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동안, 입은요?] 언제나 이 정도의 공간밖에
차를 마시고 원고를 쓰기까지, 그 모든 과정은 대체로,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글ㆍ사진 염승숙(소설가)
2022.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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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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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예열'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건 '의식(Ritual)'과 같은 말이다. 나를 비롯해 동료 작가들과만 나누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글을 쓰기 전에, 부디 한 줄기 빛이라도 깃들기를 바라며 취하는, 각자만의 의식적인 행동과 준비 과정이 있는 셈이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뜻의 '의식'이라는 단어 말고 '예열'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작가는 누구일까?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예열'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간절하고도 강렬한 힘 같은 걸 생각해보게 된다. 글쓰기라는 게 꼭, 점화했을 때 타오르는 강렬한 불꽃의 시작점 따위를 필요로 하는 거라면 몸을 미리 데워 덥히고자 하는 작가의 집필 전 예열 과정은, 애달프고 주술적이기까지 하다.

영감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감이 찾아들도록 내면의 열기를 서서히 더해가는 일. 쓰는 동안 불꽃이 제풀에 사그라져서, 어깨에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멈추게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내밀하게 다스리는 일. 나의 경우 그것이 아침에 일어나 가능한 많은 양의 보이차를 마시는 일이다. 뜨거운 차를 많이 마셔서 등허리와 아랫배를 데우고, 머리에 좀 맑은 정신이 돌면 그제야 마감 중인 원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고나 할까. 차를 마시고 원고를 쓰기까지, 그 모든 과정은 대체로, 식탁에서 이루어진다.  

대학에 입학해 서울로 올라와 혼자 오랜 시간 지내면서, 식탁은 어디서든, 내게 다기능성 가구로 쓰였다. 고기능을 외치기엔 자취생의 원룸이나 오피스텔에 딸린 집기들이 언제나 낡고 형편없는 것이었던 데다 무엇보다 공간이 좁았던 까닭이다. 옵션으로 제공되어 몇 사람의 손을 거쳤는지도 알 수 없던 남루한 이인용 식탁들. 거기 앉아 밥도 먹고, 책도 읽고, 글도 써야 했던 식탁이 젊은 시절 내가 일시적으로 소유했던 것의 전부다. 나의 재산이라면 우후죽순으로 쌓아둔 공간 박스와 그 안을 가득 메운 책 더미밖에는 없었다. 그것을 이고 지고 지금껏 왔다. 어쩌면 그토록 가진 것 없이 참고 또 참고, 청춘을 인내할 수 있었을까 아득해질 정도다. 

결혼하고 난 뒤에는 당연히 서재용 책상을 따로 마련해서, 더 이상 식탁에서 글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째선지 여전히, 주방의 작은 원형 식탁에서 자주 원고를 쓰거나 마무리하고 있다. 문제가 뭘까, 생각하면 사실 아주 간단해 보인다.

책상에는, 뭔가가, 너무, 많다! 

산처럼 쌓여 있다, 많이!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항상 청소는 열심히 하지만 '정리'를 꼼꼼히 하지 못하는 타입인데 이런 습관은 커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읽었거나 읽고 있거나 읽어야 하는 책들이 기준 없이 놓여 있고,(나는 매의 눈으로 분별해 찾아낼 수 있지만 남들이 보면 한숨 푹푹이죠), 온갖 포스트잇이며 플래그, 마스킹 테이프 등의 문구류(이유를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줄자도 꼭 필요해요)와 연필과 만년필 등의 필기류와 수백 장의 A4 용지를 비롯, 몇 권의 노트들과 여러 종류의 영수증, 청구서까지 책상 위를 온통 난삽하게 메우고 있다. 그 틈바구니를 헤치고 중앙에 놓여 있는 노트북 거치대와 독서대 같은 것까지 바라보노라면, 이건 그냥 나의 뇌 구조 단면도를 펼쳐놓은 게 아닌가 싶어서 매번 그냥... 앉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 도망치고 싶다는 결심만... 하게 되는 것이다.

