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방치와 학대 속에서 좀처럼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했던 소녀가, 친절과 환대 속에서 말없는 자신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아이의 침묵은 같지만, 침묵하는 마음은 전혀 다르다. 이 조용한 변화를 두고 아직 살아갈 날이 무궁한 한 사람의 생애를 바꿔놓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말하지 못함과 말하지 않음의 차이는 무엇이길래 이렇게 소박한 감동을 만드는 것일까. <말없는 소녀>는 내가 속한 현실이 자주 가리려 애쓰는 침묵의 풍경들을 찬찬히 밝히면서, 때로는 가장 조용한 영화가 가장 할 말이 많은 영화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이 꿋꿋한 영화가 끝날 때쯤 나는 평범한 한 인간이 자기 곁의 또다른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당연한 호의와 선량함의 가능성까지 배우게 되었다.
코오트(캐서린 글린치)는 좀처럼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아홉살 인생을 살아왔다. 잉글랜드인 아버지와 아일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시골 농장에서 살아온 소녀에겐 경제적 궁핍만큼 곤궁한 내면을 가진 부모의 신경증이 익숙하다. 알콜 중독이 분명해 보이는 아버지, 가사와 육아에 이미 영혼까지 소진되어 가부장의 불합리에 투쟁할 기력을 잃은 어머니 사이에서 아이 '코오트'는 언어를 버리고 무력해지기를 자처한다. 어떤 아이들은 자신을 소거하는 방식으로 겨우 살아남는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오라는 먼발치의 불호령에 아랑곳 않고 풀숲의 잎사귀 아래에 몸을 숨긴 말없는 소녀는 그대로 희미하게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막내를 임신한 엄마의 출산이 임박한 어느 때, 형제들 중 그나마 얌전한 코오트는 여름 동안 친척집에 맡겨진다. 이런 영화에서 우리는 '맡겨진 소녀', 그것도 말이 없어 자신의 안위를 강력하게 피력하기 힘들어 보이는 소녀가 학대당하거나 억울한 상황에 놓이는 상황을 어쩐지 쉽게 연상할 수 있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말없는 소녀>는 관객을 얼마간 당혹시킬만큼 인간적인 친절과 보살핌의 미덕을 보여준다. 원작 소설 『맡겨진 소녀(Foster)』의 작가인 클레어 키건이 묘사한대로 코오트가 살게된 에이블린과 션 부부의 집에선 '하루하루가 전과 똑같이 흘러간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는 방어 기제로 침묵을 고수하던 이 소녀는, 어느 말없는 중년 부부의 침착한 환대 속에서 그들을 천천히 알아갈 수 있는 기회 속에 놓인다. 소통이 범람하다 못해 수사와 설득의 기술이 팽배하는 이 시대에 1981년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하는 <말없는 소녀>의 침묵은 작은 웅변으로도 다가온다. 불안이나 의심에 잠기지 않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과 거리가 관계를 쌓고 있어서다. 긴장 속에서 첫날밤을 보낸 소녀 코오트가 밤새 침대를 오줌으로 축축하게 적셨을 때 에이블린은 "매트리스에 습기가 찬 모양"이라고 작게 속삭여주고, 농장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코오트를 꾸짖었던 션은 다음날 크림이 가득 든 과자 한 개를 코오트가 앉은 식탁 끄트머리에 비스듬히 올려놓고 출근한다. 1.37:1의 화면이 채집하는 이 작고 다정한 제스처들은 어린아이의 마음 속에서도 차곡차곡 쌓여 서서히 콜라주를 이룬다. 얼어붙었던 소녀의 마음이 따뜻한 심장의 모양으로 다시 조형되어가는 이 시기에 관해 소설은 이렇게 쓴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코오트의 새 일상에 깃든 고요함은 에이블린과 션 부부의 침착한 성정에서 우러난 것이지만 영화는 그중 일부가 부부에게 닥쳤던 상실의 잔여물이라는 사실도 넌지시 알려준다. 마을 장례식에서 만난 이웃에게 잠시 맡겨진 코오트는 에이블린과 션 부부에게 아들이 언젠가 비극적인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코오트가 한동안 입었던 어린 아이의 옷이 죽은 소년의 것임도 알게 된다. 아이일 때 우리는 어떤 비밀을 아는 체 하기 부끄러워 짐짓 숨기고 있기도 하고 비밀의 무게가 버거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의 옷깃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말하지 못하는 상태가 익숙한 시절의 코오트였다면 영영 모른 체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코오트는 배려심 없는 이웃의 폭로에 근심이 깊어진 어른들의 눈길을 받으며 자신이 들은 것을 하나 하나 다시 짚어 말한다. 대사가 드물다시피 한 이 영화에서, 에이블린과 션이 겪어야 했던 상실의 고통이 코오트에 의해 다시 또박또박 진술되는 장면은 억제되어 있던 어느 부모의 슬픔이 아이의 목소리를 빌려 허공에 풀려나는 순간처럼 보인다. 그들은 서로 준비되지 않은 시점에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을 지킨다. 밤의 해변에서 션의 어깨 너머로 반짝이는 세 개의 등대에 감응하고 에이블린의 손길을 따라 맑은 우물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 코오트를 기쁘게 한다.
삶은 따뜻함과 경이, 사랑으로 채워져 있으면서 동시에 상실과 고통 역시 동반할 수 있다. 둘은 상호배타적이지 않다. 침묵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듯 우리는 자신의 친절을 숨기거나 아낄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관대함과 선량함을 베푸는 일로 시혜자가 되기보다는 상대의 가족이나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말미에 코오트는 션과 농장으로 향하는 길에 틈틈이 갈고닦은 달리기 실력을 발휘해, 코오트를 부모에게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션과 에이블린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려나간다. 카메라를 향해 근접해오면서 요동치는 소녀의 실루엣은 이 영화에서 여느 때보다 밝고 찬란한 햇살속에서 반짝거린다. 그리고 저 멀리 원경에서 코오트를 쫓아오는 아버지의 무서운 걸음은 아웃 포커싱되어 심도가 얕아진 화면에 의해 느릿하고 희미한 움직임으로 점차 증발되어 버린다.
영화는 평온한 애정을 경험한 소녀가 제 발로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달리기로 문을 닫는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억압의 침묵과 행복의 침묵, 그리고 이별의 침묵까지 보여주는 이 작품이 끝내 각인시킨 것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힘찬 몸짓이었다. 갈 곳 없는 아이와 선량한 어른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관계는 변하고 만다. 사랑의 압도적인 세례로 인해, 그들은 어느새 서로의 보호자로 거듭나 있다.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소맹
2023.12.11
카민
2023.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