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원고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청소년 문학의 산실답게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나온 뒤 심윤경 작가에게 1318문고로 성장 소설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이 "나는 똑같은 건 안 써요"였던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심윤경 작가는 광화문 공사 현장에서 발굴한 조선 시대 유물에서 나온 듯한 아름다운 고어 투 편지가 인상적인 『달의 제단』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몇 년이 지나 그가 우리에게 내민 원고는 뜻밖에도 '동화'였다. 아이를 키우면서(이 아이가 '꿀짱아'!)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게 해주고 싶어서 썼다는 '은지와 호찬이' 시리즈는 지금까지도 출판사와 작가에게 든든한 응원이 되어주고 있다. 그래서 이번엔 할머니에 관한 에세이를 쓰고 있다 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흔히 소설가의 산문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만 품고 있었다.
심윤경이라는 아름다운 선물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는 작가가 말한 대로 할머니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냥 그분의 음성만 들릴 뿐이다. 오히려 생활인으로서 작가의 모습이 4D 화면으로 생생하게 나타나 당장 '언니!'를 외치게 만든다. 『사랑이 달리다』나 『화해하기 보고서』 등을 통해 익히 작가의 탁월한 유머 감각을 알고 있었지만, 원고를 읽으면서 혼자 얼마나 낄낄거렸는지 모른다. 갓난아이 꿀짱아를 나카무라 선수와 발차기를 시키며 세상에서 가장 열심인 모습으로 아침마다 생중계를 했을 그의 모습에 바닥을 구르며 웃었다.(목소리는 또 얼마나 아나운서 톤인가!) 심윤경 작가가 말하면 왠지 모든 것이 다 사실 같아 "내가 물로 보이냐(Do I look like a water)?"에 해당하는 영어 문장을 실제 찾아보기도 했다. 독자로서 가장 좋았던 건 그의 작품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가 『달의 제단』을 쓸 수 있었던 건 수험생 시절에 박경리의 『토지』 30권을 독파한 덕이 아닐까. 반항심 가득한 눈으로 전설의 대하소설에 탐닉한 경험이 소설가라는 직업에 이르게 한 결정적 순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어 좋았다. 『설이』를 읽으며 난데없이 터진 울음에 당황한 기억이 있는데, 왜 그랬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할머니. 심윤경 작가는 꿀짱아의 환장의 양육기 동안 "받은 사람이 받은 줄도 모르게"하는 할머니의 사랑법을 떠올렸고, 최선을 다해 실천했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진짜 좋은 책은 선물하고 싶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편집하며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실로 오랜만에 나의 할머니를 그리워했다.(나 역시 할머니와 한방에서 요강을 쓰고, '어멈'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거, 뭐 될 필요는 없다", "그게 비싼 건 줄 모르고 편하게 마구 쓰길 바랐다"하는 어르신들 모습에선 당연히 엄마 아빠가 생각났다. 책이 나오자마자 몇 권 사서 작가의 사인을 받은 다음 엄마네 집에 달려가 '여기 우리 엄마 아빠 있다'며 이 대목부터 읽게 했다. 이 책에 나오는 할머니가 당신 손주들이 생각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이라고 덧붙이며. 아이들한테도 이 책을 읽으면 지금 당장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될 거라며 서둘러 읽기를 권했다. 그리고 나의 아름다운 후배들. 성실하고 열심인데도 늘 자신을 부족하다 여기는 후배들에게 "장한 사람이여!"라고 말하며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나도 이제 '사람이 주는 평화'라는, 제대로 사랑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으니 앞으로는 "워쩌, 장혀, 저런" 같은 단순하고 정다운 말들로 소통하고 싶다. 날이 서 있는 누군가에게도 "착한 사람이 왜 그려?"라고 말하고, 속상한 일을 겪은 친구에게도 "저런!"이라는 진심 어린 걱정 한 마디 말고는 불필요한 호기심을 내비치지 않을 것이다. 고마운 무심함을 장착하고, 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장하다" 칭찬하는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다. 내가 알기로 이걸 제일 잘하고 있는 사람은 심윤경 작가다. 그는 이미 할머니의 유산을 잘 이어받아 자신만의 위대한 성취를 해내고 있다.
"이것은 모두 내가 직접 겪은 일이므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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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