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없는 상상력으로 독보적인 입지를 다져온 작가 차무진이 3차 고려거란전쟁을 배경으로 삼아 신비롭고도 웅혼한 이야기를 묵직한 장편소설로 풀어냈다. 『여우의 계절』은 고려가 외세의 조력 없이 가장 완벽하고 극적인 승리를 거둔 유일한 전투인 귀주대첩이 벌어지기까지의 스무 날 동안 구주성(귀주성) 주변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사건을 그린다.
『여우의 계절』이 나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고요?
2022년 당시 관악문화재단은 관악구의 청년 예술 문화를 지원하는 데에 열성적인 것으로 유명한데 아울러 강감찬 장군의 탄신지를 보유한 지역의 재단으로서 장군의 뜻과 충절을 기리는 문화 사업도 한창이었습니다. 재단 측에서는 저에게 장군에 관한 대중적이고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킬러 콘텐츠를 개발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하셨고, 곧이어 <창작만개> 사업의 일환으로 장편소설화 작업 지원을 결정해주었습니다. 저 또한 과거 귀주대첩에 관한 영상화 스토리를 개발한 적이 있었고, 2014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해인』 이후 더 진보한 팩션 서사를 작업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좋은 기회였지요. 당시 “’나를 따르라!’ 같은 사극 이야긴 싫어요, 귀주대첩이 있던 즈음의 흥미롭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쓰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재단에서는 제 당돌한 말에 더욱 기대해주셨습니다. 그들도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닌, 장르적 서사를 원했던 거지요. <창작만개> 사업은 웹툰이나 영상화 쪽은 많이 지원했지만 장편소설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들의 지원과 관심이 없었다면 이 책은 없었을 겁니다.
『여우의 계절』은 기존의 역사 소설과는 다르게 작가님만의 상상력이 더해져 살인귀 동생과 미래를 보는 언니 등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요.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역사 사실과 이론적 상상을 교합한 팩션을 쓸 때는 원형을 유지한 상태에서 변칙이 중요해요. 그래서 전 멀쩡한 형체를 허물고 일부러 때를 묻히는 짓을 종종 합니다. 작중 강감찬이라는 인물은 늘 원숭이탈을 쓰고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장군은 외모가 볼품없었다고 하죠. 소설에서 그 뜻을 이어받되, 강력한 변칙을 주어 흉측한 몰골의 가면을 씌웠습니다. 설죽화 또한 강감찬 장군이 등장하는 민담 설화 속 캐릭터를 좀 빌려다 썼습니다. 물론 소설 『여우의 계절』은 알려진 설죽화 설화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변칙한 측면이 있다고 보아야죠. 설죽화를 무녀로 설정하되, 기존 우리가 아는 동양 무속의 외피를 과감하게 벗기고 심령회와 부두교 냄새가 나도록 바꾸었습니다. 동양 중세의 깊은 자연과, 고려 북쪽의 척박한 땅, 그리고 우리의 것이면서도 변칙된 톤, 즉 오컬트적인 동양 미스터리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소설은 고려거란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소설 속에서 다룬 내용 중에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점이 있나요?
1019년 2월 1일, 구주성 앞 벌판에서 제 땅으로 돌아가려는 거란과 한놈이라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고려가 장대한 전쟁을 치렀고, 고려가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역사적 사실 외에는 전부 상상입니다. 『여우의 계절』의 서사는 매우 발칙하고 괴기스럽고 미스터리한 상상이죠. 고려 군영의 묘사, 성안의 묘사, 사건의 흐름들은 분명한 기록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역사책을 언급하자면 오직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만 보았고 나머진 철저하게 배제했어요. 이 끔찍한 이야기는 전부 구라(?) 입니다. 다만 이런 미스터리가 귀주대첩을 승리로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재미적 또 문학적 상상을 즐기시면 좋겠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강감찬은 어떤 인물인가요?
