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은 중요하지요. 첫인상으로 갖게 된 예감들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일도 왕왕 있지만 그럴 때조차도 처음의 그 순간은 잘 잊히지 않으니까요. 책의 첫인상은 표지라고 하겠습니다만, 첫 문장 역시 전체 이야기에 대한 느낌을 좌우합니다. 책 한 권을 다 읽은 후에, 혹은 책을 읽는 동안 첫 문장의 탁월함에 감탄한 적 있지 않나요? 오늘은 올여름 출간된 책 몇 권의 첫 문장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한정현 저 | 현대문학
“그 여인을 그냥 두세요. 여자를 제발 내버려두세요.”
이 문장이 한정현 작가의 소설 『마고』의 시작입니다. 작품은 일제 이후 미군정이 시작된 한반도를 배경으로 해요. 유명 인사인 한 대학교수가 살해당하고, 세 명의 조선 여성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경찰은 범인이 미군이라는 것을 알지만, 세 사람 중 가장 그럴듯한 범인을 만들어내려고 하고, 가명으로 활동하는 여성 탐정은 비밀리에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지요. 혼돈의 시기에 활약하는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과 동시에, 지금도 여전한 사회적 문제와 한계들이 씁쓸한 기분을 남기기도 합니다. 소설의 내용을 알고 나면 곱씹을수록 긴장감이 느껴지는 첫 문장 아닌가요? 작가의 전작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를 읽은 분이라면 반가울 만한 요소들도 중간중간 있으니 함께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정재율 저 | 민음사
자는데 사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집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에 수록된 첫 번째 시 「물탱크」의 처음은 이렇습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척 무겁고 아프고 불안한데요. 문장 자체의 느낌은 단정하고 차분하고 고요합니다. 이 시집의 수록 시들을 보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과거 언젠가 얻었을 몸의 상처도 누군가의 죽음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 와 그것은 당시와는 또 다른 의미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빨간색으로 이름을 적지 않아도 누군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미약한 세계」 중에서), ‘저번 주에 들었던 멍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지요(「달리고 달려도 바뀌는 건 없고 여전히 날씨는 제멋대로입니다」 중에서). 그렇게 나의 슬픔과 손잡고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 할 수 있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해보게 됩니다.
정보라 저 | 아작
여기 어떤 높은 탑 속에 한 공주가 있다.
『여자들의 왕』은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새 소설집입니다. 이 책의 첫번째 수록작인 「높은 탑에 공주와」는 위의 문장으로 시작하고요. 정보라 작가가, ‘탑 속의 공주’의 존재를 밝히며 시작하는 소설이라니, 예사 공주는 아닐 거라는 감이 옵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무심결에 공유해온 모든 이야기는 뒤집어지고, 상상은 예측하지 않은 방향으로 흐릅니다.
작가는 ‘용도 사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사연이 있고, 공주도 사람이니까 평생 마냥 저렇게 연약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좀 뒤집어보고 싶었다.’고 말해요. 강한 이야기 속 더 강한 여성들을 지금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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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욱(도서 PD)
책을 읽고 고르고 사고 팝니다. 아직은 ‘역시’ 보다는 ‘정말?’을 많이 듣고 싶은데 이번 생에는 글렀습니다. 그것대로의 좋은 점을 찾으며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