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살쯤 되면 사는 게 익숙해지긴 한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막연함은 확실히 줄어들고, 겉보기에 그럴싸한 어른의 연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다. 나이는 먹었는데 뭐 하나 이뤄놓은 것도 없고, 일할 날은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뭐 먹고 살아야 할지 싶고, 남들 눈엔 아저씨, 아줌마지만 내 정신 연령은 그대로인 것 같다. 돈과 현실 사이, 꼰대와 청춘 사이, 비혼과 결혼 사이, 일과 육아 사이...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오늘도 외친다.
“사는 건 익숙해졌어도, 여전히 나는 모르겠다!”
『마흔의 문장들』은 이런 어중간한 마흔의 세계와 좋은 어른에 대한 고민을 진솔하게 풀어낸 책이다. 늦깎이 진화 심리학자로서 마흔의 다채로운 마음들을 위로하는 유지현 작가를 만났다.
『마흔의 문장들』이 어떤 책인지 소개 부탁드려요.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마흔'에 대한 책을 써보자고 제안을 받았어요. 그 순간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직 나도 마흔이란 나이가 주는 무게가 어색하기만 한데,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하는 거였죠. 주변 친구들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자신이 서툴고 부대끼고 불안하다고 느끼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마흔의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불안한 마음과 어른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다 풀어놓고, “너 혼자만 그런 거 아니야, 우리 다 그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시 힘내서 또 새롭게 시작하는 삶의 다음 단계를 무사히, 그리고 조금은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건너보자” 하고 말하고 싶었어요. 특히, 제가 공부하는 진화 심리학은 아주 오래전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어온 삶의 문제들을 고민하는 학문이니 이런 얘기를 하기도 딱이다 싶었고요.
전업주부로 사시다가 원래 전공과 무관한 진화 심리학을 뒤늦게 공부하신 거잖아요? 쉽지 않은 선택인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사실 제 전공은 진화 인류학이고요, 진화 심리학은 진화 인류학에서 마음과 행동의 진화를 연구하는 여러분과 학문 중에 한 분야랍니다. 제가 학부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했는데 사실 경제학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경제학은 진화 인류학이랑 통하는 구석이 많거든요. 둘 다 희소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최적의 효용을 얻을 수 있는가에 천착하는 학문이죠. 그래서 해외에서는 진화 인류학자와 행동 경제학자들이 협업하는 연구도 많고, 심지어 진화 인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연구자들도 꽤 있어요.
20대에 책과 컴퓨터 속 숫자들만 보고 있었을 때는 경영학, 경제학 연구들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런데 30대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삶의 경험들을 하고 보니 숫자보다 우리의 실제 삶, 마음, 행동 그 자체에 천착하는 진화 인류학에 더 마음이 가더라고요. 하지만 저도 처음부터 진화 인류학을 공부해야지 했던 건 아니에요. 일단 진화 인류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우리나라에는 너무 생소하잖아요? 그런데 두 아이를 키우면서 육아서로 시작한 독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그러다 루소의 『에밀』과 진화 인류학자 새라 블래퍼 허디의 『어머니의 탄생』까지 이어지게 됐어요. 덕분에 진화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처음 알게 됐고, 그때부터 뭔가에 홀린 듯 관련 자료를 찾다가 어찌저찌 이렇게 됐네요.
지금 마흔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의 마흔, 지금의 마흔, 앞으로의 마흔을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점들이 있을까요?
오늘날을 살아가는 마흔의 특징은 아마도 다양성이 아닐까 싶어요. 이전에는 마흔 하면 어느 정도 문화적인 스테레오 타입이 있었고, 문화적 규범대로 살다보면 대부분들은 이 스테레오 타입에 어느 정도 근접한 삶을 살 수 있었죠.
하지만 현대 사회의 마흔은 더 이상 스테레오 타입이 없어요. 오히려 삶의 양상이 달라지는 양상이 극대화되는 단계죠. 그리고 윗세대가 겪은 마흔의 삶과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에, 누군가 롤모델로 삼고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 확인하고 의지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책에 쓴 것처럼, 각기 다른 삶을 살면서도 우리가 고민하는 지점들은 여전히 보편적이고 공감되는 면이 많아요. 미래의 마흔은 지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로 그들이 겪는 불안과 고민의 본질은 지금과 서로 통하는 점이 많지 않을까 합니다.
친구분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이 종종 등장하는데요, 같은 마흔으로서 친구분들이 가장 공감된다고 꼽은 책 속 문장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나요?
제가 경험한 마흔의 삶만으로는 그 속에서 오늘날 마흔의 보편적인 고민을 끄집어내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친구들을 보며 도움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에는 여러모로 많이들 비슷했는데 지금 사는 모습들은 정말 하나같이 너무 달라서 신기할 정도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은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며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가 됐다”라든가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와 같은 문장에 가장 공감하더라고요. 아마도 수많은 다양성, 선택,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우연과 불확실성을 조금 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돼서 그런 게 아닐까 해요.
『마흔의 문장들』에서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진화하지 않았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행복과 진화 심리학에 대한 말씀을 좀 더 부탁드려요.
'행복' 또는 '기쁨'은 전 세계 어떤 문화권에서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기본 감정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기쁨을 느낀다는 점을 토대로 본다면, 기쁨이라는 감정이 진화사적 시간 동안 인간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어왔을 것이라고 역으로 추측할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진화는 더 행복한 개체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생존하고 번식한 개체를 남기는 방향으로 진행되거든요. 그러니 삶이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많은 연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요.
한마디로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행복하기는 불가능해요. 그러니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 행복하지 않을 때도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죠. 우리는 항상 행복할 순 없어요. 다만 항상 행복을 추구할 수는 있죠.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셨는데요, 작가님께서 생각하는 ‘멋진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공통 규범이나 상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고, 인정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모두 다른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더 서툴고 불안하죠. 인간 보편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 삶의 다양성,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서툴고 불안한 마음까지도 진심으로 공감하고 포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마흔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아직 삶이 서툴고 불안한 마흔 언저리의 누군가에게 이 책이 한 잔의 와인, 짭조름한 치즈, 달콤한 딸기 케이크 같은 위로와 응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지현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박사과정 연구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공인회계사(AICPA)를 취득했다. 현대건설 재정부를 거쳐 현재는 서울대학교 인류학대학원에 진학해 서울대학교 생물인류학 연구실에서 마음과 행동의 진화에 관해 연구 중이다. 「비협력자에 대한 처벌과 평판: 처벌의 비싼 신호 보내기 효과」라는, 인간 협력과 처벌의 공진화 과정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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