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정(避靜), 분주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번역가 노시내는 지난봄 취리히로 40일간의 피정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소란합니다. 26년 동안 6개 도시에 머물며 만난 사람들, 음식들, 언어들이 피정의 내밀한 시공간을 흔듭니다. 〈노시내의 작가 피정〉은 그 기억과 인연의 일기이자 그것들을 자신의 일부로 삼아 번역해낸 글입니다. |
콜롬바 파스콸레
자고 일어났더니 으슬으슬하다. 영상 4도. 아침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샤워하다가 물이 찬 것 같아 참을성 없이 수도꼭지를 온수 방향으로 홱 돌렸는데 순식간에 엄청나게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나왔다. "앗 뜨거!"하고 외마디를 질렀다.
이제 나는 갑자기 아픔을 느낄 때 "아야!"만큼이나 "아우치!(ouch)"가 튀어나올 때가 많아졌다. 오랜 외국 생활 탓이다. 하지만 뜨거운 것에 놀랐을 때는 언제나 "앗 뜨거!"이다. "앗 뜨거"에 해당하는, 간략하게 입에서 튀어나올 만한 대체용 외국어 표현이 없어서일 것이다. 복수 언어를 사용하며 생활할 때, 적어도 감탄사의 경우, 음절 몇 개만 짧아도 잠재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황당한 상황을 만나 화가 솟으면 내 입에서 "아이씨"보다 "쉿(shit)"이 — 그리고 정말 빡치면 "퍽(f**k)"이 — 먼저 튀어 나오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막강한 한국어 감탄사가 있다. 바로 '아이고'다. 어떤 상황을 놓고 안타까움, 측은함, 당황스러움, 약간의 놀람, 창피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쓰임새 다양한 감탄사다. '아이고' 내지 그 준말 '아고', '애고', '애구'는 딱 맞아떨어지는 영어 대체어를 도무지 찾기 어렵다. '지저스(jejus)'나 그 준말인 '지즈(jeez)' 또는 '갓(god)'이나 그 준말인 '가쉬(gosh)'로는 오묘한 어감을 온전히 잡아내기 어렵다. 외국인의 귀에 '아이고'가 음성적으로 인상적인 모양이다. 지금도 내가 어쩌다 이 감탄사를 내뱉으면, 여기에 오랜 세월 노출된 남편이 재빨리 "아이고"하고 따라 한다. 발음도 정확해서, 내 입에서 '아이고' 소리가 나오게 한 애초의 요인을 잠시 잊은 채 나는 실소한다.
마틸데에게 디저트를 가지고 가기로 약속했다. 부활절에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마틸데의 성스러운 특권이므로 함부로 범하면 안되는 영역이다. 마틸데는 디저트도 제과점에서 사기보다는 손수 케이크나 파이 굽기를 즐기지만, 이번에는 내가 가져갈 테니 준비하지 말라고 간신히 설득했다. 그래도 또 따로 구울지 모른다. 음식은 뭐든 넉넉히 준비하는 너그러운 분이다.
