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강연회]한국 교회, 지금 이대로도 괜찮습니까? -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김두식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종교든 한국에만 들어오면, 한국화된다는 것. 그러니까 가족주의 신앙이 되고, 기복신앙으로 탈바꿈한다는 것. 오래전 무속신앙을 믿던 습관 그대로, 교회로 절로 가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혹시 어제도 그러고 오지 않았던가?) 한번쯤 돌이켜보면서,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내가 가진 종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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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가 쓰고 싶어서 쓴 책이 아닙니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책입니다.(p.6)
책의 첫 장 머리말은 이런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누가, 왜, 무엇이 법학자 김두식 교수님으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책을 쓰게 했나?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나라다. 하지만 그 자유가 곧바로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자고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 전쟁이라 했다. 종교는 정치, 문화, 사회 등등과 함께 뭉뚱그려놓고 보면, 신문 카테고리의 한 목록일 뿐이지만, 개인적으로 헤아려보면, 종교는 결코 정치, 사회, 문화와 비중이 같을 수 없다. 종교는 개인의 삶과 훨씬 내밀하고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종교 자유 국가에서도 종교 얘기는 결코 함부로 꺼낼 만한 소재가 아니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혹독한 공격을 받거나 좋은 분위기 깨기 십상이다. 모든 종교가 결국엔 사랑을 설파하고, 소통과 평화를 주장하는데도, 종교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쉽게 소통되기 어려워 보인다. 이거 왜 그럴까?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종교든 한국에만 들어오면, 한국화된다는 것. 그러니까 가족주의 신앙이 되고, 기복신앙으로 탈바꿈한다는 것. 오래전 무속신앙을 믿던 습관 그대로, 교회로 절로 가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우리 혹시 어제도 그러고 오지 않았던가?) 한번쯤 돌이켜보면서,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내가 가진 종교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나 더. 그런데 대체 요즘, 왜 이렇게 뉴스에 종교 지도자들이 많이 보이는 걸까? 애석하게도 선한 일, ‘알흠다운’ 일로 비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의아하게도 자꾸 정치 뉴스에 등장하신다. 저 스님, 저 목사님 요즘 정치하시나? 돌이켜보면, 정치와 종교. 그다지 낯선 조합만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구분이 안 된다. 옷으로, 머리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는 것 외에 정치인과 종교인, 집단적으로 등장하는 그들, ‘소탕, 진멸, 붕괴, 축출’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들. 아무리 봐도 딱히 구분되진 않는다. 뭐가 문제일까?
이런 궁금증, 비단 나만 가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두식 교수님이 이 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들고 오자, 반응 사뭇 뜨거웠던 걸 보면 말이다. 교수님은 이런 얘기를 해보자는 거다. 피하고 싶었다는 말, 이해도 간다. 대한민국에서 종교 얘기. 사실 예민한 거니까. 자칫하면, 사회가 아닌 교회에서도 몰매 맞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아무나 못했던 얘기. 그래서 반갑다.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의 김두식 교수님께 들을 수 있어서 더 반갑다.
저자를 법학자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라는 책이 의외일지도 모른다. 이력을 보니, 교수님이 교회와 인연을 맺은 지 꽤 오래다. 오랜 시간 교회 속의 세상에 몸담고 있던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저자와 직접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특별한 시간, 지난 3월 19일, 합정동 양화진 책방에 마련되었다.
문제는 많은데 대책은 없어 보입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을 알고 나서 슬픔과 탄식을 느끼지 않을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이런 슬픔과 탄식 속에서 대부분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침묵하는 길을 택합니다. 기도 외에는 해법이 없다고 느끼는 까닭이지요. 그러다보니 교회 문제에 대한 침묵은 신실한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표지처럼 자리잡았고, 교인들은 갈수록 개인화, 파편화되어 갑니다. 교회 문제에 대해 교회에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문화를 깨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애통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는 분들은 지금 조용히 이 책을 덮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저는 애통하는 분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다음 책장을 열도록 하겠습니다.(p.33)
교회 이야기, 아직은 때가 아니다?
“계속 곱씹게 되고, 주위에 추천하게 됩니다. 아버님께 읽어보라고 권해드리면서, 목사님께도 한 권 사드리겠다고 했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시네요.”(ID: candymok) 오늘 이 자리, 참여 신청 사연을 소개하며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모인 참석자들은 공감하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마냥 우스운 얘기가 아니라는 것 역시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호기심에, 누군가는 간절함을 가지고 모인 자리. 청어람 아카데미의 양희송 실장님이 사회를 맡았고. “소박하게 모였으니, 하드코어로 진행하는 게 어떻겠냐(웃음)”며 저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는 김두식 교수님의 네 번째 책이다. 네 권의 책이 의미가 남다를 텐데, 이번 책은 어떤가?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에서도 교회 얘기를 많이 했다.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게 전도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오히려 교회 얘기를 할 때는 세상 얘기를 해서 책 제목이 맥락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평화의 얼굴』이다. 고민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얘긴데, 가장 안 팔린 책이다.(웃음)”
책을 쓸 때뿐만 아니라, 잡지의 사설, 칼럼에서도 반드시 존댓말을 쓴다. 읽기 쉽게끔 쓰면서도, 정확하게 말하고자 한다. 이런 글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책 많이 읽은 어머니가 계셨고. 나는 누나, 형 아래로 늦둥이다. 그렇게 자라, 형이 읽는 책을 같이 읽어왔다. 낮에 지강유철 전도사님과 인터뷰를 했는데, 어쩌면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못 하게 이상한 형이 있는데,(웃음) 형을 보면서 저런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컸다. 형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돌이켜보게 되더라. 형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미국 사람들은 다 반말을 쓰는데, 왜 영화관 자막을 보면, 남자는 여자에게 반말로 번역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존댓말로 번역하느냐고 묻더라. 그런 언어에서 차별이 나타난다. 다같이 존댓말을 쓰거나 반말을 써야 하는데, 반말을 쓸 수는 없으니 누구에게든지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글쓰기에 제일 많이 영향을 준 사람이 형인 것 같다.
