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의 K열 19번 : 코로나와 OTT의 시대에도 극장에 대한 사랑은 계속된다. 극장에서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즐거움과 시시함이 있다고 믿는다. 'K열 19번'은 우리가 언젠가 한 번 쯤은 앉아보았을 좌석이다. 극장 개봉 영화를 소개하는 지면에 딱 어울리는 제목 아닌가. |
새 학기, 교문 앞. 오빠와 헤어져 낯선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한 노라는 오빠 아벨에게 매달려 서럽게 운다. 아벨은 의연하게 노라를 달래며 말한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마.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보자.” 오빠가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아빠에게 매달려보지만, 등교를 피할 수는 없다. 노라는 별 수 없이 지도교사의 손을 잡고 학교로 들어간다. 노라가 학교 건물에 다가갈수록 좁은 공간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릴 때 들리는 소음이 스크린을 덮쳐온다. 그렇게 노라와 아벨, 두 남매에게 ‘세상(un monde)’이 열린다.
세상은 정글이다
오빠를 만날 생각으로 오매불망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자 노라는 운동장으로 나간다. 하지만 아벨은 교문에서 한 약속과 달리 노라를 반가워하지 않는다. 아벨보다 훨씬 덩치가 큰 ‘일진’들과 새로 전학 온 아이를 괴롭히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노라가 계속 옆에서 알짱거리자 일진들은 노라에게 겁을 주고, 아벨은 그걸 막으려다 일진들과 싸움이 붙는다. 교문에서 느꼈던 노라의 불안은 초등학교 운동장(playground, 플레이그라운드)이 품고 있는 ‘정글의 법칙’에 따라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해결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하루하루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노라는 친구도 사귀고 학교 교과과정도 곧잘 따라가게 된다. 마치 평형대 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지만 노력하고 반복하고 애쓰면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든 평형대 끝까지 갈 수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노라는 천천히 평형대 걷는 법도 배우고, 수영하는 법도 배우고, 운동화 끈을 묶는 법도 배운다. 오히려 문제는 아벨이었다. 때로 시간은 무언가를 망치고 악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개학 첫날 동생을 보호하려다 일진과 싸움이 붙은 이후로, 아벨은 쭉 학폭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플레이그라운드 위의 사냥감은 전학생이 아니라 아벨이다. 쉬는 시간마다 끔찍한 집단폭력에 시달리며 아벨은 점점 위축되어 간다. “어른들에게 이르면 죽여 버린다”는 아이들의 공갈에 두 남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노라는 고민 끝에 아빠에게 아벨의 상황을 알리지만, 지혜도 노하우도 없는 어른들의 잘못된 개입은 더 큰 재앙을 불러올 뿐이다.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운동장은 놀이와 괴롭힘의 경계가 희미해진 야만의 공간이다. 영화의 원제는 ‘un monde’, 즉 세상인데, 영화 속 운동장이 그야말로 세상인 셈이다. 이 세상은 하면 안 되는 것과 해야만 되는 것의 규칙으로 가득 차 있다. 문제는 정글의 법칙대로 사는 이들은 짜여진 사회적 규칙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응당 보호하고 지도해야 할 교사들은 폭력을 묵과한다. 교사들조차 우습게 보는 일진들을 통제할 힘이 교사들에게는 없다. (혹은 통제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우스워진 것일까?) 그러므로 규범은 오히려 묵묵히 그걸 따르는 자에 대한 이중 구속이 될 뿐이다. 약자는 무심한 규범 속에서 더 취약해진다.
이것은 또 한 편의 詩
영화의 후반부, 시간은 아벨에게도 약이 되었다. 아벨을 괴롭히는 것이 예전처럼 흥미롭지 않아진 아이들은 다시 새로운 먹잇감을 찾는다. 아벨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집단 괴롭힘에 합류한다. 애초에 아벨은 괴롭힘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괴롭히는 쪽이었다. 그 상태가 잠시 뒤집어졌던 건 노라 때문이었다. 용광로처럼 들끓었던 격정의 시간을 지나 영화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하지만 어떤 것도 예전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진 않는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폭력 속에서도, 어떤 존재는 자기 자신을 한 뼘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오빠가 당했던 폭력. 자신을 찔렀던 폭력. 그리고 이제는 오빠가 행하고 있는 폭력. 노라는 그 지옥의 굴레 속에서 혼란과 무기력,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런데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그 경험 속에서 놀랍게도 노라는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아낸다. 영화의 끝, 노라는 더 이상 머뭇거리며 물러서있지 않는다. 몸집이 작은 아이를 짓밟고 있는 오빠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라와 함께 영화는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을 펼쳐낸다.
마지막 장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놓겠다. 꼭 극장에서 확인하시길 바란다. 이 결말은 그저 영화 러닝타임의 끝일 뿐, 노라와 아벨의 시간을 계속 될 터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는 잘 모르겠다. 행복해질까?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는 안일한 기대가 고개를 쳐든다. 의미를 잘 규정하기 어려운 결말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이창동 감독의 <시>를 떠올렸다. 자신의 손자가 집단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걸 알았을 때, <시>의 주인공 미자는 손자의 구명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에 집중한다. 그리고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지고의 윤리가 바로 시의 마음이라고 영화 <시>는 말한다.
<플레이그라운드>는 폭력사건에서 피해자의 자리를 함께 경험했던 이가 고통의 시간이 끝난 이후에도 그 자리에서 쉬이 벗어나지 않는, 그 충실한 마음을 그리는 한 편의 시다. 영화의 시간은 온전히 노라의 시간이고,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노라와 함께 그 자리에서 ‘우리가 해야 할 바’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가해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배설물에 ‘시(詩)’라는 이름이 붙는 ‘시 모독의 시대’에 <플레이그라운드>는 시의 마음을 그리며 스스로 영화-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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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