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하루] 내리사랑과 치사랑 – 김진경
아빠의 얼굴이 좋지 않다. 미간에 세로 주름을 길게 만든 것으로 미루어 뭔가 못마땅한 게 있어 뵌다.
글ㆍ사진 김진경(나도, 에세이스트)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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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가 진행하는 글쓰기 공모전 ‘나도, 에세이스트’ 대상 수상자들이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에세이스트의 일상에서 발견한 빛나는 문장을 따라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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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얼굴이 좋지 않다. 미간에 세로 주름을 길게 만든 것으로 미루어 뭔가 못마땅한 게 있어 뵌다. 가족들은 아빠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최대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 애쓴다. 아빠는 미간의 주름을 유지한 채 리모컨이 어디로 사라졌느냐, 집에 먹을 거 많은데 치킨은 왜 시키느냐, 잔소리를 한다. 기분이 안 좋으면 안방에 들어가서 혼자 삭이면 좋겠건만 그러진 않는다. 굳이 식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거실과 주방, 작은방을 부지런히 오가며 언짢은 티를 낸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아빠가 저러는 이유를 알고 있다. 우리 집은 딸만 넷인데 그 딸들이 모두 결혼해 일곱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아빠에게는 일곱 명의 손주가 생긴 것이다. 이십 대 중반이 된 1호부터 이제 세 살인 7호까지. 그런데 이번 가족 모임에 그중 세 명이 안 왔다. 스무 살이 넘은 조카 1, 2, 3호이다. 스물이 넘어가면서 약속이나 한 듯이 이들이 가족 모임에 참여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손주들이 모두 올 거라고 생각했던 아빠는 저조한 출석률에 충격을 받았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학교도 가야 해서 못 왔다며 이십 대의 공사다망함을 설명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는 눈치다. 요놈들이 할아버지 생각은 하나도 안 한다며 성을 냈다. 이때부터 아빠 미간에 주름이 장착되었다. 괜히 집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트집을 잡는다. 한참을 그러더니 이쯤 했으면 됐다 싶은지 안방으로 들어갔다. 다정한 둘째 언니가 안방으로 가서 말동무가 되어 준다. 기분이 풀렸는지 간간이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십여 년 전, 중학교 졸업식 날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축하 꽃다발을 들고 왔다. 사촌오빠였다. 다른 지역에서 회사를 다니던 오빠는 연차까지 내고 멀리서 와줬다. 당연히 와야지, 하고 이야기하는 사촌오빠가 고마우면서도 ‘굳이 안 와도 되는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고향집을 떠나 기숙사에 들어갔다. 밤새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치며 비가 왔다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푹 잤다. 간밤 내 걱정에 한숨도 못 잤다는 부모님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비가 온 사실을 알았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잤다는 내 말에 엄마는 그럼 다행이라며 껄껄 웃었다. 

조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친구의 괴롭힘으로 힘든 시기를 보낸 적이 있다. 소식을 들은 아빠는 다음 날 새벽 서울 큰언니 집으로 향했다. 아침 6시 반에 누가 집 초인종을 눌러서 깜짝 놀랐다는 언니는 그 사람이 아빠여서 더 놀랐다고 한다. 깜깜한 고속도로를 두 시간여 달려온 아빠는 조카에게 휴대폰을 사주며 친구가 괴롭히면 할아버지에게 전화하라는 말을 남기고 내려갔다. 휴대폰이 생겨 기쁜 조카는 할아버지 최고라며 노래를 불렀다.

어릴 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들이 조카와 자식이 태어난 뒤에야 온전히 이해됐다. 연차를 쓰고 멀리 졸업식에 와준 사촌오빠의 마음을, 처음으로 집을 떠나 생활하는 막내딸이 천둥 번개 소리에 잠 못 들까 걱정한 부모의 마음을, 새벽내 속을 끓이다가 해가 뜨기도 전에 서울로 출발한 그 마음을. 이래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 형부들과 신나게 이야기하는데 안방에서 아빠가 나왔다. 큰언니가 조카 2호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아빠는 언니가 전화를 끊을까 봐 손을 펄럭이며 다가와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할아버지가 너 주려고 닭발 사다 놨는데 왜 안 왔니?” 

꾹꾹 눌렀던 섭섭함이 체면 불구하고 터져 나온다. 내친김에 오늘 안 온 다른 조카들에게도 언니를 시켜 전화를 건다. 첫마디는 ‘할아버지가 너 주려고’로 모두 똑같다. 저조한 출석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아빠가 낸 묘안은 손주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놓는 것이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조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닭발 싸줄 테니 집에서 먹고 다음에는 꼭 와라, 하는 말로 통화가 마무리된다. 다음 날, 집으로 가는 언니 손에는 꽁꽁 얼린 닭발과 조카에게 보내는 아빠의 용돈이 들려 있다. 



*김진경 

진압할 진(鎭), 서울 경(京). 서울을 진압하진 못했지만 진출에는 성공한 지방 사람. 5년간 출판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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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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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물

2021.06.16

실컷 본문 줄줄 잘 읽고 내려와서 작가님 소개 진압할 진 서울 경 보고 띠용 하고 앞에 다 까먹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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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k10230

2021.06.15

사실 가족이라는 것이 서운한 일이 있다가도 금방 사소한 계기로 다시 뭉치는 법인데 그 화해의 타이밍을 도통 맞추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뭐 저도 그렇습니다만은 이 에세이처럼 그 방법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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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팟

2021.06.15

자식보다 더 예쁜 게 손주들이라고들 많이 말씀하시더라구요. 우리집도 손녀가 생기고 나니 부모님 얼굴이 활짝 피셨어요. 저렇게 좋으실까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행복해 하셔서 저까지 뵐 때마다 가슴뭉클해요. 없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큰 사랑도 존재하는구나를 실감 중이네요: ) 부모님의 내리사랑...저도 또 이렇게 부모가 되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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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경(나도, 에세이스트)

진압할 진(鎭), 서울 경(京). 서울을 진압하진 못했지만 진출에는 성공한 지방 사람. 5년간 출판편집자로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