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소설가와 김현 시인이 우정의 운을 뗀 건, 지난 2010년의 일이다.
‘4대강개발사업반대를위한작가행동’에서 시인은 투쟁을 위한 원고를 쓰고 모았고, 소설가는 연대와 결집을 위해 글을 쓰고 서명하고 행동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사회를 향한 발언에서 함께 보폭을 맞춘 둘은 ‘차츰 일상의 안위를 묻고, 맛있는 차와 고소한 빵을 나누고, 서로가 쓴 글을 응원하고, 걷고, 대화하고, 그런 ‘산책의 행복’에서 영감을 얻어 서로의 소설이나 시에 현과 해진 같은 인물을 등장’시키는 사이가 됐다. 이렇게 쓰니 아주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시인님과 나는 사실 전화도 자주 하지 않고 따로 만나는 일도 드물며 함께 여행을 하거나 서로의 집을 방문한 적이 없죠. 그러나 멀리 있어도, 자주 만나지 못해도, 나를 걱정하는 시인님의 다정함이 전해지곤 합니다.” 함께 쓰고 최근 펴낸 책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 86쪽에 달린 소설가의 추신이다. 시인은 이런 우정을 ‘머뭇거리는 우정’이라고 프롤로그에 적었다. 둘은 ‘영화’라는 매개를 앞세워 편지라는 형식에 눌러쓴 문장 사이사이에 이 ‘우정’을 북마크처럼 끼워놓았다. 당신이 이 책에서 서로를 향한 안부와 질문과 다정을 확인하다 어느덧 ‘위로’와 마주하게 되는 이유다.
‘머뭇거리는 우정’이라는 표현이 참 절묘합니다. ‘머뭇’이라는 어근의 뉘앙스 때문인데, 많은 감정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더라고요.
김현(이하 김): 머뭇거린다는 게 약간의 거리감도 있으면서 다가가지 않는 것도 아닌 상태잖아요. 확 가까워지고 늘 붙어 다니는 우정도 있지만, 이런 거리감 있는 우정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썼어요.
조해진(이하 조): 김현 시인과는 오랜만에 만나도 마음속 얘기를 많이 하게 돼요. 서로를 잘 아는 것 같다고 할까. 언젠가 나에 대해 ‘속마음에 걸려 바깥에서 먼저 넘어지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정말 놀랐어요. 나도 모르는 나 자신을 그렇게 표현해주더라고요.
『당신의 자리는 비워둘게요』는 온라인에 연재하는 공개 편지라는 프로젝트의 결과잖아요. 처음 제안받았을 때, 흔쾌히 응하셨나요?
조: 에세이는 힘들고 부끄러운 장르라 고민이 없진 않았어요. 하지만 김현 시인이어서 흔쾌히 응했죠. 삶을 얘기하는 거라면 부담을 느꼈을 텐데, 편한 사람, 좋은 친구인 김현 시인과 영화 얘기를 하는 거라면?.
김: 김현 아니면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웃음) 처음 제안이 왔을 때 올 게 왔구나 생각했어요. 조해진 소설가가 상 받을 때 축사도 하고, 출간 행사 사회도 보고, 추천사도 썼던 터라 책으로 할 일이 남았구나 생각하던 차였거든요. 지금까지 쓴 산문집에 없던 편지 형식이기도 해서 고민할 게 없었고요.
조: 처음 의도라면 영화 얘기를 쓸 줄 알았는데, 막상 편지가 오고 가면서 사는 얘기, 삶의 의문, 사회적 이슈, 작품 얘기 등 생각지 못한 내용을 담게 되어서 훨씬 즐거웠어요.
김: 편지를 미리 써놓을 수 없다는 것도 매력이었어요. 어떤 편지가 올지 모르니까. 누구든 편지를 받아야 답장을 쓸 수 있잖아요.
김현 시인이 언급했지만 조해진 작가님의 소설 『단순한 진심』, 「산책자의 행복」은 편지 쓰는 사람이 등장하거나, 편지로 시작해 편지로 끝납니다. 실제로도 편지(쓰기)를 좋아하시나요?
