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
더보이즈의 여덟 번째 미니 앨범
'금지된 사랑'과 영성의 세계가 여기서 매우 콘셉추얼한 케이팝의 얼굴을 하고는 있으나, 어찌 보면 한국 대중음악에서는 다른 형태로 익숙한 것이기도 하다. 주로 남성적인 발라드에서, 연인이나 그와의 관계는 천상의 것으로, 연인과 헤어진 뒤 (빈번하게 술에 취해 어두운 길을 헤매는) 화자의 세계는 지옥에 가까운 통속적 인간계로 그려진다. 관계의 회복은 천륜에 의해 금지된 것이다. 한국식 신파의 영향이 짙은 이같은 노래들은 때로 연인의 의사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관계의 회복을 갈구하고 다짐해, 그야말로 '유해한 남성성'을 로맨스로 포장하기도 한다. 신파, 고전적 가요 문법, 유해한 남성성은 모두 케이팝 보이 그룹이 가급적 지양할 만한 것들이다.
'ROAR'의 가사는 여기서 살짝 방향을 튼다. 수록곡들이 애정의 대상을 종종 구원자로 묘사하지만, 정작 'ROAR'에서는 대상에 관한 서술이 희박하다. 일부 남성 발라드는 대상의 의향을 뮤트하고 제멋대로 연심의 질주를 하지만, 'ROAR'는 연인의 현재 위치마저 흐려버린다. 필시 케이팝 특유의 공법이라 부를 만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설정의 공백은 타락천사인 화자가 인간계에서 연인을 찾으리라는 서사를 암시하기도 한다. 천사에게 금지됐던 것은 천상계의 특정 대상이 아니라 사랑과 욕망이라는 감정 그 자체이고, 이를 추구해 추방된 천사는 "이제야 내가 자유로워졌어"라는 가사와 함께 비로소 연인에게 갈 수 있게 된다.
이같은 테마의 변형은 음악적으로도 드러난다. 'SMP적인' 짜릿한 보컬 화성을 꽂아 넣거나 우악스러운 드라마틱함을 구사하기도 하지만, 곡은 최근 몇 년간 넘쳐나는 보이 그룹의 '치명', '다크', '절박'과는 차별화된다. 이는 비교적 여유로우면서도 과히 무겁지 않게 흐르는 R&B 기반의 비트, 휘슬 사운드와 함께 언뜻 해학의 그림자마저 느껴지는 몇몇 구간의 멜로디와 뉘앙스가 부분적으로, 그러나 결정적으로 작용한 결과다.(악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의 낙천성은 현대 악당 서사를 대표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그 결과, 능란한 완급 조절을 통해 청자를 내내 집중력 있게 이끌어가기도 하고, 사운드와 감성이 다채롭게 교차하는 케이팝의 양식미를 매우 충실하게 완성하기도 한다. 또한 이 대목이, '금지된 사랑'이라는(이제 와서 말이지만 노후하고 구질구질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을 써야만 함을 애석하게 여긴다) 자칫 신파적이거나 유독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는 테마를 2023년에 부끄럽지 않은 케이팝 아이돌의 곡으로 재해석 해낸 성취라 할 만하다.
미니 앨범의 패키징은 세 가지의 포토북 사양과 11종의 멤버별 주얼 케이스 버전, 그리고 포토북 테마에 대응한 세 가지 플랫폼 앨범으로 구성됐다. 포토북은 전작과 달리 CD와 가사지의 수납 포켓을 두지 않았고, 그래서 좀 더 팔랑팔랑한 잡지 같은 느낌의 책자가 되었다. 별책으로 수록된 CD 포켓과 가사지는 모노톤에 대범한 타이포그래피로 꾸며져 텍스트가 확실히 눈에 꽂히도록 디자인됐다. 그런데 그 텍스트가 "DON’T CALL ME LIKE THAT"을 비롯한 가사의 인용구들이다. 포토북 내부에 인용구가 '느낌 내기' 용도로 들어가는 경우는 많지만, 다른 표면에 인쇄된 인용구들은 아무래도 굿즈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어찌 보면 앨범의 가장 본질적인 구성 요소라 할 CD 포켓과 가사지가 가장 굿즈처럼 느껴지도록 디자인된 점이 몹시 흥미롭다.
또 한 가지 짚을 만한 대목은, '플랫폼 앨범'이 포토북과 마찬가지로 'REACH', 'REALIZE', 'REASON'의 세 가지 디자인으로 발매됐다는 점이다. 플랫폼 앨범은 수록된 QR 코드를 스캔해 디지털 디바이스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포맷으로, 최근 환경 위기와 관련해 케이팝 앨범의 과도한 패키징에 대한 대안으로 여러 아티스트가 발매하고 있다. 다른 아티스트도 플랫폼 앨범을 멤버별로 발매하는 등 소장품으로서의 가치를 강화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포토북을 생략하는 플랫폼 앨범을, 포토북과 강하게 연동된 패키징의 시각 테마에 따라 여러 버전으로 구성한 것은 분명 특이한 일이다.
에코백은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에코 프렌들리'하다고들 한다. 패러독스와 기정사실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명제다. 플랫폼 앨범의 명분은 플라스틱과 지류 소모를 줄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상품 분류상 '음반'으로 지정되는 재화가 대량 판매되어야만 하는 산업 환경과, 팬에게 최소한의 물성을 제공하려는 전략 사이의 선택이기도 하다. 팬 사인회 응모를 위해서든 수집욕을 만족하기 위해서든 아티스트를 지지하기 위해서든 팬들은 각자 여러 장의 음반을 구매한다. 어차피 대량 구매한다면, 완전히 똑같은 음반보다는 조금씩 다른 상품을 모아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팬을 위한 배려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테마별로 다양화된 플랫폼 앨범이란, 결국 이 새로운 포맷이 꼭 에코백과도 같은 존재임을, 새삼, 그러나 매우 가시적으로 상기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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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