자기 한 몸 먹고사는 일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하우스메이트의 어려움을 살피거나, 직장 동료의 고백에 귀기울일 여유도 없다.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혜정은 영문도 모른 채 유령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혜정의 시간은 하루하루 거꾸로 흐르고, 그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왜 자신이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 나선다. 이 탐색은 사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효연(전소니 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유은정 감독(이하 유은정)의 <밤이 문이 열린다>(2019)는 독특한 장르를 시도하면서 관객을 사로잡았다. 공포영화라기에는 드라마가 강하고, 드라마라기에는 보는 사람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무서운 영화. 이 영화의 장르는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곤 했는데, 유은정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적절한 이름을 찾았다. 바로 ‘유령 이야기’다.
구원 없는 세계의 유령과도 같은 존재들
유은정의 영화 중 실제로 유령이 등장하는 영화는 <밤의 문이 열린다> 한 편뿐이지만, ‘유령적 존재’는 그의 영화 세계를 묘사하는 키워드 중 하나다. 그의 작품에는 숨을 쉬고 있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사는 사람들, 주류 사회가 주목하는 화각에서 밀려나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삶이 없는 건 아니다. 유령이 된 혜정이 비로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아가듯, 그들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살아내기 위해 애쓴다. 오직 차가운 세상만이 그들을 유령으로 만든다.
유은정의 유령들은 서울 변두리를 부유한다. 서울의 화려한 표면은 청년에게 꿈을 품게 하지만, 막상 찾아온 그곳은 망가진 것들의 도시다. 대도시의 이면이 처음 등장하는 건 단편 <낮과 밤>(2012)에서였다. 영화는 막 서울로 이주한 현영(장현영 분)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서울에서 가장 월세가 싼 동네에 자리를 잡은 그는 자전거를 한 대 마련한다. 고장 난 자전거를 고치기 위해 찾아간 동네 자전거포에서 현영은 자전거 수리공 민우(최민우 분)를 만난다. 뭐 하나 마음 같지 않은 일상에서 민우를 향한 설렘이 현영에겐 유일한 위로다.
하지만 그런 감정 역시 핑크빛은 아니다. 한 인상적인 장면에서 현영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롱숏으로 잡힌 어두운 골목, 저 멀리 붉은 빛을 발하는 교회 십자가가 보인다. 현영의 자전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다른 행인의 머리를 가격한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폭력이 닥쳐온다. 이 한 장의 타블로는 지금/여기, 구원이 없는 세계를 보여주는 서늘한 삽화다. 영화는 이 장면의 긴장감을 끝까지 끌고 간다. 민우가 어쩌면 그 괴한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낯선 남자를 볼 때 드는 이중적인 마음이 있지 않은가. 이 남자가 나를 해칠 수도 있고, 나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민우라는 캐릭터에 대해 질문하자 유은정이 답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작품에서 이처럼 양가적인 것은 비단 낯선 남자들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캐치볼>(2015)에서는 주인공 민영(원진아 분)의 오빠가 그런 존재다. 늘 민영을 돌봐주었고 항상 다정했던 오빠는, 어느 순간 냉정한 얼굴로 민영에게 가족 구성원으로서 할 몫을 다 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 할 몫이란 오빠가 저지른 살인을 방조하는 일이다. 기댈 수도, 기대지 않을 수도 없는 가족. <싫어>(2015)와 <밀실>(2016)이 묘사하는 가족 관계도 이처럼 복잡하다.
내 또래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유은정의 영화 속 ‘가족’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사회의 시스템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은정은 자신의 작품을 사로잡고 있는 불안의 정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사회의 내부자들은 남성들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세상과 불화하는 건가, 나는 다수와 불화하는 존재인가, 스스로를 의심했다. 아버지나 오빠처럼 주류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행한 폭력이나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그 관계를 끊어내야 할 것 같지만, 그들에게서 고립되는 것은 또 두려웠다.”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 혜정 역시 자신을 키워준 오빠와 연락을 끊고 독립하려고 노력 중이다. <캐치볼>의 민영이 떠오른다. 영화의 시작, 혜정이 철저히 외톨이인 것은 어쩌면 오빠라는 ‘안전하지 않은 안전망’으로부터 단절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규범과 규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흔들리던 단편의 주인공들과 닮은꼴이었던 혜정은 유령이 되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조금씩 달라진다. 죽은 지 이틀 째 되던 날, 그는 돌봐줄 어른 하나 없이 쓸쓸하게 죽어가는 소녀 수양(김소현 분)을 발견하고 뒤를 따라간다. 혜정이 살아 있을 때에는 도움을 청해도 외면해버렸던 소녀다. 그리고 그 소녀가 그의 목소리를 들어주었을 때, 혜정은 자신과 수양을 구하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유은정은 “2016년 이후, 페미니즘 흐름 속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섣부르게 희망을 말할 수는 없지만, 변화를 꿈꾸고 연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또래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고 덧붙였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에서 달라진 부분이 무엇인지 물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건 효연 캐릭터다. 시나리오 초기 단계에서는 효연은 남자로 설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바닥에 있을 존재가 아니야, 기회만 잘 만나면 성공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가진 인물. 난 늘 스스로를 의심 하는 편이라, 그런 자신감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흥미로웠다. 한편으론, 사회가 여성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신에 대해 불안해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효연을 여성 캐릭터로 바꾸면서 ‘욕망을 드러내는 여자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덕분에 영화는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섞여 들어간 생동감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여성관객들의 목소리가 작가에게 들리고, 작가가 또 다른 여성서사를 선보이는 시간. <밤의 문이 열린다>가 놓여있는 자리는 그런 시간의 흐름 속이다.
운이 아닌, 우리가 바꾼 세계가 우리를 구하도록
이제 다시 영화의 시작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짧게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지만, 피로 얼룩진 신상명세서 위에는 유은정 본인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는 “사본으로 남은 다양한 얼굴들을 담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유은정의 현실 인식을 읽는다. 그는 혜정과 효연을 명백하게 분리시키지 않는다. 어떤 이는 운이 좋아 ‘행복론’을 피해가지만, 어떤 이는 “돈 5백만원 때문에” 신체 포기 각서를 쓰게 된다. 그 운 나쁜 사람이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감독 본인일 수도 있다.
유은정의 영화에서 공포는 장르라기보다는 시대의 공기다. 그렇다면 혜정이 보여주는 작은 변화는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을까? 우리는 운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 이 예민한 촉을 가진 감독이 포착해낼 내일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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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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