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스 월드, 촉망받던 아티스트의 잔재
22곡, 58분. 길지만,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알게 된다. 그가 아주 재능 있고, 큰 가능성을 가진 뮤지션이었다는 것을.
글ㆍ사진 이즘
20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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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랩 스타가 세상을 떠났다. 그간 두 장의 정규작 , < Death Race for Love >와 래퍼 퓨처(Future)와의 합작 < Juice On Drug >로 상승 궤도를 타던 1998년생 래퍼 쥬스 월드가 작년 12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며 많은 대중에게 아쉬움을 안겼다. 그가 미발매로 남겨둔 2000여 곡 중 몇 개를 추출해 꾸린 첫 사후 앨범 < Legends Never Die >는 아티스트의 주 면모였던 음울한 트랩, 이모(Emo) 힙합 문법의 매끈하고 정돈된 음향을 선보이며 그의 음반 중 가장 큰 상업적 성과를 이루고 있다. 비보의 충격을 뒤로하고 촉망받던 아티스트의 잔재가 새로운 서사로 펼쳐진다.

매우 불안정한 심리를 드러낸다. 어두컴컴한 트랩을 기저 삼아 래퍼는 랩 스타가 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혼란과 끊을 수 없는 약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텍스트를 꽉 채운 이 한탄이 정교한 문장으로 이어질 때 음반의 진솔함이 꽃핀다. '내 불안감은 행성만큼 커 / 다섯, 여섯 개의 알약이 내 오른손에'라 노래하는 'Righteous', 가라앉는 자신을 타이타닉호에 빗댄 'Titanic' 등 작품은 청자를 잠식시킬 만한 마음의 구멍으로 가득하다. 죽음에 대한 고찰과 예견을 담은 듯한 'Can't die', 천국에서 그가 말을 걸어오는 'Juice WRLD speaks from heaven'도 사후 앨범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더욱 처연하게 다가온다.

감정의 전달 방식이 불친절하지 않은 것이 본작의 핵심이자 장점이다. 58분간 이어지는 불길한 내용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지만, 타자를 향한 비난이나 스웨그를 빙자한 무차별적 혐오가 없고 시선을 오롯이 자신의 내면에 한정해 공격성을 띠지 않는다. 끊임없는 고통 속 스스로 번뇌하고 허우적대는 화자의 모습이 22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는 편에 가깝다. 래퍼 트리피 레드(Trippie Redd)와 함께한 'Tell me u luv me'의 사랑을 향한 아슬아슬한 갈망, 몽롱한 기타 리프에 '가끔은 어떻게 감정을 느끼는지 모르겠어 / 나는 죽을 때까지 혼자일걸'이라 위태로이 토로하는 'Wishing well'을 마주하면 아티스트의 인간적인 가냘픔에 연민까지 느끼게 된다. 혼란의 악순환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한 폭의 공감대가 되어줄 수 있는 언어이다.

긴 재생 시간을 변함없는 트랩 비트로 일관했다면 듣는 집중력이 떨어졌겠지만, 개별성 강한 노래들을 배치해 긴장감을 유지한다. 디제이 마시멜로(Marshmello)가 로킹한 사운드와 EDM으로 꾸린 'Come & Go', 스크릴렉스(Skrillex)와 함께한 발칙한 팝 펑크(Punk) 'Man of the year'는 통쾌한 속도감으로 반복 청취가 가능한 뱅어 트랙으로 기능한다. 'Smile', 'Life's a mess'에서 힘을 보탠 위켄드(The Weeknd)와 할시(Halsey) 역시 활기를 끌어 올린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곡이 자극 없이 명료하게 귀에 들어오는 훅(Hook)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의 장기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

두 번째 인털루드 'The man, the myth, the legend'는 유명 래퍼들의 그를 향한 예찬을 담았다. 에미넴, 트래비스 스콧, 영 떡(Young Thug) 등이 각자가 본 쥬스 월드, 1시간 동안 프리스타일을 뱉을 정도로 플로우 감각이 뛰어나고 꽂히는 멜로디를 3분 안에 뽑아내던 그를 말한다. 본작은 쥬스 월드의 그러한 자질을 부족함 없이 담아내며 그 상찬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22곡, 58분. 길지만,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알게 된다. 그가 아주 재능 있고, 큰 가능성을 가진 뮤지션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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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스 월드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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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