마틸데에게 방문할 때 나는 거의 예외 없이 슈프륀글리(Sprüngli) 제품을 들고 간다. 마틸데는 슈프륀글리를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제과점으로 숭배한다. 시어머니의 눈에 다른 빵집은 다 열등하다. 내가 봤을 때 훨씬 더 맛있고 고급스러운 케이크를 사다 드려도 매번 맛이 슈프륀글리만 못하다고 하시니, 다른 제과점 제품 찾아보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그러나 부활절에는 예외가 허용된다. 이탈리아가 고향인 디저트 빵, 슈프륀글리에서는 팔지 않는 빵 '콜롬바 파스콸레(colomba pasquale)'가 있기 때문이다. 이 달콤한 빵은 부활절 전후에만 판매되고, 무엇보다 마틸데가 아주 좋아해서 가져가면 반가워한다. 아마 마틸데가 이탈리아 출신이어서 그럴 것이다. 부활절 비둘기라는 뜻을 지닌 '콜롬바 파스콸레'는 실제로 날개를 펼친 비둘기 모양이다. 통통한 십자가 모양으로도 보인다. 사실 이름과 모양만 다를 뿐 크리스마스 때 먹는 '파네토네(panettone)'와 맛과 성분이 거의 동일하다. 순서를 따지자면 20세기 초반에 밀라노에서 태어난 파네토네가 콜롬바에 앞선다. 독일에서는 슈톨렌이,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푸딩이 성탄절 식탁을 빼놓지 않고 장식하듯, 이탈리아 사람들은 제과점과 마트에 깔린 파네토네를 보며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성탄절 빵 파네토네를 다른 때는 못 판다는 문제점에 봉착한 이탈리아 상인들은 곧 해결책을 찾아냈다. 파네토네를 형태만 바꿔 콜롬바라 명명하고 '부활절에는 콜롬바'라는 공식을 소비자의 머리에 — 그리고 마침내 내 머리에까지 — 주입하는 영리한 상술을 펼쳤다. 1년에 한 번 팔던 것을 봄에 한 차례 더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파네토네와 콜롬바는 각각 성탄절과 부활절에 유럽 전역으로 수출되며, 최근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도 슬슬 소개되고 있다.
콜롬바를 사러 옐몰리 백화점 지하 식품 코너로 내려갔다. 예상대로 온갖 상표의 콜롬바가 내 키보다 높게 산처럼 쌓여 있다. 전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제품들이다. 콜롬바와 파네토네는 원래 밀라노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북부가 강세지만, 그동안 생산업체들이 전국으로 확산된 모양이다. 잘 살펴보니 베네토 지역 제품도 있고 멀리 시칠리아에서 온 제품도 있다. 원산지뿐만 아니라 사용한 재료에 따라 종류도 다양해서 눈이 어지럽다. 아주 전형적인 재료인 건포도, 말린 오렌지, 아몬드 외에도 체리, 살구, 피스타치오, 바닐라 크림, 다크 초콜릿, 밀크 초콜릿, 밤 퓌레를 넣은 것도 있고, 이탈리아 레몬술 리몬첼로를 넣거나 와인에 절인 건포도를 첨가한 제품도 눈에 띈다.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를 좋아하지 않는 소비자를 위해 빵으로만 된 콜롬바도 갖춰 놓았다. 전통적으로 콜롬바 반죽에 들어가는 버터 대신 올리브 오일로 구운 제품도 보인다. 전부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오늘따라 웬일로 전 품목 20퍼센트 할인 표시가 붙어 있다. 부활절 연휴가 지나면 더 이상 팔리지 않을 테니 떨이를 하려는 셈이다.
나는 이 수많은 선택 가능성 앞에서 잠시 마비 상태를 경험한다. 콜롬바 판매대 주위를 사냥감 노리듯 몇 차례 맴돌면서 서서히 선택지를 줄여나간다. 이윽고 다른 제품보다 개수가 적은 분홍빛 포장지에 눈이 가닿았다. 가끔 그런 선택을 할 때가 있다. 무엇을 골라야 좋을지 모를 때 재고가 몇 개 남지 않은 것을 고르는 일 말이다. '남이 많이 사간 걸 보니 저게 맛있는가보다'라는 근거 희박한 논리로 구매 결정을 합리화한다. 백화점 측에서 잘 팔리지 않을 것으로 예견하고 애초부터 그 물건을 다른 물건보다 적게 갖다 놓았던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손에 들어보니 1킬로그램 중량이 꽤 묵직했다. 윗면에 '로자 에 피코 딘디아(Rosa e Fico D'India)'라고 쓰여 있다. 이탈리아어를 모르지만 '장미와 인도 무화과'라는 뜻인 건 대충 알겠다. 장미가 들었어? 인도 무화과는 여느 무화과와 다르게 특별한가? 혹시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서 상자를 뒤집지는 못하고, 위로 번쩍 들어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꺾은 자세로 바닥에 쓰인 재료를 확인한다. 이탈리아어 아래 적힌 영어 설명을 보니, 정말로 장미에서 추출한 식용 로즈워터와 에센스 오일이 함유되어 있다. 시칠리아산 꿀도 들었다. 피코 딘디아는 '프리클리 페어(prickly pear)'라고 옮겨 놓았다. '가시 돋친 배'라. 검색해보니 선인장 같은 식물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백년초 열매다. 선인장과 식물이라 뜨겁고 건조한 데서 잘 자라므로 한국에서는 주로 제주도에서 재배되고 이탈리아에서는 남부 지방에서 널리 재배된다.
