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의 배경이 되는 근미래의 일본은 혐오의 광풍에 휩싸여 있다. 첫 여성 ‘혐한’ 총리가 탄생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생활보호지급이 중지되며, 헤이트 스피치와 증오범죄가 증가한다. 그곳에 다섯 명의 재일 한국인 청년들이 있다. 가시와기 다이치, 박이화, 양선명, 윤신, 그리고 김태수. 저마다 다른 모습과 사상과 동기를 가진 이들을 한 데 묶는 힘은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다. 그들은 극우보수정당에 소속된 청년 기지마 나리토시와 만나 혐오로 물든 사회에 반격을 가하려 한다.
이용덕 작가는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3세다. ‘언젠가 재일 한국인을 중심 테마로 삼은 소설을 쓰고 싶었고, 써야만 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는 그의 네 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이다. 소설의 제목은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1923년의 그 공간에 소설의 배경을 겹쳐보면, 슬프게도 닮은꼴이다. 독자들은 그 모습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혐한’, ‘혐일’의 좁은 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찾아 번져나가는 혐오의 양상을 보여주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질문한다.
소설가 이용덕은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로 ‘제51회 문예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보답받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히 보답받지 못한다』로 ‘제38회 노마문예신인상’ 후보에 올랐고, 저서로 『사랑하는 것, 이해하는 것, 사랑받는 것』이 있다. 첫 장편소설 『당신이 나를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 전에』로 ‘제42회 노마문예신인상’을 수상했다.
*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시대가 쓰게 만든 소설
이 소설은 “시대가 쓰게 만들었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요. 재일 한국인 3세로서 ‘언젠가 재일 한국인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네, ‘재일 한국인’을 중심 테마로 삼은 소설은 언젠가 쓰고 싶고, 써야만 하리라는 생각은 늘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쓰게 된 이상 이 한 권에 거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출간된 작품입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테마를 다룬 소설인 만큼, 한국 독자들에게 전작을 선보이셨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셨을 것 같습니다. 기대하신 반응이나 우려하신 부분이 있었나요?
가장 우려했던 반응은, 이 소설의 한국어판을 출판함으로써 ‘역시 일본 사회는 이상할 정도로 차별주의적이다’라는 의견이나 일본인 전체에 대한 혐오가 증폭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스타그램 등 인터넷상에 올라오는 리뷰 중에는 한국 국내에도 존재하는 소수파 차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종종 보여서, 그 점은 제 기우였구나, 하고 안심함과 동시에, 앞서 말한 한국 독자에 대한 우려가 오히려 제 얕은 편견이었음을 깊이 반성하기도 했습니다.
“소수파이기 때문에 무심코 싸잡아 생각하기 쉬운 우리 재일 한국인을, 같은 생활권에서 살아가는 개별 존재로서의 저마다의 모습과 저마다의 사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도 이 작품을 쓴 동기 중 하나”라고 쓰셨습니다. 각각의 인물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무엇보다 여러 명의 인물을, 저마다의 뚜렷한 인생을 그리고자 의식했습니다. 아무래도 다수파에게는 재일 한국인이 ‘수상한 소수파 집단’이라는 인식이 있다 보니, 그 부분을 타파하고 싶었습니다.
작가님이 재일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품었던 의문이나 고민 같은 것도 등장인물에 투영되었나요?
가시와기 다이치에게는 제 합리주의에 치우치려는 측면을, 양선명에게는 제 염세관과 전방위적으로 싸움을 걸고 싶어 하는 기질과 ‘비뚤어진’ 성격을, 박이화에게는 신념의 흔들림과 작가를 지망하던 반생을, 김태수에게는 정치의식과 젠더의식이 옅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을, 구장호에게는 몇 년이나 공부를 하면서도 지금까지 한국어를 습득하지 못한 어학력 부족에 대한 한심함을, 이렇게 하나하나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만큼 각 등장인물에게 투영했습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한 감정, 내셔널리즘 일반에 대한 평가, 일본으로 귀화할지 여부에 대한 고민, 우리들 소수파를 압박하려고 하는 시대에 대한 대처법(정면에서 싸워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다른 소수파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방치되고 있는 전 세계의 부정에 어디까지 관여해야 할지 그 경계선에 대해, 집단과 개인 중 어느 쪽의 이익을 우선해야 할지 등등... 그러한 갈등도, 저 개인뿐만 아니라 다른 재일 한국인에게서 예전에 들었던 의견도 포함시키면서 버무려 녹여낸 뒤 그걸 다시 분해해서 각 등장인물에게 투영시켰습니다.
