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이지은)이 깜박 졸다 눈을 뜨니 앞에 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다. 창석(연우진)이다. 꿈인가, 현실인가. 아, 생각났다. 창석은 아는 언니의 사촌 동생이다. 둘이 잘 맞을 것 같다며 주선해 만나게 됐다. 근데 이상하다. 젊은 두 남녀가 만나기에 장소가 예스럽다. 지하철 역사 안에 위치한 커피숍인데 미영과 창석의 테이블 주변에는 이들 나이의 두세 배 뻘 되는 어르신들이 자리하고 있다. 별말 없이 정중동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이 세상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이건 생인가, 사후의 풍경인가. 그때 별안간 미영이 존대하던 창석에게 말을 놓으면서 나이 든 미영(손숙)으로 외모가 바뀐다. 창석은 이상한 기색 하나 없이 미영을 엄마라고 부른다.
<아무도 없는 곳>은 영국 런던에서 서울로 돌아온 소설가 창석이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는 영화다. 미영 이후에 창석은 편집자 유진(윤혜리)을 만나고,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사진가 성하(김상호)와 조우하고, 약속을 핑계로 혼자 들른 바에서 바텐더 주은(이주영)과 위스키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창석을 구심력 삼은 <아무도 없는 곳>은 그가 만나는 인물들이 원심력으로 흘러가는 구성이다. 여기서 구심력이 상심의 감정이라면 원심력은 시간이다. 소설과 사진은 순간을 편집하고 포착해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박제하는 성격을 지닌다. 후에 우리는 소설을, 사진을 보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상실감을 독한 술을 삼키듯 음미한다.
이 영화는 시간에 마모하는 삶을 기억이라는 방식으로 채워간다. 창석이 만나는 인물에 따른 4개의 에피소드 중 미영 편을 자세하게 설명한 건 <아무도 없는 곳>의 정서와 주제를 그대로 압축해서다. 창석과 미영이 나른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커피숍 창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쳐간다. 그 모습을 보느라 좌우를 오가는 미영의 눈동자가 시계추 같아 꼭 이들 주변으로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는 듯하다. 삶은 순간의 연속이다. 순간은 지나가면 과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 삶이 향해 가는 미래의 목적지는 죽음이다. 우리는 삶을 흘려보내면서 상심하고 언젠가 닥칠 죽음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꿈과 현실, 생과 사 등의 경계가 없다. 시간만이 관통하여 존재할 뿐이다.
<아무도 없는 곳>을 연출한 이는 최근에 <조제>를 선보였던 김종관 감독이다. “한 명의 인물이 여러 사연을 통과해 나가는 이야기다. 기억, 상실, 죽음, 늙음과 같은 소재를 뭉쳐 결국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여기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상태를 잡아내려 불확실하더라도 과감한 시도를 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감독의 말처럼 인간은 상실의 감정을 통해 죽음에 다가가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삶의 끝이 죽음인 줄 알면서도 희망을 나침반 삼는 건 상심이 삶의 필요조건인 까닭이다. 생과 사를 연결해야 삶이 완성된다는 걸 안다고 할까. 그래서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Shades of the Heart’, 즉 ’마음의 음영’이다.
<아무도 없는 곳>의 중간중간에는 여인(김금순)이 갑작스레 창석과 창석이 만나는 인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희망이 보인다. 돛의 방향을 바꾸어라.”, “이리와, 손을 잡아야 길을 안 잃어”, 그러면서 영화의 마지막에는 아이 손을 잡고 골목 끝으로 사라진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미영의 에피소드에도 있다. 할머니가 된 미영이 옆에 앉은 창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장면이다. 꿈과 현실, 생과 사 등 경계의 양쪽에 있는 인물들이 여인과 아이처럼 손을 잡는 것 같다. 우리는 죽는다. 상심의 시간이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하지만 그 시간은 달팽이마냥 느리다. 그렇게 시간은 기억처럼 유연하다. 유연한 시간과 손을 잡는다면 우리는 삶에 더 관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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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