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책의 날 특집 – 국경을 넘는 한국 문학
함께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문학, 특히 여성 작가들의 책이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해외의 다양한 독자와 만나는 모습을요. 언어의 장벽을 넘은 책은 어떤 모습으로 독자들에게 닿고 있을까요? 국경 너머의 독자들과 연결되는 경험, 그 환대와 오해, 얽힘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나는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숫자의 언어도, 법의 언어도 내게는 어려워서 제하고 나니 언어 그 자체가 남았다. 그중 영어를 고른 건 어문학 전공 가운데서 더 보편적인 것, 활용도가 높은 쪽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선택의 결과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점은 언어의 힘이자 문화의 힘으로 보였다.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지는 넓은 세계는 항상 여기 아닌 어딘가였고, 나는 빠르게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싶었다(나중에 대학 생활 동안의 배움을 돌아보니 17세기 문학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보편에 대해서도 빠름에 대해서도 영문학에 대해서도 겹겹의 오해가 있었다). 이게 다 옛날 옛적, 그러니까 ‘월드 와이드 웹’이 이제 막 생겨난 발명품이던 1990년대 극동아시아 대학생 관점의 이야기다. 수업보다 열심이던 학교 바깥의 일들 가운데는 일본 잡지 찾아 읽기도 있었는데, 그쪽은 확실히 유행을 빠르게 보여주었다.
문과 전공에 잡지를 좋아하다 보니 어쩌다 취직도 잡지사 에디터로 하게 되었다. 10년 이상 가장 오래 일한 곳은 라이센스 패션 매거진이었다. 뉴욕에 있는 미디어그룹인 본사의 이름을 대면 까다로운 취재 대상에도 다가가기가 쉬웠다. 해외로 취재 출장을 자주 다니기도 했으며 본지에 실리는 유명한 영화 배우나 떠오르는 예술가의 인터뷰, 근사한 여행지나 미술 박람회의 기사 등에 단어 당 사용료를 지불하고 번역해서 한국판에 게재하기도 했다. 이런 걸 잡지사에서는 ‘리프트’ 기사라고 불렀다. 리프트 (lift). 높이 들어 올려서 다른 위치로 옮겨놓는 일. 이식(移植)은 언제나 저쪽으로부터 이쪽으로였다.
책이 나오고 나면 하루 아침에 세상이 변할 거라는 상상은 아직 첫 책을 내기 전인 작가들이 갖기 쉬운 순진한 착각이라고들 한다. 스스로에게는 삶의 큰 부분인 이야기를,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꺼내놓는데 세상은 의외로 조용하다. 바다에 물방울 하나를 더한 것처럼 변함없는 풍경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답이 즉각 들려오지 않을 뿐, 바다의 성분은 천천히 바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흘려보낸 작은 일상도 생각보다 멀리 가서 파도가 되어 돌아왔다. 책을 내고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에서 나 역시 순진한 초보 작가였다. 2019년 김하나 작가와 공저로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이하 여둘살)를 냈을 때는 이 책의 운명을 전혀 몰랐다. 『여둘살』은 대만, 일본, 중국에서 그 지역 언어로 출간되었으며 2025년 중에는 영국의 펭귄 랜덤하우스와 미국 하퍼콜린스에서 각각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당연하게 번역의 도착 지점에서 읽고 있던 내 처지에, 쓰는 사람이 되고 나서 역전이 벌어졌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이던 해에는 에디터로서 취재하러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관심을 받는 건 어디까지나 ‘문학’ 작가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영미권 판권 계약이 성사되고, 펭귄 출판사 홈페이지의 작가 목록에, 그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걸 봤을 때의 기분은 현실이 어딘가 일그러진 느낌이었다. 오랜 시간 학생으로서 영미 문학을 공부하고, 독자로서 영미권 에세이 장르를 가장 즐겨 읽고, 직업인으로서 본지의 텍스트를 옮겨 소개하다가 갑자기 작가로서 타 언어 사용자들에게 내 글을 읽히게 된 것이다. 나라는 개인이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다는 뿌듯한 성취의 감각보다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어지러움에 가까웠다. 조금 멀미가 나기도 하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더 멀리까지 속도를 높여보고 싶다는 느낌이랄까.