‘귀국 사업’으로 한국을 찾은 박이화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논픽션 소설처럼” 블로그에 기록하기로 합니다. 그는 “문화나 예술에는 이름 없는 목소리들이 몇억 몇조 모여서, 세계를 좋은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그런 힘이 있어” “우리 작은 존재들의 작은 역사를 남기기 위해서는 그걸 기록할 역사가가 필요해”라고 말하는데요. 작가님께서 이번 소설을 쓰신 이유나 목적과도 닿아 있는 지점이 있을까요?
아주 많습니다. 저는 37세에 겨우 데뷔한 늦깎이 소설가입니다. 그때까지 쌓이고 쌓였던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고민, ‘이대로 데뷔도 못할 것 같고, 그 누구의 눈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이렇게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괴로운 의문, 그에 대해 ‘아니, 글은 그저 쓰는 것만으로도 지구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가치가 있다’라는 신앙에 가까운 도달점, 그것들을 이화의 입을 통해 마음껏 펼쳤습니다.
한편 저는 작가로 데뷔할 수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한국어판까지 출판하게 되었다는 너무나 행복한 현실과, 그에 따르는 커다란 책임이 있습니다. 고작 책 한 권으로는 배외주의와 강권주의가 날로 더해가는 이 세계의 잔혹함에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지만, 지금의 저는 이 작은 저항의 과정을 소설이라는 형태로 역사에 남길 수가 있습니다. 소설가로서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계의 빛과 어둠
이 소설은 정치운동-미디어-대중(여론)이 서로를 이용하고 서로에게 영향 받으면서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오랫동안 갖고 계셨나요?
그렇습니다. 정치운동도 미디어도, 혹은 여론의 물결도, 때때로 눈부신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는가 하면 그 연동이 손쓸 수 없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굳이 나치스 독일이나 르완다 분쟁 같은 쉬운 예를 들 것도 없이,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어디서든, 그러한 일은 과거에 일어났을 겁니다. 그렇다고 정치운동이나 미디어를 과도하게 백안시하는 것 역시 현대에 흔히 등장하는 음모론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역시 과거와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나면 절망이나 염세에 빠지기 쉬운데요. 거기에만 빠져 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님은 무엇에서 희망이나 가능성을 발견하세요?
작중에도 썼습니다만, 그럼에도 일부 국가에서 여성참정권이나 신분해방을 얻어낸 역사적 성과가 있습니다. 기본적 인권, 삼권분립, 표현의 자유, 보통선거법, 이러한 개념을 권리로서 쟁취한 민주국가가, 경위가 어떻든 간에 한국과 일본을 포함해서 몇몇 국가가 있습니다. 그 희망 쪽에도 저는 눈길을 주고 싶습니다, 아니,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서는 국가라는 틀과 상관없이, 이를테면 ‘국경 없는 의사회’라든가 ‘유니세프’, ‘유엔난민기구’처럼 국경을 뛰어넘어 분골쇄신하는 분들도 있고, 국내에서도(어느 나라든 간에) NGO 단체나 권력에 굴하지 않는 방송국, 또 단체 단위가 아닐지라도 의사, 교사, 소방관, 변호사, 경찰관, 혹은 늘 미소로 맞아주는 도시락집 아주머니, 아파트 관리인, 이렇게 소속이나 속성과 관계없이 훌륭한 희망의 예를 발견한 적은 없으신가요?
물론 이렇게 말하고서도 소설가로서의 저는 바로 직업병에 휩싸여, 겉으로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이면서 뒤로는 성희롱을 일삼던 남자라든가, 봉사활동에 열심이지만 사실은 차별주의자라든가, 악덕 변호사, 체벌 교사, 기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면을 무심코 상상해 버리는데요. 그래도 선행을 전부 뒤집어서 위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도 현실주의적이지 않은 태도가 아닐까요. 선악 이원론이 아니라, 이 세계에는 아름다운 빛이 반짝이는 분명한 순간도 있는가 하면 칠흑 같은 절망의 어둠도 펼쳐져 있습니다. 뭐, 세상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은 원래부터 절망 일색도 희망 일색도 아닌 모양입니다.
일본이라는 무대, 재일 한국인이라는 대상으로만 한정 짓지 않고 더 넓은 범위에서 혐오를 그려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테마를 다루는 소설을 쓰든 간에, 저는 늘 보편성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어느 나라나 지역의 사람이 읽어도, 혹은 100년 전의 사람이나 100년 후의 사람이 읽어도, 그곳에 문화 차이가 있어서 얼마간의 주석은 필요할지라도, 그럼에도 즐길 수 있는, 공통의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것이 제 강한 바람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한국의 독자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작중 인물인 박이화의 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기어 올라온 이 세상의 끝, 그 풍경은 분명 아름다워. 함께 믿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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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