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혜나가 전통주를 음미하며, 소설가의 일상, 술의 향과 맛, 시와 소설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마지막 화입니다. |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
8월 15일, 9월 15일,
아니, 삼백예순 날
나는 죽기가 싫다고 몸부림치면서 울겠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가
시골구석에서 자식 땜에 아주 상해버린 홀어머니만을 위하여 우는 줄 아느냐.
아니다. 아니다. 나는 보고 싶으다.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이...
그때는 맑게 개인 하늘에
젊은이의 그리는 씩씩한 꿈들이 흰 구름처럼 떠도는 것을...
_오장환, 「병든 서울」 중에서
1945년 8월 15일 밤, 병원에서 눈물을 흘리며 깨어나는 시인이 있다. 사람들은 그가 독립의 기쁨에 겨워 우는 줄로 알지만 시인의 심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오만 가지 감상에 뒤엉켜 울고 있는 시인. 질척거리는 눈과 독한 술에 문드러진 쓸개를 시인은 만세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서울 길바닥에 내팽개쳐야만 하는지 묻는다.
1918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월북한 오장환의 시편을 읽을 때마다 시인의 눈물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했다. 눈물은 그저 짠맛인 줄로만 알았는데, 오장환의 「병든 서울」을 읽다 보면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해방의 기쁨, 병마와의 싸움, 홀어머니에 대한 걱정,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 미치도록 애정하면서도 사무치도록 증오하는 아름다운 병든 서울에서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어떤 단어로도 규정할 수가 없다. 그가 흘리는 눈물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만 가지 감정이 씨줄과 날줄처럼 뒤엉켜 있으리라 짐작만 해 볼 뿐.
'서울의 술' 삼해소주를 마실 때마다 「병든 서울」에서 읽은 시인의 눈물이 떠오른다. 9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삼해주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언급되었으며, 한양의 이름난 문인들이 사랑한 것으로 전해진 술이다. 삼해주의 삼해(三亥)는 해일(亥日), 돼지날(亥日) 세 번을 의미한다. 매해 구정이 지나고 첫 번째 돼지날 해시(亥時)에 밑술을 담가 두 번째 돼지날까지 36일을 발효하고, 두 번째 돼지날 해시에 덧술을 더해, 다시 36일을 발효한 뒤, 또 세 번째 돼지날 해시에도 덧술을 더해서 36일간 발효해야 비로소 삼해주가 완성된다. 이렇게 꼬박 108일, 삼해(三亥)가 걸린다 해서 삼해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이 삼해주를 밑술로 삼아 증류한 술이 바로 삼해소주다.
한 해에 술을 빚을 수 있는 횟수가 딱 한 번뿐인 데다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일일이 작업하다 보니 삼해소주의 생산량은 많지 않다. 1993년 서울시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삼해소주 제조 기능 보유자 이동복 선생의 아들인 김택상 식품 명인이 제조 기능을 물려받아 대를 잇다가, 삼해소주 아카데미 회원이던 김현종 대표가 2016년부터 합류하여 삼해주와 삼해소주를 빚어오고 있다.
워낙에 소량 생산하는 데다가 온라인으로 주문하기가 어려워, 삼해소주를 맛보기 위해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삼해소주 양조장에서 열린 삼해주 시음회에 참여했다. 시음회에서는 삼해소주의 밑술이 되는 약주 삼해주와 에탄올 함량 45퍼센트의 삼해소주, 그리고 삼해소주를 한 번 더 증류해 얻은 71.2도의 삼해귀주(三亥鬼酒)를 모두 맛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맛본 삼해주는 108일에 거쳐 장기 발효한 술의 윗부분만 떠낸 약주로 에탄올 함량이 17퍼센트였다. 작은 잔에 따라 한모금 마시니 무미에 가까울 정도로 드라이하면서도 은은한 청포도와 같은 과실 맛이 내내 뒤따랐다. 지금까지 마셔본 어떤 약주와도 달랐다. 어떤 과일도 첨가하지 않고 쌀, 물, 누룩만으로 빚어낸 술이라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우리에게 친숙한 초록병 소주와 도수가 비슷한데도, 에탄올 향이나 독한 맛이 없어 가볍고 싱그러운 화이트 와인처럼 술술 넘어갔다.
뒤이어 맛본 삼해소주의 맛은 한마디로 정의내리기 어려웠다. 쿰쿰한 누룩의 향이 마치 구수한 된장 향처럼 피어오르더니 술이 입술에 닿자마자 홧홧하게 타올랐다가, 입으로 넘어가니 맑은 구슬처럼 또르르 흘러 들어갔다. 갓 지은 밥을 한 수저 가득 떠 넣은 것처럼 따스하고 달큰한 누룽지를 한 모금 삼킨 것처럼 구수하면서도, 짜디짠 소금을 한 조각 입에 문 듯 아릿하고 쓰디쓴 독주를 삼킨 듯 뜨거웠다. 더불어 깊고 강렬하게 머무르는 잔향은 어떤 단어로도 규정할 수 없는 깊은 술맛을 보여줬다.
강렬하면서 맑고, 맑으면서 독하고, 독하면서 쓰고, 쓰면서 달고, 달면서 짜고, 짜면서 구수하다. 단 한 방울만으로 깊고 풍부하게 입 안에 차올랐다가 뜨거운 기운으로 목울대와 가슴을 쓸고 내려가는 삼해소주는 나라 잃은 시인의 눈물방울을 닮은 듯했다. 그토록 그리던 나라를 되찾았음에도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시인의 눈물, 그렇다고 현실을 그저 증오하고 절망할 수만도 없는 시인의 얼룩진 눈물이 바로 이런 맛이지 않을까?
시음회를 진행한 김현종 대표는 삼해소주의 풍부한 맛과 깊은 풍미가 바로 108일에 걸친 장기 발효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개량 누룩 혹은 일본식 누룩인 입국이 아닌 우리의 전통 누룩의 고유한 특성이 맛을 다채롭게 하는 것이라고. 삼해소주의 재료는 쌀, 물, 누룩 세 가지로 단순하지만 누룩균의 다양한 미생물이 매운맛, 신맛, 짠맛, 쓴맛 등 이 어우러진, 시인의 눈물처럼 함축적인 맛을 완성하는 것이다.
늦은 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오장환의 시집을 펼치고 삼해소주를 따른다. 삼해소주를 마실 때는 별다른 안주 거리가 필요하지 않다. 쓰고 독한 첫 모금 뒤로 이어지는 달고 깊은 두 번째 모금을 안주 삼아 천천히 넘길 따름이다. 입술부터 뜨겁게 타오르며 혀와 목울대를 태우고 내려가 가슴 깊은 곳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열기. 시인의 눈물방울 같은 삼해소주를 한 모금씩 삼키며 오래전 그날 시인이 흘린 눈물을 다시 읽는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혜나(소설가)
소설가. 장편 소설 『제리』로 제34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청귤』, 중편 소설 『그랑 주떼』, 장편 소설 『정크』, 『나의 골드스타 전화기』, 『차문디 언덕에서 우리는』이 있다. 제4회 수림문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 요가 지도자 과정을 이수한 뒤 인도 마이소르에서 아쉬탕가 요가를 수련하고 요가 철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