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스타그램 계정은 두 개다. 하나는 사회적 자아인 아나운서 문지애의 계정으로 이틀에 한 번쯤은 업로드가 된다. 소소한 일상을 올리기도 하지만 주로 보기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걸 먹었을 때 혹은 새로운 일을 시작했을 때 소식을 남긴다. 재미 반 의무 반으로 운영하는 계정인데 이곳에는 ‘나 아직 여기 살아 있다.’고 세상에 알리는 프리랜서 방송인의 절박함도 없지 않아 스며 있다. 아무래도 사회적 자아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얼마간의 의도와 연출도 들어간다. 최대한 잘 나온 사진만을 고르고 실제보다 그럴듯하게 내 주변 일들을 포장하기도 한다. 궁극적으로 ‘저 잘 살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혼자 생각해본다.
다른 계정은 비공개로 운영한다. 여기에는 오직 아이와 남편, 그러니까 가족들 사진만이 존재한다. 아이가 떼쓰며 울고 있는 표정. 아빠와 목욕하는 사진. 품에 안고 자장가를 불러주는 순간. 처음으로 연필을 잡고 숫자를 적어 내려가는 모습 같은 것들이 몽땅 담겨 있다. 이곳에서는 꾸밈이 없다. 의상도 표정도 민망할 정도로 볼품이 없지만, 상관없다. 모든 사진에는 꼼꼼한 기록이 남겨진다. 오늘 네가 해준 말이 얼마나 예뻤고 감동이었는지 그리고 네가 있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빠짐없이 적는다. 이렇게 기록을 남긴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우리 아이의 성장 기록이 촘촘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눈에 담고 싶은 순간들만 모아놓아서 그런가? 다시 보면서 나는 자주 감격에 잠긴다. 큰 탈 없이 잘 자라준 아이에게 고맙고 육아의 고된 순간을 이겨낸 나와 남편이 대견하기도 하다.
SNS에 우리 가족의 사진을 남기는 이유는 하나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믿기지 않지만 2년 뒤면 우리 아이는 초등학생이 된다. 아이는 매일같이 학교에 갈 것이고 새롭게 친구를 만날 것이며 그 안에서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늘어갈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아이가 대견하고 자랑스럽겠지. 하지만 나의 전부를 차지하던 녀석이 떠나간 그 자리에서 나는 많이 허전하고 외로울 것이 분명하다. 혹은 이럴 수도 있겠다. 방황이 시작되는 사춘기가 되면 아이와 다툼이 잦아질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모든 행동이 촌스럽고 지겹게만 느껴질 것이고 그런 아이의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을 테다. 그러지 말자 하면서도 나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류의 진부한 멘트를 고스란히 내뱉으며 괘씸함과 외로움에 고민이 깊어질 것이다. 나도 내 부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도 나에게 그럴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사진첩을 열어 그때의 우리를 돌아볼 작정이다.
정진호 작가의 작품을 모두 소장할 만큼 좋아한다. 4년 만에 나온 작가의 신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마주했다. 하얀색 그림책 표지에는 ‘심장 소리’라는 제목과 함께 흡사 병원 수술실에서 접할 수 있는 심장 박동 그래프가 그려져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책에는 매일같이 달리는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땀을 흘리며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는 아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해 묵묵히 달린다. 여느 아이들처럼 공을 잡기 위해서도, 누가 더 빠른지 알아보기 위해서도, 체중 감량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아이는 무엇을 위해 달리는 것일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가슴에 손을 얹어요. 가만히 심장 소리를 들어요. 그리운 소리를 들어요. (정진호, 『심장 소리』)
아이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가슴 저 한구석에 자리 잡은 기억과 마주한다. 따뜻하고 포근했던 기억. 바로 엄마였다. 엄마 품안에서 함께 숨 쉬며 평화롭고 아늑했던 그때로 돌아가자 요동치던 심장 그래프가 비로소 일직선으로 변한다. 엄마 품안에서 평안했던 그때로 돌아간다. 그렇다. 아이는 엄마와의 기억을 만나기 위해 묵묵히 달려왔던 것이다. 달리기는 그리운 엄마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억 방식이자 치열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추억을 소환한다. 우리 엄마는 봄나물 두릅을 무치며 떠나간 남편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된장찌개와 두릅을 내어주면 싹싹 비워내던 남편의 기억이 봄나물로 인해 생생하게 살아나는 모양이다. 집밥만 고집했던 남편을 위해 매일 갓 지은 밥과 찌개를 만들며 살아온 세월. 수십 년 동안 한 계절 빠지지 않고 밥과 반찬을 만들었던 기억 속에 남편과의 추억이 자리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해본다.
그림책 『심장 소리』를 만난 뒤로 기억하고 싶은 찰나의 순간이 더 많아졌다. 그리고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저녁 설거지를 하는 남편의 뒷모습, 알아보기 힘들 만큼 엉망인 아들의 글씨, 아들의 쿰쿰한 땀 냄새, 점차 길이가 줄어드는 우리 아이의 색연필. 오늘도 나는 아무도 오지 않는 SNS 계정에 우리만의 추억을 저장한다. 이러한 기억과 기록이 우리의 고단한 삶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 되어주리라 믿기에 오늘도 나는 특별하지 않은 나의 그리고 우리의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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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애(작가, 방송인)
방송을 하고 글을 쓰며 애TV그림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