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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을 꿈꾼 여성들의 이야기

『규방의 미친 여자들』 전혜진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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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진 작가가 쓴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이렇듯 당대 여성들의 소망이 투영된, 가부장제라는 이름의 '여성 잔혹사'에 당당히 맞선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주인공들을 여성 영웅으로 해석한 책이다. (2023.08.08)

전혜진 저자

여성들이 가부장제에 짓눌려 있었던 조선 시대에조차, 책을 읽고 이야기를 전하던 여성들의 머릿속은 마냥 얌전하게 세상에 순응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이 입에서 입으로, 방각본과 필사본으로 전해 왔던 이야기들 속에는, 규방을 나서고 안채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 모험을 거치고 돌아온 여성들과, 남장을 하고 가장 뛰어난 남자들보다 더 높은 성취를 이뤄낸 여성들, 사랑으로 세상에 균열을 낸 여성들이 있었다. 현실의 한계를 넘어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던 당시 여성들의 소망은, 고전 속 여성 주인공들의 모습 속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전혜진 작가가 쓴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이렇듯 당대 여성들의 소망이 투영된, 가부장제라는 이름의 '여성 잔혹사'에 당당히 맞선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주인공들을 여성 영웅으로 해석한 책이다.



『규방의 미친 여자들』이라는 제목이 강렬합니다. 최근 『여전히 미쳐 있는』이란 후속작이 나온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 『다락방의 미친여자』가 연상되는데요.

『다락방의 미친여자』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다락방에서 작은 촛불에 의지해 글을 쓰는 여성이나, 제인 에어나 『작은 아씨들』의 주인공 조 마치, 혹은 감금되어 있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의 경우라면 다락방이 아니라 바깥의 시선에서 가려진 여성의 공간, 안채와 규방이었을까요. 규방 밖으로 나간 여성 주인공들과, 규방과 안채에서 현실을 뛰어넘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나누던 여성들의 존재를 독자들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올해에만도 단독 저서 2권을 비롯해 총 4권의 책을 냈다고 들었습니다. 직장이 따로 있고, 아이도 키우신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속도인데요. 이 정도면 '곽재식 속도' 말고 '전혜진 속도'가 필요할 것 같은데, 다작의 비결은 뭔가요?

특별한 일은 아니죠. SF 분야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글을 쓰는 작가님들이 많이 계시고, 육아 역시 수많은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들이 겪어왔던 일이니까요. 그냥 컨디션에 상관없이, 퇴근하고, 아이들과 같이 놀거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책을 같이 읽은 뒤에는, 일단 무조건 책상 앞에 앉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고, 또 아이들이 자다 깨서 무릎에 올라오면 언제든 중단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특별한 루틴이나 마음가짐은 없어요. 시간이 있으면 책상에 앉는 것, 그게 아니면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만화와 웹툰, 추리와 스릴러, 사극, SF와 사회파 호러, 논픽션 등 매체와 장르를 넘나들며 여성의 삶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그 말처럼 장르를 종횡무진하면서 다양한 글을 쓰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게 되셨나요?

애초에 장르를 생각하지 않고 글을 썼는데, 어떤 것은 라이트 노벨이 되고, 어떤 것은 SF가 되고, 어떤 것은 호러가 되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들도 대부분은 특정한 장르를 딱 정하고 시작하지는 않았어요. 살면서 궁금하고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들을 들춰보고 공부하다가 비소설도 이것저것 쓰게 되었고요. 만화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이야기들은 글의 형태가 아니라 콘티의 형태로 머릿속에서 윤곽이 잡히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은 만화로 만들기 좀 더 수월하죠.

『여성, 귀신이 되다』『은하환담』처럼 이전부터 한국의 설화나 고전 소설을 소재로 다양한 책을 써오셨습니다. 언제부터, 왜 우리 옛날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애초에 데뷔작인 『월하의 동사무소』부터 전래의 귀신들을 소재로 했으니까요. 어렸을 때는 윤승운 선생님의 『맹꽁이 서당』이나, 김삼 선생님의 필기·야담 소재 만화들도 읽었고, 또 계림문고 같은 학급문고에도 다양한 옛날이야기가 있었고요. 다들 옛날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나요? <삼국유사>에는 신라 헌강왕의 앞에 산신이 나타나서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 즉 지혜로운 이들은 도망치고 도읍은 파괴될 것이라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이야기가 나와요. 나라가 망하기 전에 신이 미리 알려주는 노래인데, 왕은 신이 나타났으니 상서로운 일이라며 춤을 따라 추고 즐거워하죠. 정말 찜찜하고 기분 나쁜 이야기죠. 옛날이야기 중에서도 처음 봤을 때 무섭고 슬프고 기분 나쁘고 찜찜한 이야기들은 특히 기억에 오래 남아요. 그런 것들이 지금, 현실의 이야기들을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할지에 대한 단서를 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규방의 미친 여자들』에서 다양한 신화와 고전 소설을 다뤘는데 특히 마음에 드는 작품, 혹은 여성 영웅을 고른다면요?

