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황정은)의 선택
필리프 들레름 저 / 고봉만 역 | 문학과지성사
『크루아상 사러 가는 아침』이 책 제목인데 첫 챕터의 내용이기도 해서, 제가 이 책을 받아 들고 ‘이거는 사람을 홀리려고 작정한 책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에는 일상에서 만나는 소소한 사물들 혹은 공간들을 소재로 한 34개의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데요. 첫 챕터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바깥으로 나갑니다. 새벽이고요. 숨을 쉬면 입김이 나올 정도로 공기가 차고 가스등이 켜진 어두운 거리를 화자가 걸어서 빵집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잠든 시각에 새벽부터 빵을 만드느라고 창에 따뜻한 김이 서려 있는 빵집으로 들어가서 크루아상 다섯 개랑 바게트를 하나 주세요, 라고 말하고 빵집 주인과 인사를 건네받고 빵을 받고 크루아상을 담은 봉투를 껴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죠. 근데 빵이 따뜻하니까 크루아상을 하나씩 꺼내서 다 먹어치우는 거죠. (웃음) 필리프 들레름은 이 짧은 산책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을 붙입니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어쩌나. 당신은 이미 하루 중 가장 좋은 부분을 먹어버렸으니.” 저는 이런 산문을 봐서 너무 좋았고요. 각각의 이야기가 짧고 또 한편으로는 느슨하지만, 맛과 색과 감촉과 공기를 내가 겪은 것처럼 경험할 수 있는 산문들입니다.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천천히 일상을 산보하는 느낌의 책을 오랜만에 읽고 싶었고, 두 번째는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다루는 책을 읽는 게 지금 너무 어렵다면 그 책을 잠시 떠나도 괜찮다, 세상에는 다양한 책이 있고 이런 식으로 감각을 되살리고 깨우는 책도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실은 제가 얼마 전에 독자들을 만날 일이 있었는데요. 그 자리에서 받은 질문 중에 ‘아픈 이야기를 읽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런 질문이 있었어요. 그 질문에 ‘저도 어렵습니다’라고 대답을 했거든요. 다만 저는 읽기 자체가 좋아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 나를 상처 입힐 때 그냥 상처를 받고 만다고 대답을 했어요. 저는 책을 읽을 때 어떤 형태로든 나한테 상처를 남기는 책을 결국은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냥 아무것도 안 건드리고 지나가는 책들도 분명히 있기는 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세상에 고통만을 기록하는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더라고요. 고통을 기록하는 책들은 그 고통과의 싸움을 기록하는 경우가 되게 많아요. 저는 그래서 그런 책들을 읽고 있고. 현실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내버려 두면 그냥 고통인데, 누군가 의지를 가지고 현실을 들여다보고 그걸 재해석하고 또 현실하고 어떻게든 상호작용을 하면서 글로 썼을 때 그 책을 통해서 저희가 그 고통이 왜 생겼는지를 일단은 볼 수가 있잖아요. 그 고통이 왜 발생했는지를 볼 수가 있고 또 의미도 생각할 수 있고 그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도 하면서 다음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독자로서 우리가 고통스러운 내용의 책을 읽을 때, 물론 상처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 고통을 말하려는 노력 자체에서 용기를 배우고 각각의 싸움을 목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책에 있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서 내가 오로지 고통만을 읽을 수 있다면 그건 지금 내 마음이 그 독서를 견디기 어렵다는 이야기인 것 같고요.
저는 현장에서는 그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못했습니다. 거의 침묵하다가 시간을 다 보냈는데, 그때 대답을 잘 못한 게 되게 마음에 걸렸나 봐요. 그래서 ‘그런 상황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어떤 책이 있을까’를 모색을 하다가 이 책을 만난 거죠. 그럴 땐 이런 책을 읽읍시다, 하고 제안도 하고 싶었고 저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좀 숨을 돌리듯이 읽을 수 있었고요. 이렇게 소소하게 기억과 감각을 일깨우는 산문을 읽어보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아서 오늘 이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단호박의 선택
사치 코울 저 / 작은미미, 박원희 역 | 문학과지성사
표지에 원제가 적혀 있는데 ‘One Day We'll All Be Dead and None of This Will Matter’예요. 이 문장에서 ‘We'll All Be Dead and None of’를 다 빼니까 ‘One Day This Will Matter’가 남더라고요. ‘어느 날 이것은 의미가 있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 되는데, 이 책의 주제가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어차피 우린 죽고 있다는 거 다 의미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날 언젠가 이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닐까 싶어요. 저자는 사치 코울이라는 여성이고요. 1991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인도에서 결혼한 다음에 캐나다로 이민 온, (저자는) 인도 캐나다인 2세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은 캐나다를 벗어나서 뉴욕에서 기자와 작가로 활동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트위터를 열심히 하는 트위터리안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작은미미 씨와 박원희 씨가 같이 번역했습니다. 작은미미 씨는 4년간 인도에서 생활한 적이 있대요. 인도를 한국 사람들한테 소개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소개할까 하다가 이 책이 아주 동시대적이고 인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좋겠다 싶어서 같이 친구와 번역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도계 이민자 여성이 지금 뉴욕에서 살았을 때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냐가 되게 잘 그려져 있는데요. 이 책에서 제가 백미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인도의 결혼식을 묘사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치 코울 저자가 좀 시니컬하게 농담을 계속하는 측면이 있거든요. 그래서 인도 결혼식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 엄청 욕하고 있습니다. 인도 결혼식에 참석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인도 결혼식이 너무 이국적이고 색감이 가득하고 화려한 장신구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웃으면서 몇날 며칠 즐겁게 파티를 벌이는 게 너무 좋다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참석하면 개인적인 시간과 자주성을 침해당하는 7일 동안 여러 벌의 옷을 갈아치우면서 가족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되는 죽음의 주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유종의 미로서 신부가 어마무시한 장신구를 차고 나와야 하는데 몇 시간째 비명을 지르면서 장신구를 찹니다. 그래서 사치가 녹초가 된 신부 앞에서 말하는 거죠. ‘있잖아, 좋은 소식이 있어. 어차피 우린 죽고 이딴 거 다 의미 없어진다는 거지.’ 책의 제목이 여기서 나오게 됩니다.