조: 다른 작가에 비해 서간체가 많은 편이긴 한데, 실제로 그렇진 않아요. 마음으로는 많이 쓰는 편이에요. 쑥스러운 성정이라 쓰고 싶은 문장이 생기면 따로 적어놓긴 해요.
김: 생활인 조해진은 안 쓴다고 하지만, 소설가 조해진은 편지라는 속성이 잘 어울리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워낙 잘 보고 듣는 사람인데, 소설을 읽으면 잘 들은 걸 잘 말하려는 게 느껴지거든요.
조해진 작가님이 보낸 첫 편지의 첫 질문이 “인간은 아름답니?”입니다. 추상미 감독의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함께 언급되고요. 각각의 편지에는 각자의 일상과 근황도 적혀 있지만, 사회 이슈, 삶과 죽음과 존재와 계절과 계급, 자신의 글쓰기와 관련한 사유가 영화와 함께 버무려져 있습니다. 혹시 편지를 받았을 때 답장을 쓰기 어려웠던 질문 혹은 내용이 있었나요?
김: 첫 편지 쓸 때가 어려웠어요. “인간은 아름답니?”라는 질문에 답도 해야 하고, 내 얘기도 해야 하고, 너무 많은 얘기가 떠올라서?. 한창 원고 쓸 때 친구 두 명이 세상을 떠났는데, 죽음 얘기가 너무 반복되는 게 아닌가, 내용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답장을 받으면 그런 무거움을 위안을 주는 방식으로 누나가 바꿔 놓더라고요. 책 속에 있지만, 누나가 이번에는 영화 <벌새>를 언급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역시나 <벌새> 얘기가 있어서 ‘통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는 재밌기도 했어요.
조: 따로 교감한 것도 아닌데,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인 2부에서는 연애 얘기, 행복에 대한 얘기를 똑같이 쓰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답장을 쓰기 힘들고, 쓰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던 건 노동자 얘기를 할 때였어요.
방금 김현 시인이 ‘누나’라고 말한 것처럼,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존칭과 편하게 이름을 부르는 내용이 섞여 있어요. 편지 쓸 때의 마음 상태가 반영된 건가요?
조: 이유는 따로 없어요. ‘현아’로 시작하는 편지를 계속 쓰려고 했는데, ‘시인님’ 하고 부르면서 다양하게 쓰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김: 밀당하는 느낌?(웃음) 관계의 맥락이라는 게 있잖아요. 누나와 현, 소설가와 시인이라는 관계. 둘의 관계 안에 여러 가지 속성이 있을 텐데, 편지 내용에 따라 어떨 때는 누나라고 하는 속성이 앞서고, 어떨 때는 존대를 쓰고 싶은 속성이 앞서더라고요.
149쪽에 이런 질문이 있어요. “영화가 삶이 된다면 어떤 영화를 고르시겠어요?”
조: 평범하고 잔잔해 보이는 삶도 그 안에는 파고가 있잖아요. 제 경우, 어릴 때는 작가가 되는 게 두려웠어요. 작가의 삶이 너무 파란만장해 보여서. 그런데 막상 작가가 되고 보니 파란만장한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물론 그것 역시 겉모습이고, 안에서는 엄청 많은 파고가 일고 있지만.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 엔딩 신을 정말 좋아하는데, 여주인공이 영화 내내 외로움과 고통을 드러내지 않다가 폭발적으로 터뜨려요. 삶이 그런 것 같아요.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도시적 삶이지만 그 안에 죄의식도 있고, 욕망도 있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있고, 여러 가지 마음이 일렁이는 삶을 다루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결국 일상을 얘기하지만 그 안에는 온전히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영화를 고르고 싶어요.
김: 첫 번째 책 『걱정 말고 다녀와』에 임대주택을 찾으러 다니는 게이 커플의 하루를 다룬 글이 있어요. 만약 영화를 만든다면 이 스토리로 ‘견본세대’라는 영화를 찍고 싶다고 얘기했었어요. 그런데 지난해 가장 좋아하는 시를 모티브로 조해진 작가가 퀴어 단편을 썼는데, 그걸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어요.