사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건 역시 <박씨전>과 <홍계월전>이었습니다. <박씨전>의 박씨는 얼굴은 못생겼지만 지혜롭고 도술을 부리고 앉아서 천 리를 내다보는, 마치 제갈량의 부인 황씨 같은 사람이죠.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못생긴 얼굴이 3년 뒤 허물이 되어 벗겨지는 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것은 결혼해서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지내야 한다는 3년간의 적응기일까, 아니면 미래를 알고 신이한 능력을 지닌 선계의 사람이 조선을 돕기 위해 인간 세계에 내려오며 입게 된 핸디캡 같은 것일까...

<홍계월전>은 이야기 자체는 전형적인 군담소설인데, <홍계월전>이 전형적인 군담 소설과 다른 점은, 중간에 간신에게 모함을 당하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한다는 점이에요. 사실 홍계월의 남편인 보국은, 계월이 남자인 줄 알았을 때는 서로 믿고 목숨을 걸던 사이였지만, 계월이 여자인 게 밝혀지고, 자신과 결혼을 하니까 온갖 못난 추태를 다 부리죠. <홍계월전>의 이 대목은, 여자가 결혼을 해서 남편에게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그 상황 자체가 남성 영웅이 나라를 말아먹을 간신에게 모함을 당하고 유배를 가는 것 못지않게 괴롭다는 이야기인 거였어요.

'한국 페미니즘 SF의 기수'라고 할 만큼 그동안 여러 소설에 페미니즘적인 메시지를 담아오셨습니다. SF가 아닌 여러 논픽션에서도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가려진 여성들의 삶을 꾸준히 이야기하셨고요. 여성 창작자이자 워킹 맘으로서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페미니즘은 무엇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여자인 제가 여자의 이야기를 쓰던 것이 페미니즘과 연결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제가 쓰는 글의 뿌리는 말하자면 한국 순정 만화에 많이 걸쳐 있는 편입니다. 사실 순정 만화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여성 작가가 그리는 만화, 혹은 순정 만화 잡지에 연재된 만화'를 통칭하는 말이기도 했어요. 특히, 1990년대 한국 순정 만화는, 여성 작가가 순정 만화 잡지에 연재한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SF나 판타지, 혹은 사극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그 시대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었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어떤 세계의 여성이나 소수자가 받는 차별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면, 결국은 페미니즘이나 인권 문제에 닿게 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든, 혹은 비틀어 표현하든, 아예 가상의 역사를 만들거나 먼 미래로 날려버리더라도요. 최근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온,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오오쿠』도 그렇죠. 어떤 사정으로 도쿠가와 막부에서, 3대부터 여성이 쇼군이 되었다는 설정이지만, 여성이라고 더 현명하거나 자비로운 것도 아니고, 역사 자체는 실제와 거의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쇼군과 막료가 남성 이름을 쓰는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이야기는 수많은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어떤 세계의 차별에 대해 생각하며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단 한 가지를 바꿨을 뿐인데도, 그 세계는 물론 현실의 모순까지 생각하게 하는 것.

여성 서사가 주목받는 이 시점에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1990년대 말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사실 1990년대는 IMF가 터지기 전까지 많은 페미니즘, 여성학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학을 중심으로 나오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이전에도 여성 운동은 있었습니다. 이희호 선생님은 한국 1세대 여성 운동가로 여성 인권을 위해 일하셨던 분이고, 그 배우자인 김대중 대통령도 그분의 영향을 받아 차별 금지법이나 성평등에 대한 생각들을 이야기하고, 여성부를 만들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이 흐름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그 이전의 역사들을 간과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렇고 1990년대에도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가 시작점이고 선구자'라는 생각은 당장 기분은 뿌듯해도, 이전의 시행착오까지 되풀이하는 문제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는, 그 이전에도, 더 옛날에도, 여성들은 길을 떠나고, 여기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아내고, 높은 안채의 담을 벗어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말할 날을 꿈꾸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것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당시의 여성들이 생각했던 더 나은 세상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이 될 권리를 요구하고, 안전할 권리를 요구하고, 거리로 나서고 SNS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요. 우리가 부침 속에서도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 온 그 긴 흐름 속에 있는 거라면, 우리가 그다음으로 반드시 나아가리라는 믿음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전혜진

SF 작가이자 만화 스토리 작가. 『월하의 동사무소』로 데뷔한 이래 만화/웹툰, 추리와 스릴러, 사극, SF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을 쓰고 있다.




규방의 미친 여자들
규방의 미친 여자들
전혜진 저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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