모든 기록에서 그는 추앙받고 있습니다. 혹, 이순신 장군을 험담한 왕이나 고위층이 있었을지언정 강감찬 장군을 험담한 자들은 없었을 만큼요. 그분의 대표 상품은 지략입니다. 영리한 분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아무리 뜯어봐도 대체 무슨 일로 지략을 보이신 건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어요. 『고려사』는 온통 칭송만 가득하고 민가에서는 설화와 전설만 가득하죠. 쇠가죽을 막고 강줄기를 터뜨렸다는 정도가 기록이라면 기록이랄까요. 구주성 대첩에서 지옥에서 온 사자와 같은 거란대에게 완벽한 패배를 선사한, 그래서 이후 100년 동안 고려에 평화의 치세를 가져다준 그분에게는 필시 우리가 모르는 필승의 지략이 수두룩했을 터이지만, 기록의 한계로 짐작만 할 뿐입니다. 기록은 빈약하고 전설만 가득한 그 영감님이야말로 제가 제멋대로 가지고 놀 만한 캐릭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빈 공간을 채웠습니다. 미스터리로요.
역사적인 사건이 배경이 되는 소설이다 보니 자료 조사도 많이 하셨을 텐데 어떤 자료를 참고했는지 궁금합니다. 어려운 점도 있으셨을 텐데요.
힘든 점은 고증입니다. 특히 우리 중세사 기록은 참으로 빈약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쓰면서 논문들을 의지했습니다. 초기 조선인의 삶을 연구한 자료도 참조했습니다. 그 시기까지는 고려 말의 문화들이 잔존해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리고 북한 연구자들이 기록한 자료들도 어렵게 구했습니다. 북계의 지형과 구주성의 생김새는 우리가 함부로 답사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온통 한자와 지도와 씨름하고 있더군요. 언젠가부터 고증에 목메지 말고 자유롭게 서사에 더 집중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고증도 중요하고 리얼리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플롯의 방식, 인물 간의 갈등, 인물이 사건 위에 올라타서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문장이 단순하거나, 사건이 재미 없다면 아무리 고증이 잘 되어도 의미가 없는 것이니까요. (역사 배경에서 충실한 고증은 매우 중요하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작가님도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드라마를 시청하시는 분들이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어떤 점을 포인트로 두고 읽으면 좋을까요? 감상 포인트를 알려주세요.
사실 한 편도 보지 못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일이 바빠서이기도 하고 더는 그 시대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이 작품을 쓰는 동안 너무 힘들었어서요. (웃음) 공교롭게도 비슷한 주제를 같은 시기에 들고 나왔는데요, 여요전쟁을 사람들에게 각인한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만든 제작진께 감사드리고, 또 드라마가 나오기 전부터 여요전쟁의 이야기를 개척하신 여러 작가들께도 경의를 표합니다.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은 전쟁의 막바지, 구주대첩이 진행되는 화수를 기대하시거나 기억하시고 이 소설을 읽어주세요. 소설을 읽고 드라마의 구주대첩을 보셔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같은 사실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야말로 팩션을 재대로 즐기는 거죠.
마지막으로 『여우의 계절』을 보시게 될 독자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1000년 전, 귀주성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여우의 계절』을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차무진 197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0년 장편소설 『김유신의 머리일까?』로 데뷔했다. 2017년에 『해인』을, 이후 『해인』의 세계관을 확장한 『모크샤, 혹은 아이를 배신한 어미 이야기 1,2』를 발표했다. 2019년에 발표한 『인 더 백』은 대중성과 문학성을 고루 갖추어 한국 장르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고 평가받았으며 출간 즉시 판권이 계약되었다. 그 외 『좀비 썰록』(공저), 『당신의 떡볶이로부터』(공저) 『카페 홈즈의 마지막 사랑』(공저), 『태초에 빌런이 있었으니』(공저) 등이 있다. 발표한 단편으로는 미스터리 격월간 문예지 [미스테리아]에 실린 「비형도」(13호), 「마포대교의 노파」(24호)가 있다. 2020년 빌런만을 심층 연구한 작법서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를 냈다. |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