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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대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소설, 『딜리트』

『딜리트』 설재인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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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용. 이 공간이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결국 이 재단에게 학생 역시 관상용이 아닐까. 좋은 모습이 아니면 교체해 버리는 게 나은. 죽으면 흉하니까 얼른 치워 버려야 하는. (2023.08.03)

설재인 작가 (ⓒ Melva)

2019년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로 한국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장르를 넘나들며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 설재인 작가가 파격적인 작품으로 돌아왔다. 『딜리트』는 외고 교사 출신인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으로, 어른들의 강요와 압박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는 두 소녀의 이야기다. 나란히 붙어 있는 두 학교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한 진로를 견디다 못해 살기 위해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진솔과 해수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십 대들이 겪는 아픔과 분투를 선명하게 엿볼 수 있다.



『딜리트』는 학교에 속해 있거나 속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픈 마음으로 공감하게 되는 작품 같아요. 학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거침없이 그려내셨는데, 쉽지 않은 이야기를 선보이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사실 제가 이른바 평생직장이라는 학교를 그만두는 과정에 혼자만의 고민이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아주 큰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고, 특히 유독 힘들고 아무것도 이해를 하지 못하겠던 해에 저는 매일같이 자살을 생각했어요. 죽기 싫어 나왔지만 모든 일들을 한곳에 응축해 쓰기엔 저의 역량이 부족했고, 결국 소설에 조각내어 심었습니다. 『딜리트』는 그 조각 중 하나인데, 크기가 좀 큰 편입니다. 그래도 그간 꽤 소설을 발표했으니 이 정도의 무게는 감당할 수 있어야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 두 학교'라는 배경이 묘하게 현실적인 것 같아요. 실제로 어딘가에 있을 법한 학교의 모습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이런 장소를 생각하시게 되었나요?

사학 재단의 경우, 비슷한 이름 아래 여러 유형의 학교를 운영하곤 합니다. 그리고 일반 공립 학교와는 다르게 상상을 초월하는 장소적 특성을 가지는 경우도 많지요. 예컨대 학교의 부지가 점점 줄어든다거나, 2010년대에 에어컨 없이 수업을 듣는 일도 있었고요. 그러니 만약 사립 학교에 대해 쓰고 싶으신 작가님들이 있다면 혹 비현실적인 건 아닐까 주저하지 마세요.

학교생활을 힘겹게 버티는 진솔과 해수가 다른 공간도 아닌, 학교 안에 있는 지하 통로를 아지트로 삼는다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둘만의 공간을 '지하 통로'로 설정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학교'라는 용도를 가진 건물에서 지하는 보통 가시화되지 않는 공간입니다. 옥상은 이런저런 작품들을 통해 로맨틱하게 묘사되고는 했지만 사실 일선 학교에는 옥상보다 지하의 공간이 훨씬 많아요. 다만 학생도 선생도 갈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이 작품을 쓰면서 아무리 음습하고 아무리 어둡다 하더라도 그 어떤 사람에게 방해받지 않는 공간을 생각해야 했기에 자연히 지하를 떠올리게 되었어요.

진솔과 해수의 부모님이 갑자기 사라지고 난 뒤에 유령으로 다시 등장하는데요. '유령'에 담긴 특별한 의미나 숨겨진 뜻이 있을까요?

최근에 SNS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식이 부모를 훨씬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완벽히 동의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사람 대 사람의 차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요구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하곤 하죠. 합리하지 않은 부모만의 사고방식을 절대 거역하지 않을 것, 이루지 못한 욕구를 채워줄 것 등 말이죠. 그 과정에서 제3자에게는 절대 주지 않는 상처들을 자식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주고요. 그런데 자식들은 부모에 대해 자주 자책감에 시달려요. 내가 저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게 서럽고. 진솔과 해수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유령은 '자신들이 나쁜 자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진솔과 해수의 자책감을 반영한 장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야기 내내 쌓여온 갈등이 결말에 이르러 어느 정도 해소되긴 하지만 완전히 해결되진 않는데요.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말을 이렇게 꾸리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청소년 독자였을 때, 일부 청소년 소설의 해피 엔딩이 정말 싫었어요. 잔뜩 몰입해서는 같이 화내고 슬퍼했는데, 갑자기 화해 모드로 바뀌어서는 지금껏 주인공을 죽도록 괴롭혀왔던 모두가 별안간 착해지고 뉘우치는 거예요. 맥이 탁 풀려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소설에서든 이른바 해피 엔딩 혹은 완전무결한 엔딩을 기피하려 노력하곤 합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딜리트』를 대표하는 문장이나 장면은 무엇인가요? 이를 손꼽으신 이유도 들려주세요.

후반부, 텅 빈 교장실에서 어항 물이 넘쳐 바닥에 떨어져 몸부림치는 열대어들을 아이들이 다시 어항에 넣어주고, 선배가 '진수건설'이라는 이름이 적힌 유니폼 재킷으로 어항을 살짝 덮어줍니다. 그 장면 뒤에 이런 구절을 썼어요.

이 방의 주인에게 열대어는 아주 쉽게 교체될 수 있는, 별로 소중하지 않은 생명일 테니까. 죽어 버린 학생들처럼. 열대어의 삶은 하나도 중요치 않은 것이다. 관상용. 이 공간이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결국 이 재단에게 학생 역시 관상용이 아닐까. 좋은 모습이 아니면 교체해 버리는 게 나은. 죽으면 흉하니까 얼른 치워 버려야 하는.

그 에피소드와 이 문장들에 제가 하고 싶던 모든 말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고 있는 십 대들에게 응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오늘 눈물이 나는 이유는 참을 수 없어 고장 나기 직전인 까닭이니, 걷어차 보세요.



*설재인

대학에서 수학 교육을 전공하고, 한때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2019년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딜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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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재인 저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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