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은 질문을 잘 안 해. 왜들 그렇게 소극적인지 원……”
내가 다니던 대학의 한 교수는 유독 ‘요즘 애들’로 시작하는 말을 자주 뱉었다. “너네는 자기 주관도 없고 생각들이 없어.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 목숨 걸고 시위도 하고 말이야.” 우리는 그를 돌 교수로 불렀다. 돌 교수는 수업 시간에 질문하는 학생이 있으면 눈을 흘기며 책이나 읽으라고 핀잔했다. 그의 말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제기하면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고 면박을 주었다. 자신의 학생운동 경력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던 돌 교수가 4대강 사업에 찬성한다고 당당하게 말했을 때, 나는 반대한다고 말했다가 단칼에 입이 막혔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돌 교수는 요즘 애들이 주관 없다고 툴툴댔지만, 그들이 주관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처음 대학원 면접을 보던 날, 돌 교수는 내 이력서를 보고 다짜고짜 물었다. “고등학교 자퇴했네? 사고 쳐서 그만뒀지?” 나는 질문인지 비난인지 헷갈리는 말 앞에서 얼어버렸고, 대답하라는 눈짓을 보고서야 이게 질문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사고 친 건 아니고, 당시에 학교 밖에서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어요.” 그날의 면접은 내 삶을 해명하는 자리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그 자리에서 울지 않고, 잘못 살아서 죄송하다고 말하지 않은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몇 년 후, 나는 근거 없이 비난을 쏟아내는 이름 모르는 중년의 남성에게 무대에서 고개 숙여 사과해버리고 말았으니까. 춘천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인문학 카페 36.5°를 운영하던 20대 초반, 지역에서 투자 발표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단체의 대표들이 사업을 소개하면, 1등을 뽑아서 소정의 상금을 주는 자리였다. 나는 한 달 내내 피피티를 만들고 대본을 쓰며, 인문학 카페가 지역사회에 필요한 이유를 꼼꼼하게 정리했다. 준비한 만큼 발표는 무사히 마쳤다. 질의응답 시간, 한 남성이 손을 들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그 사업이 왜 필요하다는 거죠? 청년들에게 인문학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죠? 정량적으로 이야기를 해야죠.” 지금이라면, 이미 앞에서 소개한 내용이라고 말하며 여유롭게 설명할 것 같은데. 스물네 살의 나는 모두가 지켜보는 무대에서 날 선 목소리가 날아오는 그 순간이 공포로 다가왔다. 머리가 새하얗게 번진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몇 분의 정적이 흐른 뒤, 겨우 입을 뗐다. “죄송합니다.” 지금도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왜 그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놀랄 때 반사적으로 “엄마야!”라고 외치는 것처럼, 나에게 입에 붙은 말 중에는 “죄송합니다”가 있다. 부모님이 무서운 표정을 지을 때,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불려갈 때, 편의점과 호프집, 식당 등 각종 아르바이트할 때, 학교 비정규직 행정직으로 일할 때에도 나는 항상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마 많은 ‘요즘 애들’이 비슷한 위치에서 죄송하다고 말하는 일에 익숙해져왔을 거다. 자기 생각을 조목조목 표현하고, 표현하기 위해 논리를 다듬을 기회보다는 고개 숙이고 말을 삼키는 일에 더 익숙해졌을 거다.
안 본 지 10년도 더 지난 돌 교수의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다. 쭈뼛대지 말고 당당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라고 독촉하는 ‘어른’의 설교를 들을 때, 선거철마다 2~30대가 생각이 없어서 문제라며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 그런 순간마다 나는 돌 교수의 얼굴을 한 모두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말하는 ‘요즘 애들’에게 자기 의견이 동등한 발언으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얼마나 있었나요? 당신은 ‘애들’을 동등하게 대하나요? 다른 말을 하면, 당신 권위를 위협하는 거라고 믿진 않나요?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 비슷한 문제의식이 나온다. 작가는 집을 공사할 때 현장 인부에게 요구 사항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려워한다. 작가의 아빠는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느냐며 딸을 답답해한다. 그런 아빠를 보면서 작가는 생각한다.
“아빠는 내가 사람들을 ‘당당하게’ 대하지 못한다고 답답해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당당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성향보다 지위의 문제였다. 사업에 실패하기 전까지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며 살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거나 계약직이었던 20대에도, 대필 작가나 외주 교정자였던 30대에도 갑보다는 을의 위치에, 때로는 병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나는 ‘당당하게’ 지시하고 요구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159쪽)
만약 내가 여러 얼굴을 한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면, 내 질문과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거나 내 생각이 너무 멍청하게 여겨지면 어떡할지 걱정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까? 누군가를 답답하게 만드는 말 못 하는 ‘요즘 애들’은 어떤 경험을 통과하며 만들어졌나? 그러니까 철 지난 ‘요즘 애들’ 타령은 그만하고, 그들을 마주하는 자신이 주로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어떤 말을 자주 듣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들이 정말 가슴속 말을 꺼낸다면, 당신은 놀라서 그대로 주저앉아버릴지도 모른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홍승은(작가)
페미니즘 에세이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글쓰기 에세이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등을 썼다. 함께 해방될 수 없다면 내 자유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