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동물 인형 로봇의 형태를 하고 내 집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나와 직접 교류한다면 어떨까?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의 일상을 내 집에서 모니터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초연결 시대에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관계 맺기의 본질을 서늘하고 섬뜩한 상상으로 통찰한 소설 『리틀 아이즈』가 나왔다.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오분 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이 소설은 스마트폰 보급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전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연결되고 팬데믹으로 인한 이동 및 대면 모임 제한 등으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급격하게 증대된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것이다.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번이 첫 번째 한국 방문인 걸로 아는데요. 한국에 오셔서 무엇을 하셨고,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매우 인상 깊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아르헨티나와 베를린에서는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와서 한국의 문화를 직접 겪을 수 있어 너무 좋습니다. 독자들과 이야기도 나누었고 문학 행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길상사를 방문하기도 했는데요. 다만 아쉬운 것은 그 뒤에 제가 다리를 다치면서 계속 호텔에 있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 때문에 한국의 병원도 가보았는데, 한국을 이렇게까지 가까이 느낄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제가 다리를 다치는,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실수를 했는데요. 다리를 다쳤다고 가족들한테 이야기했더니, 가족들이 어쩌다 다치게 되었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서울이 너무 인상 깊어서 다리를 다친 것 같아요. 밤이었는데요, 베를린이나 아르헨티나에는 이렇게 고층 건물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층 건물들을 올려다보니 너무 아름다웠고, 서울은 특히나 오래된 것과 현대의 것이 공존하는 도시이다보니, 그런 것들을 넋을 놓고 보다가 다리를 다치지 않았나 싶습니다.
켄투키가 '되는' 사람과 켄투키를 '소유'하는 사람, 이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뭘까요? 이들은 어떤 동기 혹은 욕망으로 움직이는 걸까요? 어떤 기준으로 인물들을 나누었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켄투키는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작은 인형인데요. 사람들은 이 켄투키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켄투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켄투키에게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요, 먼저 켄투키의 역할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켄투키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소통 창구가 됩니다. 오늘날의 와츠앱이나 줌, 이러한 다양한 SNS 미디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죠. 이런 테크놀로지를 통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SNS 소통을 생각해보면 항상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죠. SNS를 보는 사람들이 있고, SNS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에게 나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고, 또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팔로워가 많아지는 걸 즐기는 사람들요. 그런 것을 표현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리틀 아이즈』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켄투키가 되는 것에 더 큰 재미를 느꼈는데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지켜본다는 건 사실 작가의 역할과도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 이 세계를 관찰하고 있어요. 특히, 우리가 보고 있다는 걸 그들은 모를 때 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또 그곳에 진실이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소설을 써나가며 각각의 역할에 이입을 하게 되면서 다른 면으로도 큰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 켄투키가 된 사람들이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시선의 권력이 있을 수 있고, 좀 변태적일 수도 있지만 켄투키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굉장히 큰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조금은 바보 같은 질문일 수 있지만 저한테 굉장히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만약에 켄투키를 때린다면 이것은 사람을 때리는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때리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 켄투키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애매한 한계,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폭력을 견딜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하는 것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리틀 아이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어떤 식으로든 고립되거나 소통이 단절되어 있고,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고독한 듯해요. 이런 점을 의도하셨을까요? 소셜미디어가 오히려 우리를 더욱 외롭게 한다고 보시나요?
우리가 이렇게 모두 연결되어 있지만 그 와중에 소통이 부족하다는 역설을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저는 정확하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런 해석이고요. 사실 우리는 외롭기 때문에 SNS로 연결되려 하지만 연결되어 있을수록 더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이 『리틀 아이즈』라는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베를린에서 굉장히 많은 일들을 하며 바쁘게 지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에서 진행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 줌을 통해서 화상 회의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몇 시간 동안 계속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다보니, 소통이 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하루 종일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다가 인터넷을 끄는 순간 완전한 고독감과 굉장히 조용한 방 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내가 뭘 한 거지? 실제로 뭘 하긴 한 건가? 내가 상상한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프로젝트는 굉장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약간 실패한 인생인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고요. 그렇게 몇 달 동안 이런 일들을 반복하다보니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작품을 쓴 지 1년 반 정도 후에 코로나가 터졌는데요. 그러다보니 제가 겪었던 것을 이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겪게 된 것이죠. 『리틀 아이즈』가 독일에서 출간되었을 때는 코로나 초기였는데, 많은 독자들이 제가 겪었던 것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다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집 안에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죠. 이 시기에 제가 작가로서 얻은 경험이 있다면, 작가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도 똑같이 겪을 수 있는가가 중요하고, 책이 나왔을 때 독자들이 어떤 것을 겪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리틀 아이즈』에서는 켄투키의 긍정적인 작용도 일부 그려지지만, 대부분의 에피소드에서 파괴와 폭력으로 점철된 부정적인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추구하고 타락하기 쉬운 존재일까요?
