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들이 일단락되고 평온에 가까워진 지금은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스스로도 잘 믿어지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놀랍게 생각하는 건 『설이』와 『영원한 유산』을 쓰던 약 3~4년간 내가 거의 최악의 난독증 상태였다는 점이다. 『설이』를 쓸 때는 모니터를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감고 썼고, 『영원한 유산』을 쓸 때는 마침내 글씨가 파괴되어 훨훨 날아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바보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 지경에 이르도록 모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왜 병원 한번 가보지 않고 혼자 괴로워했단 말인가?
하지만 사람의 정신이 건강하지 않을 때 스스로 눈치채기란 쉽지 않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글 쓰는 작업을 제외한 일상생활을 평온하게 유지해 나갔고, 그러므로 나 자신에게 별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설이』를 쓰는 과정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을 만큼 악전고투의 과정이었고, 이전까지 내가 썼던 모든 소설과 달랐다. 불이 꺼져 작동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버튼들을 나는 눈을 감은 채 이것저것 꾹꾹 눌렀다. 지금쯤 고도는 어느 정도일 것이고 속도를 줄이고 지금쯤 랜딩 기어를 내려보기로... 나는 비행시간이 상당히 쌓인 경력 있는 조종사였으므로 계기판이 모두 꺼진 비행기라도 예전처럼 조종하는 것 같은 겉모습을 어떻게 흉내 내볼 수는 있었다. 간절히 바랐던 대로 자동 항법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으므로, 계기판이 꺼진 비행기는 어두운 공항에 무사히 내려앉았다. 순탄한 착륙이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최소 한쪽 날개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승객들이 모두 기절해 구급차로 실려 간 동체 착륙 정도의 충격은 있었다.
소설을 쓰면서 가장 큰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나에게는 그것이 초고를 완성하는 순간이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날의 벅찬 성취감과 행복감은 첫눈을 맞이하는 강아지만큼 커다래서, 보통 나는 그날 조용히 집에 앉아 있지 못하고 누구라도 불러내 달려나가곤 했다. 축배와 떠들썩한 웃음의 밤이다. 『설이』는 그러지 못했다. 그냥 멍하게, 이것을 원고라고 불러도 될까, 사람들이 읽다가 말도 안 된다며 책장을 덮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며 한동안 웅크리고 있었다.
『설이』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나서도 그 멍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원고를 읽은 편집자가 정말 좋았다는 감상을 적은 문자를 보내주었을 때, 나는 그 말을 도무지 믿기 힘들어서 문자의 마지막에 달려 있는 느낌표만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감동입니다'가 아니라 '감동입니다!'인 것만이 중요했다. 느낌표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작가님 감동입니다'라고 문자를 보낸다면 원고를 받은 출판사 측의 의례적인 인사일 수 있겠지만 '작가님 감동입니다!'라고 문자를 보냈다면 이것은 진심일 확률이 좀 더 높다. 그러니까 내가 쓴 소설은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눈을 감고 이 소설을 썼다는 건 비밀이다. 그런 창피한 일을 누구라도 알아선 안 된다. 나는 혼자 그런 생각들을 했다.
『설이』를 출간한 직후 한 학교에서 강연 의뢰가 들어왔는데 수강 인원이 300명이라고 했다. 교육열로 유명한 지역의 학교라서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그런 대규모 강연은 선호하지 않는다고, 인원을 50명 이하로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며칠 후 인원을 200명으로 줄였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직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지나치게 큰 규모였지만 선생님도 사정이 있었다.
"사전 보고서까지 제출하라고 했는데도 아이들이 막무가내로 듣겠다고 합니다. 저희도 당황스러운데 더 이상 말릴 수는 없어서... 작가님, 강연 망해도 저희가 원망하지 않을 테니 이대로 진행해 주시면 안 될까요?"
대체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나는 200명의 아이들 앞에 섰다. 걱정했던 것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놀랍도록 많은 아이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필사적으로 나와 눈길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되자 인원의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나는 강연 내내 가장 간절한 눈길을 보내던 아이에게 마이크를 주었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마이크를 차지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이크를 들고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만 했다. 아무도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흐느낌 속에서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그가 마침내 던진 질문이었다. 사정이 어떠한지, 고민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우리에겐 아무런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유복하고 안정된 가정, 모두 부러워하는 환경 속에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웠던 나의 어린 시절이 설이를 통해 되살아났고, 소설은 우리를 단숨에 관통해 하나의 커다란 길을 냈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아무 설명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설이는 불완전함에 대한 소설입니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합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이 여러분을 위해 마련한 방안들은 모두 그분들이 생각하기에 최선의 길이겠지만, 필연적으로 그 모든 것은 불완전합니다. 내가 완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불완전하다는 것, 나의 부모도 불완전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나 자신을 지키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너무 규모가 커서 산만하고 형식적인 자리가 되지 않을까 했던 것은 기우였다. 석식 시간이 되었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아이들과 아쉽게 헤어져야 했다. 행사를 준비한 선생님은 안도한 얼굴이었다.
"우리 아이들, 열심히 들었죠? 규모가 컸는데도 괜찮지 않았습니까?"
물론이었다. 처음에 신청했던 300명이 모두 왔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꿈꾸던 시간이었다
다음 날 나를 만난 지인이 외쳤다.
"세상에, 정말 행복해 보여요! 작가는 역시 작품을 내면 행복해지는군요!"
그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듣고 보니 어제부터 나는 구름 위에 둥둥 뜬 것 같은 기분으로 살고 있었다. 얼굴에 그런 기분이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작가는 역시 작품을 내면 행복해지는 걸까?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5년간의 공백을 뚫고 『설이』를 썼으니 행복해진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서 엉엉 울면서 눈을 감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 모습을 떠올리자 행복감이 식었다. 그 일을 또 해야 한다니, 다시 그 꼴로 뭔가를 써야 한다니, 그걸 행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소설을 씀으로 해서, 어제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아이들, 아이들을 키우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부모들.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것은 글을 쓰거나 작품을 내는 행복감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진정 되고 싶었던 그것은 정확하게 작가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되고 싶었던 것은 '힘들고 상처받은 아이들과 부모들을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상담사일 수도, 동네 이웃일 수도, 역술인일 수도, 또는 작가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힘들고 상처받은 아이들과 부모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그 순간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바로 그것'이 되었다고 느낀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그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작가로서 만나는 사람들은 좋은데, 그들을 만나려면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서 작가라는 타이틀만 즐길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상태를 지난 5년간 경험해 보았는데, 정말이지 뭣 같은 경험이었다. 작가라는 나의 정체성은 글을 쓰는 것으로서만 유지할 수 있었다. 글을 쓰지 않는 기간 동안 나는 스스로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아니면서 작가인 척 행세하는 건 정말이지 못 할 일이었다.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아직도 머릿 속에는 타이어가 덜그덕거렸고 아이는 마포대교에 매달려 빽빽거렸고 모니터의 글자들은 춤을 추었다. 정말로 더 못 쓰겠는데 작가로 살아가려면 글을 써야 했다. 죽을 맛이었지만,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작가로 살아야만 했다. 회복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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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소설가. 장편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영원한 유산』, 『설이』 등과 에세이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