지난해 11월에는 도쿄 진보초에서 열린 K북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북토크 무대에 섰을 때 듀오링고로 연마해 온 일본어를 활용해 인사를 건넸다. 서툴지만 자신들의 언어를 배워와 인사하는 외국 작가에게 청중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다른 언어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덜컹거림이 발생한다. 통역이나 번역을 거칠 때 언어나 문화의 차이 때문에 다 담지 못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전해야 하는 표현도 있거니와, 외국어를 배워서 직접 말할 때도 낯설고 서투르기에 모국어를 사용할 때처럼 능숙하게 거리 조절을 못 해서 벌어지는 흥미로운 충돌들이 발생한다. 내가 일본어로 건넨 인사의 덜컹거림을, 일본의 독자들은 귀여운 호의로 받아들여 준 것 같다.
이어진 3일 동안의 행사에서 그들을 직접 대면하면서 받은 인사말과 표정과 일본 과자들의 다양함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한국에서도 독자들에게 내 책을 좋아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표현은 다양하게 들어왔다. 그런데 일본 독자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이 책은 내 삶을 구원했습니다.” “『여둘살』을 읽은 뒤에 나로서 살아가는 일이 편안해졌어요.” “작가님의 글은 제 삶이,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었고, 제 인생을 위로했습니다.” 눈 앞의 독자들은 분명 수줍음이 많고 조심스러운 사람들로 보이는데, 공부해 온 한국어로 또박또박 전하거나 번역기를 돌려서 휴대폰 화면으로 보여주는 그 말들은 솔직하고 강렬했다.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면 세련되게 고개를 까딱이고 악수를 건네는 정도로 호감을 표할 수도 있을 사람들끼리, 언어의 간극이 있기에 오히려 덥석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해버리는 것처럼.
그 며칠 나를 둘러싼 외국어의 덜컹거림은 나를 통통 높이 띄워 헹가래 쳐주는 것 같았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도 갖고 다녀서 책이 이렇게 낡았어요. 이 책은 나에게 오마모리(お守り)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오마모리’란 일본의 부적이라고 했다. 소원을 이루거나 행운을 기원하는 의미로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보호받는다는 믿음으로 소중하게 챙기는 물건이라고. 작가로 살기 시작하면서 책은 나를 소개하는 명함이고, 내가 지나온 시간의 글로 된 앨범이며, 많은 사람들과 연결해 주는 인연의 통로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책이 부적이 될 수 있다는 건 일본 독자 한 사람을 통해 처음 알았다. 미국이나 영국, 또 영어로 글을 읽을 수 있는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자들에게 내 책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흐름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발견, 문화의 중심과 주변의 중력이 이동한다는 의미 부여도 나 같은 X세대나 새삼스럽게 느끼는 감흥인지 모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같은 말을 들으며, 88올림픽 굴렁쇠 소년을 보며 자란 우리 세대 말이다. 한국도 또 다른 어디도 세계의 당연한 일부임을 느끼지 못했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세계적이어야 한다는, 누구 것인지 모를 기준에 맞추려 조바심 내던 시대가 있었다. 옆으로 넓어야 할 개념에 대해 이상한 최상급을 요구받던 시대가 있었다. 이 다음에는 누가 올까? 좀 더 나중의 작가들은 이런 초조함 없이 자연스럽게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고 경계를 허물거나 새로 짓지 않을까? 독특하게 뛰어난 한 개체의 출현이기보다 개인들의 물방울이 모이고 흘러 결국 크게 벌어지는 종의 진화, 지각의 움직임으로서의 변화를 예상해 본다. 마치 본토 팝의 구현, 미국 현지에서의 인정을 목표 삼던 박진영의 야심을 지나, “두 유 노우 싸이?”의 한바탕 소동을 지나, 제니가 코첼라에서 뜨거운 무대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출판사 | 이야기장수

황선우
작가이자 팟캐스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등의 책을 썼으며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 를 제작,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