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 시간표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원형 그릇을 대고 종이에 그려야 하나 생각했는데 인터넷에 검색하니까 포맷이 다 있었다. 역시 없는 게 없구나 생각했다. 시간과 할 일만 체크하면 금방 완성할 수 있었다. 해야 할 일이나 약속을 관리하는 것 말고 꾸준히 매 시간마다 할 일을 계획하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방학 이후 처음이 아닐까? 눈 뜨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쉬다 잤던 사람으로서 시간표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매일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데 또 무슨 계획이 필요해?
시간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오전에 가장 컨디션이 좋다는 것을 알고 난 후였다. 코로나로 인해 친구들과 만나거나 외출하는 일이 극히 드물어졌고 퇴근하면 일찍 자는 일이 늘었다. 일찍 잠들어서 그런가 종종 새벽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아주 차분하고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평상시처럼 눈을 뜨는 날에도 출근하고 점심을 먹기 전까지의 몸이 오후보다 더 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아침형 인간으로서의 나를 찾게 된 것이다.
밤 새지 못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십대와 이십대, 공부를 하던 때에 친구들이 밤을 샜다는 이야기를 하면 신기할 따름이었다. 평생 많이 자고 잘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 생각해왔다. 요즘 슬슬 몸이 다른 것을 느낀다. 식사 후 몇 번 몸이 무겁고 불편했을 때 나는 신호를 무시했다. 평소보다 덜 먹었는데 왜 이러지? 요즘 몸이 좀 안 좋은가 보네. 아뿔싸, 그것은 몸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변했다는 신호였다. 나는 생각보다 아침잠이 없고 덜 먹어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예전만큼 먹을 수 없다, 이제 예전만큼 자지 않아도 된다. 나의 몸은 변하고 있고 그건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뉴노멀이 온 것이다.
“요즘” “이상하게” “이렇네” 하는 순간을 수 차례 겪었을 것이다. 세 가지가 모두 잘못된 판단이었다. “요즘”이 “이제는”으로 고착화될 것이었고 “이상하게”는 “평범한” 일로 머물 것이었고 “이렇네” 하던 것은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게 될 터였다.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단발성 사건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는 변화를 인지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때라면 예외였을 사건이 이젠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몇 번의 발생 끝에 인정해야 하는 걸까? 아주 헐거운 시간표 속에 다음 예외를 눈치챌 여유를 넣어 둔다. 반갑습니다, 어서 오세요.
“과거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새로운 이야기를 써가야 합니다.” 위젤 교수는 이야기를 들려준 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래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_아리엘 버거, 『나의 기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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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