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 겪은 문맹의 시간을 거쳐, 두 언어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글을 써 내려가는 신유진 작가의 새로운 산문집 『상처 없는 계절』은 성실히 읽고 쓰는 삶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사람들, 자연과 함께하는 현재를 보여준다. 타인을 세심히 살피는 시선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돌보게 되는 글쓰기의 놀라운 경험을 고백하는 작가는, 누군가에게로 보낸 말을 기꺼이 다시 맞이하면서 ‘나’와 ‘당신’을 순환하는 글을 이어간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더듬더듬 나아간 그의 문장들을 읽으며 치유의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간단한 책 소개와 출간에 대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상처 없는 계절』은 읽고 쓰고 옮기는 삶을 통해 상처를 다루는 방식을 찾아나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책이 출간될 때마다 긴장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마음이 먼저인 것 같아요. 저는 아직도 제가 쓰는 삶을 산다는 게 믿어지지 않거든요.
제목 ‘상처 없는 계절’은 굴곡 없이 순탄한 삶이라기보다는 많은 상처를 겪어낸 사람의 오늘, 더 이상 상처가 아니게 된 순간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실제로 책에는 상처의 기억들이 자주 등장하죠. 인종차별과 가난, 홀로 견뎌야 했던 고독한 시기들이 그러한데요. 그 시간들을 마주하고 있던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어떨까요. 기억을 글로 환원하는 과정이 작가님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지 궁금합니다.
굴곡 없는 삶이 있을까 싶어요. 모두 그렇듯이 저 역시 상처를 주고받고 만들며 살아왔는데요. 저에게는 상처를 받는다는 표현보다 만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아요.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일도 상처로 만든 게 아닌가 할 때가 많거든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상처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상처를 이해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건 무뎌지는 것과는 조금 다르죠. 기억을 쓰면서 되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쓰는 행위를 통해 기억을 다시 살아볼 수 있고, 다시 살아보고 나면 조금은 다른 내가 되어 있더라고요. 그렇게 상처를 무늬로 만드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 같아요. 저는 표백된 하얀 세상이 아니라 무늬 가득한 세상을 만들며 살고 싶어요.
첫 번째 글 「언젠가의 봄」에는 ‘기공’을 배웠던 일화가 있어요. “내 안에 깊은 굴을 파고 그 속으로 들어갔던” 시절의 일이죠. 기공을 통해 그 굴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요. 요즘 새롭게 관심을 두게 된 취미나 일들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저의 유일한 취미는 산책이에요. 새벽에 반려인과 반려견과 함께 해 뜨는 것을 보는 게 하루의 위안이고요.
「어둠 속에 있다」 글에서 “글쓰기가 문장을 무덤 속에 파묻으며 언젠가 그것이 집이 되기를 희망하는 일이라면, 번역은 누군가 단단하게 세운 집을 부서뜨리고 그것의 잔해를 옮겨 와 재건하는 일”이라고 글쓰기와 번역을 구분해 정리해주셨는데요. 반대로 글쓰기와 번역이 맞닿은 지점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추가로, 각각의 작업 스타일도 알고 싶어요.
글쓰기와 번역이 맞닿은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죠. 그것을 정확히 알고 옮기고 쓰는 이들의 번역과 글은 늘 동경의 대상이고요. 지금 저는 그게 무엇인지 막연히 알고 있을 뿐, 아직 언어화가 되지 않아요. 경험과 노력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확실한 것은 번역도 글쓰기도 고강도의 노동이라는 것이죠. 엉덩이 힘으로 쓰고 옮긴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주로 새벽에 글을 써요. 일어나면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바로 쓰기 시작하죠. 망설이는 시간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해요. 생각이 많아지고 망설임이 길어지면 직관을 잃어요. 저에게 직관은 중요한 요소거든요. 일단 쓰고, 반복해서 읽고 고쳐요. 퇴고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이죠.
번역 작업은 주로 오후나 저녁에 하는데, 하루에 해야 할 분량을 정해놓고 해요. 번역할 때는 작가의 영상이나 라디오를 들으면서 표정이나 목소리를 반복해서 보고 듣죠. 작가의 말투나 호흡 방식을 흉내 내며 글을 읽어보기도 하고요. 그게 저에게는 도움이 되더라고요. 일단 문장의 음악이나 리듬을 상상해볼 수 있고, 또 그 작가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면 재미있으니까요.
반려인과 운영하고 있는 카페 ‘르 물랑’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카페 안에 작업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고요. 카페는 어떻게 해서 시작된 건가요? 앞으로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하시는지도 궁금해요.
반려인은 아홉 살 때부터 연극을 했어요. 한국에 올 때만 해도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고, 외국인 학교에서 연극 수업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모두 취소됐어요. 일을 조금씩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연극인, 번역가, 작가. 이 직업들을 다르게 표현하면 비정규직이죠. 언제부턴가 고정적인 일이 없다는 게 자유보다는 불안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대화를 나눴죠. 우리가 그리는 미래에는 늘 어떤 ‘공간’이 있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싶은 일들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요. ‘르 물랑’은 카페이긴 하지만, 독서 모임도 하고, 공연도 하고, 북토크도 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희곡 낭독회, 연주회 계획도 있고요. 저희가 좋아하는 것들을 이곳에 하나씩 담아가려고 합니다.
책 속에서 작가님 주변을 둘러싼 타자들과 나누는 특별한 말들이 인상 깊었어요. 반려인과는 ‘사랑사랑’ 부는 봄바람이, 반려견 이안이와는 ‘안 돼’가 있죠. 요즘 새로 생긴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반려인은 카페를 하면서 한국어 실력이 부쩍 늘었어요. 요즘은 자꾸 아재 개그를 시도해요. 아재 개그는 세계 공용인 거 아세요?
이안이는 청년 강아지가 됐어요. 그래서 이제는 자꾸 저를 지키려고 해요. 얼마 전에 몸이 조금 안 좋았는데, 이안이가 침대 옆에 앉아 저를 지키더라고요. 이안이는 저에게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가르쳐줘요. 너무도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죠.
이번 책에는 유독 읽는 이를 적극적으로 떠올리는 글들이 많은 것 같아요. 책머리에 글 「계절 인사」에서는 ‘거기’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기도 했죠. 책을 쓰면서 어떤 독자를 상상하곤 했는지 궁금하고요. 마지막으로 『상처 없는 계절』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독자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어요. 그래서 이제 저에게 독자는 구체적인 얼굴이고, 표정이고, 몸짓이죠. 예전에는 같은 계절을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만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서로 다른 계절을 살고 있어도 만날 수 있죠. 내가 건너온 계절의 기억으로, 내가 가닿고 싶은 계절의 희망으로.
제 책을 읽어주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언제나 이것뿐이에요.
고맙습니다. 자주 기쁘고, 늘 평안하시길.
*신유진 작가이자 번역가. 파리 8대학에서 연극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옮긴 책으로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 『남자의 자리』 『세월』 『사진의 용도』 『진정한 장소』, 에르베 기베르의 『연민의 기록』, 마티외 랭동의 『에르베리노』, 티아구 호드리게스의 『소프루』와 엮고 옮긴 프랑스 근현대 산문선 『가만히, 걷는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생텍쥐페리의 문장들』이 있으며, 산문집 『창문 너머 어렴풋이』 『몽 카페』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 소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를 지었다. |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