저자가 책 후반쯤에 자기의 뿌리가 있는 인도에 대해서 묘사를 하는데요. 이 부분이 책의 중심을 잡아준다고 생각해서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인도의 이미지는 보통 딱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 번째,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하나하나가 너무 아름다운 인도. 엉덩이 큰 여자들과 흙먼지 가득 날리는 길에서 맨발로 축구하는 남자애들이 사는 나라. 길거리를 배회하는 코끼리와 그저 보기 좋은 인도 사원이 있는 나라. 두 번째, 어색하게 요동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인도. 유행처럼 번진 강간에 고통 받고 페미니즘 운동과 의료 시스템에 있어 한없이 무능한 나라. 노상 방뇨와 노상 방똥이 행해지고 카스트 제도가 전 세대를 망쳐놓은 나라. 세상의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중간 지점 어딘가에 진실이 있다. 어떤 곳이든 아름답고 완벽하면서도 훼손되어 있고 위험하다.”
이 부분을 보고 작은미미 님과 박원희 님이 왜 이 책을 번역하고 싶었는지 딱 알 것 같았어요. 현대의 인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작가가 사치 코울 작가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냥의 선택
최양선 저 | 사계절
‘본격 부동산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입니다. 주인공 ‘오영선’이 통장을 하나 발견하는 걸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일단 시대적 배경이 2017년이에요. 그리고 6개월 전에 오영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우연히 장롱 안에서 어머니의 청약 통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무려 16년 된 청약 통장이에요. 청약 제도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대박. 16년 된 통장이 갑자기 나타났어!’라고 되게 좋아할 텐데, 오영선은 그런 거에 대해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해요. 다만 통장에 있는 300만 원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갑니다. 은행 직원이 ‘높은 가점을 받을 수 있으니 승계를 받지 그러느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때 처음 청약, 내 집 마련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돼요. 참고로 오영선은 스물아홉 살 여성이고, 2개월 전부터 작은 회사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9급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영선은 내 집 마련에 대한 꿈이 별로 없어요. ‘꼭 집을 가져야 되나? 전세 살면서 2년마다 마음에 드는 집 찾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집주인이 찾아와요. ‘내년에 우리 아들이 결혼하는데 이 집을 고쳐가지고 신혼집으로 쓰려고 해서, 미안한데 좀 나가줘야겠네’ 이렇게 말하는 거죠. 남은 시간은 4개월 정도예요. 그래서 여동생과 같이 새로운 집을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직장 동료인 ‘주 대리’와 접점이 생기게 돼요. 주 대리와 영선은 친하지 않은 관계였어요. 둘 다 회사 내에서 관계를 맺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주 대리가 영선에게 ‘회사 근처에 있는 모델하우스 구경 갈 건데 같이 갈래요?’라고 말하게 되고, 같이 가게 되면서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알고 보니까 주 대리는 청약, 내 집 마련에 관심이 엄청 많은 거예요. 그러면서 ‘아파트는 사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투자 상품이기도 하다’라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그때 영선은 불편함을 느껴요. 특히나 지금 시점에 영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냐면, 이사 나가야 하는 전셋집에서 돌아가신 어머니하고 두 자매가 9년을 살았는데, 엄마의 부재를 경험한 후에 그 집을 떠나기가 너무 싫은 거예요. 그런데 주 대리가 ‘집은 상품’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멸시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집이라는 것이 단지 물질만은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소설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해요.
(소설에 등장하는) 영선과 주 대리와 ‘휴 씨’라는 세 명의 여성이 부동산에 대해서 다른 경험과 다른 지향점과 다른 시각을 갖고 있어요. 현재 처한 상황도 다르고 소망도 다르고요. 그런 부분들을 굉장히 세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설이었어요. 장강명 소설가가 추천서에서 “얼마 전부터 집값,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집값의 변화라고 하는 시간적 요인이 우리의 삶의 공간적 요소들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 같다. 미래 부동산 가격을 고려하지 않고 삶을 설계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썼는데요. 영선은 89년생이에요. 지금의 청년 세대가 집값 문제 때문에 무엇을 포기하거나 괴로워하는지, 왜 이들에게 집이 그렇게 필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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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