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천선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살아남은 소설가
'글을 쓸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요.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언제나 무언가가 떠오르면 바로 쓸 수 있는 상태요!
글ㆍ사진 기낙경
202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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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SF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설가 천선란.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했고,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노랜드』, 장편 소설 『천 개의 파랑』 등을 썼다.



"놀이터에는 10년 만에 와보는 것 같아요."

설레는 것인지, 어느덧 낯설어진 것에 대한 실례의 표현인지 가늠하지 못했지만 놀이터와 천선란 작가는 닮은 구석이 있다. 아이들보다는 길 잃은 어른들이 찾을 것 같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보다는 침잠한 등과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울리는 인적 드문 놀이터는 더욱이 그렇다. 하지만 그건 그가 놀이터의 황량함과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말이 아니다. 짐작하건대 천선란은 굳어버린 흙더미 위를 뒹구는 낙엽에 자신의 온기를 전할 줄 안다. 따가운 볕에 몸을 일으키는 이파리들과 인사를 나눌 것이다. 어떻게 놀아야 할지 도통 알 수 없는 잿빛 놀이기구에 눈 맞추며 능란하게 몸을 맡길 것만 같다. 모두 그의 소설에서 연대와 공존의 가능성을 봤기에 가능한 상상이다.

예스24에서 진행한 젊은 작가 투표에서 천선란의 이름을 클릭한 독자 수는 3만9000명이 넘었다.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수상한 『천 개의 파랑』을 읽은 독자일 수도, 장편 소설 『무너진 다리』『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나인』, 혹은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이나 『노랜드』를 읽은 독자들일 것이다. 아마 한 권만 읽은 독자보다 두 권 이상은 읽은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만큼 천선란의 소설은 많은 이들을 사로 잡았고, '천선란'이라는 세 글자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그처럼 '인간이 아닌 식물과 동물이 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꾸지는 않더라도 그 꿈에 기꺼운 응원을 보내는 독자들에게 작가는 밝게 화답했다.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투표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한번 신경 쓰면 자꾸 초조해질까 봐서요. 그래서 그런지 5위 안에 선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막상 현실감이 별로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조금 부끄러워서 외면하기도 했는데, 어쨌거나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봐 주실 분들이 많다는 거잖아요. 창작하는 사람에게 이만큼 힘이 되는 게 또 있을까요? '지금까지 적당히 잘해 왔으니 앞으로도 잘해 보아라'라는 격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야말로 푸르디푸른 '파랑'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천선란 작가는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드라마 각본 작업이 시작돼서 그렇다.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아직 일의 기준이 '재미'이기에 스트레스는 없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것과는 별개로 '신나 있는 상태'예요"라며 긍정 에너지를 보여준다. 얼마 전에는 예스24 북 토크 행사인 '젊은 작가와 함께하는 여름밤의 최근담'에도 참여했는데, 평소 좋아하는 공간인 영화관에서 진행된 행사라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다고 한다. 최근의 행복했던 기억을 물으니 "막막했던 일들을 차분히 끝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라고 답한 걸 보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차근차근 실행해 가는 재미에 빠진 것만 같다.

바쁘다고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는다. 글쓰기는 작업실과 집, 카페, 세 공간을 돌아다니며 이뤄지는데, 하루에 10~11시간 정도는 앉아서 일을 하는 편이다. 다른 원칙도 있다. 걸어서 1시간~1시간 30분 거리는 무조건 걸어 다니고 목적지보다 몇 정거장 전에 내려 일부러 걷는 것도 자주 하는 일이다. 그렇게라도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하루 열 시간을 꼬박 쓰는 건 아니고요. '글을 쓸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해요. 책을 읽거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언제나 무언가가 떠오르면 바로 쓸 수 있는 상태요!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글이 막히면 앉아서 골몰하지 않는다. 어쨌든 일어나 몸을 움직인다. 대체로 자전거를 타는데 2시간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가 기분이 조금 환기가 되면 슬슬 인물을 떠올리고 막혔던 부분에 접근한다. 애써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문제에 다가가는 것이다.

"뭐가 문제냐고 끊임없이 인물에게 물어보고 그렇게 답을 찾아요. 글이 막히는 것에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편이에요. 글은 막히는게 당연한 건데 하나하나에 다 신경 쓰면 어떻게 여러 소설을 쓸 수 있겠어요? 막힐 땐 '와! 포기!'하고 시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분을 전환해 버려요."



어느 인터뷰에서 『나인』 집필을 끝낸 작가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사람들을 관찰하는' 사람을 볼 때, '초록색 신호등이 깜빡이는데 뛰지 않고 걸음을 멈추는 사람'을 볼 때, '아이와 강아지에게 친절한 사람'을 볼 때 그들이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기술과 한 몸으로 살아가지 않고도, 자신만의 속도를 조절하면서도, 작고 약한 생명에 선의를 베풀면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그런 시선으로 보고 있는 작가 역시 '외계인'으로 비칠지 모르는 세상이지만 그런 눈으로나마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산책은 천천히 세계를 응시하게 만드는 작가의 즐거운 습관이다.

"산책을 정말 좋아해요. 식사를 한 후에는 무리 없는 한 산책을 하는 편이고, 밤 산책도 즐겨요.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기도 하는데 꼭 노래를 들어요. 노래를 들으며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 산책로가 있는 곳에서는 산책로를 걷는 편이지만 없더라도 개의치 않고 걸어요. 동네 곳곳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고, 가끔은 무작정 걷다가 영화관에 들어가서 아무 영화나 보고 나오기도 해요."



천선란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공 지능이나 식물들은 언제나 충실하게 존재한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냉정한 속내로 우글거리는 폐허라도 그렇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에 사는 방식이 친절하고 무해하다. 그 방식을 회복하는 힘이 '나대로 존재'하면 되는 일이니 크게 갈등하고 번민하지 않는다. "하고 있는 일을 재미있게 잘하고 있는가, 무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대충 하고 있지는 않은가 외에는 큰 고민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존재의 정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도 같다. 그래서일까. 그가 '네' 대신 '좋아요'라고 답할 때마다 반짝이는 '녹색 세포'들이 분명하게 보였다.



*천선란

1993년 인천에서 태어나 안양예고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꾼다. 작가적 상상력이 무엇인지에 대해 늘 고민했지만, 언제나 지구의 마지막을 생각했고 우주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꿈꿨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일들을 소설로 옮겨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시간 늘 상상하고, 늘 무언가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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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낙경

프리랜스 에디터. 결혼과 함께 귀농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해 빡세게 적응 중이다. 지은 책으로 <서른, 우리가 앉았던 의자들>, <시골은 좀 다를 것 같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