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그에 상응하는 모험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이팝을 두루 이야기하며 묘하게 외면받는다 싶은 지점이 있었다. 케이팝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되고, 좋아하는 아이돌이 개인 정체성의 일부가 되며, 문화계뿐만이 아닌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거의 모든 산업이 케이팝 팬덤의 성공 공식을 궁금해하는 사이, 사람들은 지름길이자 모범 답안이라 할 수 있는 공식을 매번 비켜 나갔다. 바로 '팬송'이었다.
가수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팬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는 마음을 담은 팬송은 그 자체로 케이팝이라는 거대한 산업의 역학과 화학작용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참고 자료다. 단순히 충성도가 높다, 사랑을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치 않는다는 추상적인 묘사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팬덤을 둘러싼 삼라만상이 그 안에 있다.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도통 공감할 수 없는 감정을 일방과 쌍방으로 쉼 없이 주고 또 받는 사람들이 겪는 갖은 희로애락의 굴레가 회오리치는, 그곳이 바로 팬송의 자리다.
바라지 않기에 순수한 감정이 담길 수밖에 없는 팬송 가운데에는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은 곡도 왕왕 존재한다. god의 '하늘색 풍선'과 아이유의 '마음'이 대표적이다. '하늘색 풍선'은 응원봉도 아닌, 무려 풍선의 특정 색깔로 팬덤을 구분하던 시절 만들어진 노래다. 노랫말은 god의 팬덤인 fangod의 풍선 색깔을 테마로 한다.
파란 하늘 하늘색 풍선은 / 우리 맘속에 영원할 거야 / 너희들의 그 예쁜 마음을 / 우리가 항상 지켜줄 거야
'영원'이나 '지켜준다'는 약속이 흔하던 1세대에 어울리는 풋풋함과 멤버들의 평소 입말처럼 쓰인 랩 파트가 인상적이다. 이 곡이 자신의 대표곡이 되었으면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정도인 노래 '마음'은 팬들을 향한 마음을 듬뿍 담은 아이유의 자작곡이다.
제게 대답하지 않으셔도 돼요 / 다만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이 / 여기 반짝 살아 있어요
아이유의 팬들은 이 곡에 대한 답가로 '마음에게'라는 노래를 따로 만들어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데뷔 15년 만에 발표된 샤이니의 메인 보컬 온유의 첫 정규 앨범
시간은 가고 / 불안함이 널 삼킬 때 / 그 어떤 날도 / 난 한결같이 네 밤을 지킬게 / 보통의 날 너의 보통의 밤에 / 난 변함없이 네 편이 돼 줄게
케이팝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팬송의 앤섬처럼 여겨지는 샤이니의 '너와 나의 거리'는 또 어떤가.
눈을 맞춰줘 / 멀리서 너를 보며 혼잣말로 속삭여 / 그저 한번 웃어줘 / 네 얼굴만 봐도 난 견딜 수 있어 / 손을 더 뻗어도 온 힘을 / 다해 뻗어도 넌 닿지 않아 / 설렌 맘에 불러봐도 대답 없어 / 넌 절대로 닿을 수 없나 봐
노랫말을 직접 쓴 종현은 이 노래가 가수와 팬의 사이를 그린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남겼지만, 노래는 한없이 가깝지만 그만큼 한없이 먼 가수와 팬 사이를 설명하는데 더없이 탁월한 면모를 보인다. 사랑하는 이에게 "내 사랑이 겨우 이것밖에 안 돼"라며 끝없는 아쉬움을 표하는 세븐틴 '겨우'도 놓치기 아쉽다. 돌려받지 못할 거란 걸 알면서도 끝없이 주는 사랑과 그 사랑을 보답할 길이 없어 어쩔 줄 모르는 어떤 관계의 일상이 손에 닿을 듯 펼쳐진다.
이렇게 쉬운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애써 외면한다. 굳이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오글거린다거나 너무 감상적이라는 평도 흔하다. 팬송에 가슴 시려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엔 절대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른다. 그러나 강물에 손도 넣어보지 않은 채 물의 깊이와 온도를 가늠하는 것만큼 허황한 행위도 없다. 지난해 발표된 그룹 소녀시대의 15주년 기념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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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
twocom
2023.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