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하고 부드럽게 본질을 흐리는 표현이 있다. 호남 지역에 대한 다른 지역민들의 일방적 혐오를 ‘지역감정’이라 부른다거나, 가부장제 아래서 기혼 여성이 겪는 모멸을 ‘고부갈등’으로 퉁 친다거나, 남존여비 사상을 바탕으로 한 가정 내 성차별을 ‘남아선호사상’이라 돌려 말하는 것 등이 그렇다. 딸보다 아들이 좋다는 말은 짬뽕보다 짜장면이 좋다는 말처럼 가벼운 ‘선호’의 문제일 수 없다. 딸이 ‘아닌’ 아들을 원한다는 욕망은 결국 아들의 삶을 위해 딸의 삶을 버리거나 이용하거나 말 그대로 지우는 행위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요즘 한 케이블 TV 채널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아들과 딸>(1992)은 한국 대중문화 영역에서 이른바 ‘남아선호’ 문제를 다룬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주인공 후남(김희애)은 7대 독자인 쌍둥이 남동생 귀남(최수종)의 그늘에서 차별받으며 자란다. ‘다음(後)에는 꼭 아들(男)을 낳는다’는 열망이 담긴 이름부터 후남을 위한 것이 아니듯, 그의 어머니는 쓸모없는 딸이 귀한 아들의 앞길을 막는다며 냉대하고 아버지는 방관한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후남이 인고의 세월을 거쳐 교사이자 소설가로 성공하고 좋은 남편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을 그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페미니즘적 메시지를 담았다고 평가된 이 작품을, 근 30년이 지난 뒤 다시 보며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후남은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할지언정 차별하는 부모나 그 수혜자인 귀남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집을 떠나 어머니가 반대하는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귀남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함께 사는 여동생 종말(곽진영)에게도 “이 집에선 귀남이가 가장”이라 이른다.
버프툰에서 연재 중인 공명 작가의 웹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들과 딸’의 이야기다.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태몽을 통해 ‘해송’이라는 이름을 받은 주인공은 태어난 뒤 딸이라는 이유로 냉대당하며 ‘숙이’라 불리고, 빼앗긴 이름은 다섯 살 아래 남동생의 차지가 된다. 냉담한 아버지, 어리석은 할머니, 탐욕스러운 동생으로 인해 숙이가 겪는 차별의 고통은 후남의 경험 못지않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는 우리가 지장보살의 구제 덕분에 지옥이 아닌 곳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전생의 잘못을 속죄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하지만, 눈칫밥을 먹고 공포에 떨며 자라는 숙이에게는 현세가 지옥과 다르지 않다.
만화 속 숙이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73년 한국의 현실 또한 픽션보다 덜하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자녀관에 대한 아시아 6개국 공동연구’에서 우리나라 180쌍의 부부를 인터뷰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 중 농촌 거주자의 40%가 “사내아이를 낳을 때까지 계속 낳겠다.”, 도시 거주자의 55%가 “딸 셋 낳을 때까지는 아들을 기다려 보겠다.”고 말했다. “첩을 얻어서라도 남아를 갖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도시 거주자의 25%, 농촌 거주자의 75%나 되었다. ‘남아선호’가 팽배했던 사회에서 딸들의 삶은 신산하기만 했다. 숙이의 짝꿍으로 화가가 꿈이던 미자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메리야스 공장에 다니면서 오빠의 학비를 번다. 숙이가 잠시 좋아한 남학생 철중의 누나 필남은 공장에서 일해 남동생과 어머니를 부양하다 손가락을 잃는다. 필남의 이름 역시 자신이 아니라 아들을 낳기 위해 지어졌던 것이다. 심지어 숙이가 부러워했던 부잣집 딸 지민조차 오빠와 달리 좁은 화분 속의 화초처럼 키워지다 ‘시집보내질’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낀다.
불교적 정서와 탱화의 강렬한 색감, 과감한 연출이 독특한 흡인력을 갖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감정은 숙이의 절망과 분노다. 분노하지 않았던, 어쩌면 분노할 줄 몰랐던 후남과 달리 자신을 차별하는 가족들과 가부장제에 뼈저리게 분노하는 숙이는 공부를 무기 삼아 자신의 삶을 지키려 노력하는 동시에 다른 ‘딸’들의 삶에도 눈을 돌린다. 특히 낯설고 거친 성격의 필남을 ‘미친 여자’라고 여겼던 숙이가, 사슬에 매인 코끼리 같은 신세였던 그를 이해하고 응원하게 되는 과정은 90년대생 작가가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70년대 여성들의 자매애라는 면에서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작은 접점이다. <아들과 딸>을 집필한 박진숙 작가는 1947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몰래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필남은 1949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만 나와서 공장에 다니던 필남은 1970년 박완서 작가의 <나목>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것을 보고 작가가 되고 싶다 결심한다. 후남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되어 결혼 후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소설을 써오던 박진숙 작가 역시 1981년 같은 공모전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11년 뒤 <나목>을 각색한 드라마를 집필했다. <나목>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공명 작가는 2019년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나목>을 오마주한 장면들을 그려 넣었다. 봄을 찾아 고군분투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이처럼 시간을 뛰어넘어 연결되며 새로운 역사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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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칼럼니스트)
대중문화 웹 매거진 <매거진t>, <텐아시아>, <아이즈>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의 책을 썼다.
sny
2021.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