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집 『글라스드 아이즈』로 독자를 만났던 이제재 시인이 네덜란드에서의 일상을 에세이로 전합니다. 새로운 장소에서 시인은 자신을 3인칭으로 바라보며 ‘내’가 변화하는 순간들을 관찰합니다. 짧은 소설처럼 흘러가는 이 에세이는 격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2022년 3월 4일
교차로에서 이제재의 자전거와 검은 승용차가 부딪쳤을 때 이제재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이 사고가 단편소설에서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과하게 상징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이어 할 틈도 없이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자전거에서 떨어져 한 바퀴 뒹군 그는 아스팔트 표면을 뺨으로 느끼다 누군가 내민 팔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고 몇 번의 괜찮냐는 질문이 여러 입을 오가는 것을 보았다. 차 주인은 자신의 과실이라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고 그는 차 주인 말을 따라 하듯 미안하다고, 나의 과실이었다고 중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차 주인은 명백한 자기의 과실이었다고 단호한 어투로 그의 말을 막았다. 우연치 않게 십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는 구급차가 한 대 대기하고 있었고 그는 곧 구급 대원을 따라 구급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뺨과 팔, 무릎에는 가벼운 찰과상이 남아 있었고 오른쪽 발목이 접질린 듯 아프긴 했지만 그것 역시 큰 상처가 아니었다. 그가 주황색의 복장을 한 구급대원에게 여권을 건네며 괜찮다고 더듬더듬 말하자 두 명의 구급대원은 그의 느린 말이 머리를 다친 탓인지 아니면 영어가 미숙한 탓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몇 분 뒤 경찰 앞에서 차 주인과 함께 진술을 마친 그는 자전거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생전 처음의 교통사고를 외국에서 서른 살의 생일에 겪은 거구나.
절뚝이는 오른발로 집 건물의 계단을 오르며 그는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짚어보려고 하고 있었다. 차체에 부딪힌 그의 발목은 그가 네덜란드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 접질렸던 바로 그 발이었다.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니 삼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과는 달리 한 시간 반이 흘러 있었다. 그는 침대 곁 블라인드 사이로 노을을 언뜻 보았다. 동쪽으로 향한 창문으로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 노을이지만 교차로 앞에서는 성당과 시청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지고 있을 것이었다. 전날 밤 그는 가족과 친구로부터 일곱 시간 앞서 생일을 축하받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눈만 뜬 채 밤사이의 꿈을 기억해 보려 하고 있었다. 그 꿈에서 그는 눈물을 많이 흘렸던 것 같았고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으며 무엇이 분명 일어났구나, 하고 느꼈다. 그의 눈은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반사 신경적으로 크게 떠져 있었다. 교통사고라는 단순한 이름 안에는 다 담길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라면, 이야기 속 주인공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건을 겪고 성격이 변했을 텐데 그에게 이것은 이야기가 아닌 삶이라서 그의 이해를 벗어나고 있었다.
2022년 3월 12일
도서관의 2층 화장실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제재는 휠체어를 탄 사람을 보았다. 길거리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휠체어였지만 도서관에서 본 것은 두 번째였다. 그 사람은 책에 깊이 빠져 있는 듯 보였고 곧 시선을 옮긴 이제재는 책장들 속에 빼곡히 꽂힌 책등의 문양을 구경하며 나아갔다. 언어가 언어로 보이지 않는 순간엔 이미지가 되었고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그의 도서관에 가득하다는 사실은 눈을 뜨고도 눈앞이 선명하지 않은 느낌을 그에게 주고 있었다. 손을 씻고 닦으며 그는 그가 지금 쓰려고 시도하고 있는 시를 생각했다. 운하에 대해서, 많은 물에 대해서, 물이 흐르는 지역의 높은 중력에 대해서, 그리고 높은 중력 때문에 느리게 흐르는 네덜란드의 시간에 대해서 그는 쓰고 싶었지만 아마 쓰다가 다른 시를 쓰게 될 것 같단 예감이 들었다. 다 낫지 않은 발로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그는 다시 휠체어를 지나쳤고 책장을 지나쳤다. 자리에 앉아 슬픔, 이라고 그가 메모장에 쓰자 깊은 우물 속에서 어떤 힘에 의해 슬픔이 스스로 떠올라 부유하는 이미지가 그려졌다.
무엇을 상실한 것일까.
상실한 것일까?
지난 열흘간 집에 자주 누워있으며 그가 느꼈던 것은 슬픔에 가까운 것인 것 같았다. 어쩌면 계절 냄새를 잘 맡곤 하는 그가 봄을 타는 것인지도 몰랐다. 가운데 공간이 뚫려 있어 2층에 앉아 0층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도서관의 자리에서 그는 그가 느끼는 것이 이곳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며 시 구절 비슷한 것을 쓰기 시작했다. 사면이 유리로 된 거대한 도서관. 사람이 사람의 거울이라면 가운데 공간을 빙 둘러 놓아진 자리마다 가득 찬 거울이 빛을 반사해낼 텐데. 그 거울은 수십 개의 성당과 긴 운하와 크기가 비슷비슷한 오래된 건물들과 집집마다의 정원들, 키 큰 나무들이 둘러싼 자전거전용도로들을 담아내며 계속해서 넓어지는 공간이 될 텐데. 그는 연상되는 이미지들을 받아 적어보며 이것이 시가 될 수 있을지, 그의 몸을 텅 빈 통로로 만들며 시가 시로 드러날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곧 펜을 놓았다. 지난 10년간의 쓰기가 첫 시집으로 완성된 뒤, 시를 시라고는 쓰고 있었지만 그가 보기에 그의 첫 시집에 빼곡히 차 있던 이야기는 사라지고 공간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가 공간을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 도서관에서 그가 닿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는 듯했고 해석되지 않는 경험들만 늘어나고 있었다.
읽을 수만 있다면 책들 사이로 도망칠 수도 있을 텐데.
어릴 적 유독 말이 없던 그가 처음 반마다 배치된 작은 책장에 손을 뻗었을 때처럼 그의 발은 차가워져 있었다. 스물이 넘어 기사를 읽다 선택적 함묵증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와 같이 12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이 증상을 앓는 아이도 드물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시점으로부터 말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12년간 그의 안에 쌓인 이야기가 10년간 풀려나갔다면, 그간 이야기들이 그의 여린 내부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준 것이라면 그는 그의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잠시 머물 도피처라는 사실도 그는 알 것 같았다. 때때로 도망은 도움이 될 때가 있었고 여전히 슬픔은 그 자리에 있었다.
2022년 4월 11일
그가 미선나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밤 10시 폐관 시간에 도서관을 나오면서였다. 한국말을 듣고 싶어서 그는 팟캐스트 앱을 켰고 ‘별이 빛나는 밤에’의 녹음본을 재생했다. 디제이가 오프닝으로 1997년 발견된 조경수로 나무를 소개한 뒤 이야기한 미선나무의 꽃말은 ‘모든 슬픔이 사라지길’이었다. 그는 그가 모든 슬픔이 다 사라지기만을 바라지는 않았음을 알았다. 밤인데도 초저녁처럼 밝은 푸른빛이 도는 날이었다. 곧 5월이 되면 9시가 지나서야 하늘이 붉어지는 시간이 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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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재(시인)
1993년 3월 4일생. 생년월일이 같은 아이를 두 번 만난 적 있다.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글라스드 아이즈』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