신박한 정리법이라든가 살림하는 법 등을 거쳐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안 읽어본 관련 책들이 없을 정도인데 실제적 실천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만 절감한다. 가급적 날을 잡아서 한 번씩 싹 정리를 한다 해도, 그건 정리라기보다는 쓸어서, 버리는(!) 행위에 가까워서 언제까지나 내게 책상 정리란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저 같은 분들, 계시나요. 흑)

쓸고 닦는 것엔 집착하면서 정리 정돈은 왜 잘 못할까 고민하던 나날에 나는 토니 모리슨조차 평생, 글쓰기에 좋은 '거대한 탁자'를 갖고 싶어 했다는 말에 언젠가 깊은 위안을 얻었던 기억이 난다. 책상 위에 남아 있는 작은 공간을 가리키며 "언제나 이 정도의 공간밖에 남지 않거든요. 이 버릇을 고치려고 하는데 안 되네요"라고 시무룩해하는 토니 모리슨이라니! 그 또한 끝내 정리되지 않는 책상 앞에서 절망을 느꼈던 것이다. 아이들이 깨어나지 않은 새벽녘에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동이 터오는 걸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흑인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빌러비드』를 쓰는 와중에도!

내 책상과 식탁을 나란히 두고 비교한다면 정말이지 극과 극... 더럽지는 않아도 좀처럼 정리되지 않은 책 더미를 뒤로하고 식탁은 너무나 깔끔하게 비어 있다. 정리 정돈에 젬병인 내가 가급적 식탁만큼은 아무것도 올려두지 않으려 애를 쓰기 때문이다. 식탁만큼은! 이건 은근하고도 절박하게 내 눈앞에 내려진 동아줄 같기도 해서 마감이 임박해오면 더 자주 식탁을 쓸고 닦는다. 그래야, 마감에 닥친 내게 꼭 필요한 것만 책상에서 쏙쏙 골라내, 식탁에 세팅할 수 있으니까.

거치대를 펼치고,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마우스와 마우스 패드를 챙긴다. 초고를 완성하기 전이라면 인물과 장면을 무분별하게 메모해둔 노트가, 마감 직전에 퇴고를 거듭해야 하는 때라면 교정한 출력본이 필요하다. 이걸 다 어디에? 식탁에! 세팅을 마치면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원고를 쓴다. 쓰면서야, 매번 깨닫는다. 책상이 이래야 하는데...!

돌아보면, 아이를 낳아 기르게 된 뒤로, 식탁은 어떤 '자리'로서도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었다. 아이에게 끼니마다 이유식을 먹이고, '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방식의 식사를 챙겨주고... 유아용 과자와 사과주스로 시작해서 나란히 앉아 보이차도 마시게 되는 시간들을 무사히 통과해온, 유의미한 공간. 내가 식탁에 앉아 급히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 주방 서랍을 다 뒤집어놓으며 "엄마, 이게 므(뭐)야아~?"하고 묻던 아기는 이제 조금 컸다고(내년에 일곱 살 '형님'이 된다며 들떠 있습니다) 조용히 제 할 것을 챙겨와 내 옆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클레이를 조몰락거리거나,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거나,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1부터 10까지의 셈을 하며 제 시간을 유유히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육아의 신비! (물론... 아이는 계속 말을 걸죠. "엄마, 이거 바바(봐봐)~?"

이제는 아이를 살피고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써야 할 때는 쓰는 지경(경지 아닙니다, 오해 마시길!)에 이르고 있다. 어디서? 다시 말하지만 식탁에서! 이쯤 되면 작업을 위해서 딱히 고독한 환경이 필요하지는 않다던 오에 겐자부로의 말이 떠오른다. 소설을 쓰거나 읽을 때 그는 주로 거실에서 작업하는데, 그 이유는 혼자 있거나 가족에게서 떨어져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라는 것. 그는 거실, 나는 주방이지만 결국은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고 만다. 인간은 시간에 쫓기는 유한한 존재이고, 그러니 드럼통 안에 갇힌 듯 허둥대는 찰나에도 홀로 고독한 '쉼'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나는 그 말에 동조하지 못했었는데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을 택하고 나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가 아닌 삶, 아이와 '함께' 지내기로 약속된 인생을 선택(그렇습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했다면, 나와 다른 존재들과 생활의 영역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이미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식탁에 앉는다. 

먹고, 쓴다. 먹기도 하고, 쓰기도 하는 장소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소설 또한 그렇다. 그 사실을 잊거나 소홀히 하지 않으려 한다. 누구나 '완생'을 꿈꾸듯 소설가도 완전한 원고를 목표로 고치고, 또 고쳐나가는 것이다. 나아간다고, 나아갈 수 있다고 소설을 쓸 때만큼은 그래서 미래를 기약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빌러비드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저 | 최인자 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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