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면 계절은 서둘러 봄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는 듯합니다. 기온이 조금씩 오르고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는 것도 느낄 수 있어요. 우리도 겨울을 보낼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거지요. 다시 한번 유난히 추운 겨울이 가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들을 잘 맞이하기 위해 지금의 시간들을 잘 보내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봄을 기다리며 읽는 겨울의 시를 소개합니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저 | 문학동네)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이규리 시인의 시집입니다. 겨울을 닮은 시들은 희고 고요하고 쓸쓸합니다. 우리가 도처에서 경험하는 무수한 불가해함과 무력함과 도리없음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첫눈입니까』는 그것을 물리기보다는 가만 짚어내고 털어놓으며, 그와 동반해 겨울을 나는 우리 마음의 정경을 천연하게 펼쳐냅니다. 시인은 그렇게 또 겨울을 살아내주기를, 살아낼 것임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릅니다. 겨울은 이렇게 첫눈과 같이 투명한 흔적을 안고 다음 계절을 기다립니다.
그저 살아라, 살아남아라
그뿐
겨울은 잘못이 없으니
당신의 통점은 당신이 찾아라
나는
원인도 모르는 슬픔으로 격리되겠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옹호하겠습니다
이후
저는 제가 없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_『당신은 첫눈입니까』, 「그리고 겨울,」 중에서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한연희 저 | 아침달)
2016년 창비신인문학상을 수상한 한연희 시인의 첫 시집입니다. 이번 글에서 이 책을 함께 소개하려고 마음먹은 데는 제목이 큰 역할을 한 것도 맞지만, 실은 “그다음은”에 더 집중해서 읽게 된 시집이에요. 『폭설이었다 그다음은』의 세계는 무언가 어긋나 있어요. 기울어진 세상에서 ‘나’는 비뚤어진 존재입니다. 그 비뚤어진 존재가 작아지거나 숨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시들은 더 매력적이고요. 시집을 읽는 내내 빙긋 웃게 하는 씩씩함이 있습니다. 이렇게 함께라면 매서운 추위도 두렵지만은 않을 겁니다.
솜이불 밖으로 나온 두 개의 발이
너무 차가워서 어루만져주었다
여러 개의 작은 발들로 늘어났다
방학에는 얼마든지 늦잠을 자렴
잃어버린 걸 찾기 전에는 눈뜨지 말렴
_『폭설이었다 그다음은』, 「겨울방학」 중에서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정현우 저 | 창비)
겨울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표지를 입은 책,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는 ‘시인의 악기 상점’이라는 이름의 뮤지션이기도 한 정현우 시인의 첫 시집입니다. 등단 6년 만에 처음 선보이는 시집에서 그는 슬픔을 노래합니다. “힘들 때는 죽을힘을 다해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시인은 독자들에게 마음껏 슬퍼할 작은 방을 내어줍니다. 그 방에 들어서면 낯선 이름의 슬픔이 익숙한 얼굴로 앉아있고, 그의 슬픔이 나의 그것과 맞닿는 순간 다른 어떤 기쁨의 공유보다 벅찬 감정과 위안을 느끼게 돼요. 이렇게 슬픔이 눈물이 되고 눈이 비가 되어 내리면 새롭게 봄이 오는 것이겠지요.
간밤의 꿈을 모두 기억할 수 없듯이, 용서할 수 있는 것들도 다시 태어날 수 없듯이, 용서되지 않는 것은 나의 저편을 듣는 신입니까, 잘못을 들키면 잘못이 되고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 용서할 수 없는 것들로 나는 흘러갑니다. 검은 물속에서, 검은 나무들에서 검은 얼굴을 하고, 누가 더 슬픔을 오래도록 참을 수 있는지, 일몰로 차들이 달려가는 밤, 나는 흐릅니까. 누운 것들로 흘러야 합니까.
_『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슬픔을 들키면 슬픔이 아니듯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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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