현실을 보면 안타깝게도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문제라고도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용자들의 어두운 면을 강조하고 싶었는데요. 이러한 부분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부분이기에 이에 대해 성찰을 하고 싶었습니다. 『리틀 아이즈』를 구상하기 전에 현대 소설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 알아차린 것이 문학에서는 약간 의도적으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에게 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면 와츠앱이나 이런 메시지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차를 타고 친구네 집에 간다는 방식으로 묘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졌고요. 그런데 사실 우리 현실에서는 이런 테크놀로지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거의 우리의 신체 일부처럼 사용합니다. 우리가 마치 로봇이 된 것처럼요. 휴대폰을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항상 들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문학에서는 이런 테크놀로지를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SF 소설에서만 주로 다루죠. 저는 이런 테크놀로지에 대한 모든 종류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정치적인 한계라든지 법적인 한계라든지 또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한계에 대해서요. 우리가 운전하기 전에 운전자 교육을 받는 것처럼 테크놀로지를 이용하기 전에 사용자들도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제게도 테크놀로지에 대한 연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리틀 아이즈』의 수많은 등장인물과 에피소드 중에 특별히 애착 가는 인물과 에피소드가 있나요? 저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말한 '눈(雪)'을 찾아 켄투키를 조종해 모험을 떠나게 하는 과테말라 소년 마르빈에게 가장 마음이 쓰였어요.
제가 가장 가깝게 느끼는 등장인물은 바로 알리나입니다. 알리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은 인물이고, 테크놀로지에 대해 생각하는 관점도 저와 비슷합니다. 또, 무엇보다 알리나는 예술가들과 함께 멕시코의 오악사카에서 지내고 있는데요. 저도 오악사카에서 세달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지냈는데, 대부분 작가가 아니라 화가나 조각가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혹은 그들이 스스로 예술가라고 뻐기는 듯한 태도에 굉장히 실망을 했었습니다. 무슨 무비 스타처럼 구는 모습들도 있었고요. 물론 작가들도 오만할 수 있지만요. 그런 예술가들에 대한 실망이 있었기 때문에 알리나를 저와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또, 저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단편을 쓰기도 했는데요, 알리나 역시 이런 문제의식을 드러냅니다.
또, 제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인물은 죽어가는 삼촌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는 인물인데요. 사실 저에게도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베를린에 있을 때 동생에게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단 연락을 받고 임종을 지키려고 아르헨티나로 갔었거든요. 이 부분이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보면 이 작품의 장점은 굉장히 다양한 국가, 다양한 도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제가 속한 문학계에서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과 상호 작용을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 다양한 언어로 번역이 되어서,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굉장히 다양한 나라에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 있는 제 편집자는 실제로 중국에서는 이런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주기도 했고, 또 크로아티아의 지인 한 분은 그리고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의견을 주기도 했고요. 또, 페루 분은 리마 에피소드에 대해서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소설이 25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의 문학 세계와 연결되면서 적극적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서울작가축제에서 소설가 하성란 선생님과 나눈 대담에서 다음 작품은 아르헨티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재(火災)'에 대해 쓰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조금 더, 1~2년 정도 더 기다리셔야 할 것 같고요. 그 이유는 제가 매우 느리게 쓰는 작가이기 때문이에요. 사실 저는 작품 하나를 끝내고 나면,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무척 많이 읽고 독자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도 무척 좋아합니다. 독자들이 내 책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궁금하거든요. 물론 일반적으로 좋았느냐, 나빴느냐 이런 질문도 가능하지만 제가 항상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저 스스로에게도 하고, 독자에게도 하는 질문인데요. 내 글이 충분히 용감했는지, 내 글이 충분히 새로웠는지, 내 글이 충분히 미쳐 있는지, 그리고 독자가 내 글을 읽는 시간이 가치 있는지 저는 항상 고민합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내 책을 읽는 내내, 문단별로 혹은 문장별로 읽어내려가면서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가 저는 거의 집착에 가깝게 궁금합니다.
또 제가 확신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문학은 단순히 읽는 것도 단순히 쓰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그 둘을 합한 게 문학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혼자서 쓰기만 하거나 읽기만 했을 때 절대 알아낼 수 없는 것을 이 둘이 합쳐지면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문학을 좋아하고요. 또, 저한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책이 단순히 일방적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호 작용을 통해서, 문학적인 힘을 통해서 독자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조금 더 앞으로 끌어내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독자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한국 독자분들께 따뜻한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제 책이, 제 이야기가 이렇게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온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는 많은 번역가분들의 수고가 있을 텐데요. 저 자신이 번역서를 많이 읽는 독자로서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만타 슈웨블린 197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2010년 영국의 권위 있는 문예지 <그랜타>에서 꼽은 '35세 이하 최고의 스페인어권 작가 22인'에 선정되는 등 일찍부터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이끌어갈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았다.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감성과 형식을 더해 사만타 슈웨블린만의 장르를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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