이제까지 보아온 콜롬바나 파네토네 중에서도 이모저모로 특이하다. 맛이 궁금하다. 궁금하니 먹어보고 싶어진다. 하필 이 순간, 내 옆에서 또 다른 중년 여성이 같은 제품을 살핀다. 그 모습을 보자 이걸 사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진다. 남들도 관심 두는 특이한 제품이니 사볼 만하다는 나름 이성적인 결정이었으나, 결국 이국적인 재료를 보태 신수요를 창출하려는 업자의 상술에 멋지게 넘어갔다.
'이국적'이라는 말을 써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로즈워터며 백년초며, 나 같은 한국인이나 스위스인에게나 이국적인 재료지 — 아무리 스위스가 이탈리아 인접국이라고 해도 시칠리아와 취리히는 식문화를 포함해 완전히 별세계다 — 지중해에 면하고 역사적으로 중동의 영향을 받은 시칠리아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저 주변에 흔한 식재료를 콜롬바에 넣어봤을 뿐일 수 있으니까.
나는 같은 콜롬바를 두 개 샀다. 하나는 마틸데에게 주고, 다른 한 덩이는 영국에 가있는 쌍둥이 조카들이 돌아왔을 때 주라고 마틸데에게 맡겨 놓기로 했다. 이로써 나는 위험 부담을 졌다. 마틸데는 여간해서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가 알고 즐기는 몇 안 되는 음식이 행여 클래식한 형태와 재료에서 벗어나면, 열에 아홉은 경계, 무시, 비난, 혐오한다. 이런 사람에게 장미 추출 원액과 — 나도 무슨 맛인지 전혀 모르는 — 선인장 열매가 든 1킬로그램짜리 음식물을 덜컥 선사하다니 어쩌자는 건가. 하지만 나는 때때로 시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안심 반경에서 슬쩍 끌어내는 짓궂은 즐거움을 추구한다. 운이 좋으면 '열 에 아홉'을 비켜갈 수도 있다. 그러면 마틸데의 음식 세계는 좀 더 넓어질 테고, 나는 다른 사람의 음식 세계를 넓혀줄 때 희열을 느낀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오늘따라 줄표가 유난히 많이 달렸다. 줄표 남용은 안 좋은 버릇이다. 그러나 자기 검열을 좀 풀어버리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는 오늘따라 생각에 혼란이 심했는데, 그 혼란을 가다듬어 정연한 글을 쓰려고 애쓰다가 한계에 부딪혀 일어난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줄표를 쓸 때도 어떤 희열을 느낀다. 줄표가 아니면 보태기 까다로운 여분의 생각을, 줄표 덕분에 손쉽게 끼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반칙을 저지르고도 결과를 감수하지 않는 희열이다.
* <노시내의 작가 피정> 은 2023년 1월, 도서출판 마티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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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내(번역가)
연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스위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지를 떠돌며 27년째 타국 생활 중이다. 《마이너 필링스》 《책임 정당》 《대표》 《사랑, 예술, 정치의 실험: 파리 좌안 1940-50》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등의 책을 옮겼고 《작가 피정》 《스위스 방명록》 《빈을 소개합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