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들은 휴가를 집단적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법원의 ‘휴정기’에 맞추어 로펌 변호사들도 하계 휴가, 동계 휴가를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이다. 보통 7월 말 또는 12월 말로 공지되는 각급 법원의 2주간 휴정기에는, 피고인이 구속되어 신속한 재판이 필요한 형사 사건을 제외하곤 민사, 행정, 가사 사건들의 변론 기일이 모두 미뤄진다.
변론 기일이란 법원에서 당사자나 변호사가 모여 어떤 주장을 하거나 증거를 제출하는 소송 행위를 하는 특정한 일자를 가리킨다. 기일이란 약칭으로 주로 불리는데, 법정에서 정해진 날짜에 출석을 하고 계획된 변론을 진행하다가 퇴정하기 직전, 판사가 원고(측 변호사), 피고(측 변호사)와 함께 다음 날짜를 협의하는 식으로 정해진다. 사건의 성격에 따라 2주부터 8주 사이로 기일이 정해지는데, 통상 4주 간격으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변호사들의 삶이란 4주 기일에 맞춰진, 한 달 살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송을 준비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 무언가를 하는 것이므로 참으로 한가할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로펌 변호사들이 20건에서 40건 넘는 사건을 한꺼번에 담당하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단순 계산으로도 20건의 소송만 갖고 있어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한 건의 변론 기일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사건 중에는 재판이 지연되거나 형사 사건처럼 수사 단계에서 종결되어 재판이 아예 열리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어쨌든 보유한 사건이 많을수록 변론 준비와 법정 출석을 해야 하는 변호사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4월 첫째 주 화요일에 진행된 재판은 5월 첫째 주 화요일에는 반드시 열려야 한다. 하나의 사건을 맡은 변호사는 4주에 한 번은 변론 준비를 위해 증거를 수집하고 주장을 정리하여 준비 서면을 작성한 후 법원에 제출해야만 한다. 하루에 하나의 서면을 매일같이 써야 하는 변호사는, 곧 자신이 서면 기계가 되어간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서면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서면을 읽고 그것을 공격하거나 방어해야만 하므로 두꺼운 소송 기록을 치밀하게 읽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 와중에 의뢰인의 전화나 방문에 따라 수시로 상담을 해야 하며, 당장 오늘 닥친 재판을 위해 법정에 출석해야 한다. 저 멀리 지방에서 재판이라도 있는 날엔 길에서 시간을 다 버리면서 하루를 보내기 십상이다. 그렇게 4주를 하루처럼 살다가 어느 날 받게 되는 법원 휴정 안내 메일은, 어렸을 때 산타 할아버지가 갑자기 던져주고 가는 선물 같다.
그렇기에 법조인들이란 7월 말과 12월 말을 한국에서 가장 간절하고 애처롭게 기다리는 자들이다. 어느 정도냐면, 매년 변호사 온라인 커뮤니티에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글 제목이 ‘올해 여름 법원 휴정기 언제부터인가요? ㅠㅠ’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휴정기에 변호사들은 무엇을 하는가? 단연코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 것 같다. 동남아, 유럽, 미국 등 여행지로서의 한국 밖 세계가 갖는 매력은 다른 여행자와 동일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 변호사들에게 해외여행이란 특히 ‘전화(메일)를 받(읽)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국내에 있으면 상사나 의뢰인의 전화를 수신 거부하기가 어색해진다. 그래서 휴정기 해외여행이란 나를 잠시 잊어달라는 무언의 요청이다.
한편 우리는 반드시 휴정기가 끝나기 전에 돌아와야만 하는 의무를 갖는다. 보통 일주일의 여행을 다녀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불가능하며, 나의 잊힘을 요구할 수 있는 기간도 휴정기에 맞춘 며칠에 불과하다. 변호사는 온전히 변호사로서 여행을 하다가 얌전히 돌아와 다시 서면을 쓰고 법원에 출석해야 한다.
“승아가 스타벅스에 갔었다고 하자 민영은 미국 애들이 일껏 해외에 나가서 맥도날드 찾는 거랑 비슷하다고 말했다. 미국 애들은 미국 밖으로 나가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고 책도 미국 저자의 책만 읽는다는 말과 함께. 그러고는 근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말하자면, 해외여행이란 이번 생에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은 얼마쯤 단념한 이들이 잠시나마 ‘도망’을 맛보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변호사든 아니든 모두가 마찬가지다. 사실 지금 여기의 인생에서 완전히 도망치는 것이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만큼 일주일 후에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일이고. 그래서 기껏 도망간 척했던 해외여행지에서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잠시 되어볼 수 있는 용기를 내어보지 못하고, 겨우 스타벅스나 찾아가는 거겠지.
은희경의 연작 소설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행자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한국에 얽매여 있는 환경과 조건, 그 안의 자신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해 뉴욕을 찾는다.
승아는 2년 계약직을 마치고 정규직 채용이 되지 않을 게 뻔한 회사로부터 도망친다(「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수진은 소심함과 방어적인 수동성을 가진 자신에게 신물이 난 나머지 어학연수로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뉴욕에 왔다(「장미의 이름은 장미」). 한국에서 글이 써지지 않는 현주는 멋진 데뷔를 위한 글감을 찾기 위해 뉴욕 친구들을 찾는 중이다(「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이미 쉰 살의 중견 작가인 ‘나’는 이혼한 수진과 신혼여행으로 온 여행지를 이번엔 팔순이 넘은 노모와 함께 온다. 해외여행을 이제는 잘 하지 않는 어머니가 갑자기 동행을 요구한 것인데, 노모에겐 모종의 목적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피곤한 열정과 확신 없는 인내심을 감당할 만한 젊음은 그 시절에 다 소진”하였으며, “이제는 내 인생 전체가 별 볼 일 없는 쪽으로 거의 다 결론이 나 있었으며 그것은 힘들다거나 외롭다기보다 대체로 언짢고 피곤한 상태였다.”(「아가씨 유정도 하지」, 218쪽)
다소 논리적 비약을 하자면, 한국인 여행자들이 해외에 가서도 안전한 스타벅스를 찾는 것은 너무 짧은 여행 시간과 군중 심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야근과 숙취가 풀어지지 않은 상태로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왕복 이틀을 비행기에서 보내고 나면, 우리가 여행지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대엿새가량에 불과하다. 게다가 여행지에서 자신을 완전히 낯설게 느껴보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으려면 아무래도 혼자인 게 유리한데, 혼자 하는 여행은 여전히 낯설다.
“여행에서 가장 좋은 건 닥쳐온 의무와 그리고 일상적 절차에서조차 벗어난 ‘완벽하게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 그 시간에만 가질 수 있는 순진하고 온전한 감정과 그 감정을 보자기처럼 고스란히 감싸서 보존할 수 있는 고적함”**이야말로, 지금 우리들의 여행에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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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그만두는 법』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