조: 김현 시인의 시 「가장 큰 행복」과 동명의 제목으로 큐큐 시리즈에 쓴 소설인데, 근미래에 기후 위기로 세계가 망한 뒤 게이로 살고 싶은, 이제야 나답게 살고 싶은 중년 게이 이야기예요.
김: 묘하게 저와 짝꿍 얘기 같았어요. ‘견본세대’에 등장한 젊은 게이 커플이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얘기를 찍고 싶은데,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각색하면 좋을 것 같아요.
책 속에서 언급한 영화가 무려 105편입니다. 자주 듣는 질문일 텐데, 좋아하는 감독과 영화를 꼽아주신다면요?
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인간에 대한 믿음, 희망이 과하지 않게 들어 있어서 좋아요. 냉소적인 영화, 냉소적인 소설도 좋지만, 어느 시점부터 인간을 신뢰하는 <환상의 빛>이 느껴지는 영화가 좋더라고요. 참, 인생 영화로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꼽고 싶어요.
김: 요즘은 지난해 본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꼽아요. 지금 막 떠오르는 감독 이름은 데이비드 린치, 켄 로치. 알랭 레네?.
서로의 편지에서 가장 위로받은 내용 혹은 문장 혹은 ‘다정한 추신’이 있을까요?
조: 다 좋았지만, 마지막 편지의 추신이 제일 위로가 됐어요. 둘이 함께 영화를 보고 행복했다는 내용인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김: 저도 마찬가지예요.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누나가 해변 얘기를 소설로 썼다는 추신. 해변에 서 있는 김현처럼 보이는 인물로 소설을 썼다는데, 분명 그 사람의 생애를 아끼면서 인물화하고 글을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묘하게 찡하더라고요.
“이 편지들이 묶여 책이 나오는 날, 그땐 내가 너에게 작은 동전 지갑을 사주고 싶다. 동전 지갑이 찰 만큼은 부자가 되라고, 그러니까 길을 걷다 목이 마르면 음료수 한 캔 정도는 언제라도 사 마실 수 있는 …”이라는 내용이 있어요. 동전 지갑은 사주셨나요?
조: 사줬어요. 공진단까지 추가해서.(웃음) 2년 전에 현이가 하도 비실거려서 인터넷으로 공진단을 주문했는데, 케이스만 배달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이번에 다시 사줬어요.
김: 저는 못 사줬어요. 누나가 그때 보낸 공진단 케이스는 메모지 꽂이로 쓰고 있어요.(웃음)
책의 1부는 서로에게 쓰는 편지, 2부는 ‘모모님’이라는 가상의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2부의 연장선에서, 2021년 2월호를 읽을 독자들, 혹은 코로나블루로 힘들어하는 ‘모모님’에게 추천하실 영화와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 다르덴 형제가 감독한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만, 우리 사회가 연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코로나를 맞고 있는 것 같아요. 연대의 포즈를 취할 때 피해를 보는 경우가 더 많은 사회에 코로나까지 닥치니까 내 것부터 챙겨야지 하는 마인드가 더 강해지는 느낌이에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에는 복직을 위해 동료들의 서명을 받으러 다니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누군가는 보너스를 포기하고 복직에 동의하고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 일일이 직면하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과정이 담겨 있어요. 내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어떻게 해야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추천합니다.
김: 데브라 그래닉 감독의 <흔적없는 삶>.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아빠와 거기에 종속된 삶을 사는 딸이 등장하는데, 결국 딸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환한 삶을 찾게 되는 이야기예요. 아빠는 아빠대로, 딸은 딸대로 자기 삶을 개척하는 과정이 감동적인데, 도시가 아닌 숲에서 공동체와 연대를 이루고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얘기라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시의성이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얹자면, ‘5인 이상 집합금지’에서 새삼 느낀 건데, 지금까지 5인 이상을 자주 만나고 있었구나, 거기서 에너지를 받고 있었구나 하는 소중함을 알게 됐어요. 독자들도 그런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이 과정이 지나면 극장에 가리라. 그런 한 방울의 희망과 기쁨을 동력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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