아내는 이 책 전체의 톤을 결정했다. 늘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아내가 그러더라. ‘교회 개혁을 얘기하는 건 좋은데, 왜 그 얘기를 하는 당신 얼굴이 행복하지 않으냐’고. 같이 일하는 분 중에 천사 같은 교수님이 한 분 계시다. ‘앞에 그렇게 공격적인 얘기를 하면, 그분이 그걸 읽고 도망가지 않겠나.’ 그 교수님을 머리에 떠올리고 다시 읽어봤다. 시니컬하지 않고, 비난하지 말고, 마음 아파하며 고민하는 마음을 전하라고 해서 고친 게 이 수준이다.(웃음)”
책이나 칼럼의 내용이 공격적인데도, 존댓말로 풀어내니까, 흔히 얄밉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을 한다.(웃음)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도 예의를 갖추는 재주는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다.
“칼럼을 쓸 때에는 제 안에는 늘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교회에서 컸기 때문에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고, 끝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과거에 칼럼 하나 쓸 때는 백 번쯤 읽어본 것 같다. 우리 목사님 얼굴 떠올리면서 쭉 읽어보면 고칠 게 생긴다.(웃음) 그러다 장로님 한번 생각하면서 다시 읽고, 검사 연수원 친구 생각나면 그 시선으로 다시 읽어본다. 그렇게 모든 공격적인 시선을 방어하면서, ‘~할 수도 있겠지만’ ‘~ 내 생각이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방어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공포를 느낄 때는, 안 다루는 게 상책이다.(웃음) 『평화의 얼굴』은 금기시되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고,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조계 내부의 누추한 풍경을 밝혀서, 앞으로 정상적인 법조계 생활이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거북하고 어려우면 안 하는 게 보통인데 꼭 해내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건 할 얘기가 있는 거겠지. 남이 못 보고 지나치는 게 자꾸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얘기하라는 어떤 소리가 아닌가 싶고, 결국 늘 그렇게 확인이 되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모험이었는데, 나중엔 보면 별일 아닌 걸 그렇게 겁을 냈나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날 때리지 않았고, 형 덕분에 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좋은 직장을 다녔다. 소수자의 편을 든다고 했지만 한번도 소수자가 된 적 없었다. 나에게 왜 이렇게 복을 주시나. 이런 점이 어떤 책임감을 남긴 것 같다. 누가 갑자기 나타나서 ‘너 이단 아냐? 왜 동성애를 옹호해!’ 할까봐 무서운데, 불쑥불쑥 용기가 나는 것 같다.”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꽤 많은 사람이 읽었다. 주변에서 반응은 어떤가?
“이번같이 이메일을 많이 받고. 온갖 분들이 연락을 주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곳곳에서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이상적인 실험을 하고 있고, 앞선 세대와 전혀 다른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도 사람이 안 오는 현실에 슬퍼하는 젊은 목사님들도 많고. 평신도들의 격려도 많이 받았다. 저변이 생각보다 넓다고 느꼈다. 사실 두 가지 마음이 있었는데, 우리 교회 목사님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절대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웃음) ‘어우, 끝까지 잘 읽었어’ 하시더라. 그게 무슨 뜻인지. ‘너 누군지 알았어, 임마’ 이런 뜻인지.(웃음)”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이다. 이 정도 얘기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주제들, 곳곳의 포인트들이 있을 텐데, 사람들이 잘 반응하는 곳, 혹은 예상 외 반응이 있었던 곳이 있다면?
“『불멸의 신성가족』은 같은 편한테 비판을 많이 받았다. ‘대안이 없다, 어쩌란 말이냐?’ 그 책은 법조계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려고 한 책이었다. 인간 사회가 중첩되어, 정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를 말하려는 거지. 법조계만 비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생각같이 전달이 잘 안 된다고 느꼈다. 반면에 이번엔 좀 달랐다. 동성애 비슷한 얘기만 하면, 이단으로 몰려 걱정했는데, 정작 아무도 그 얘기를 안 하는 걸 보면…… ‘4, 5, 6장 읽고 쓰러져서 7장까지 가질 않았구나(웃음)’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구나 싶다. 책이 내가 의도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잘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다. 아마 이 책에 큰 불만을 가질 사람들은 절대 이런 책을 안 읽을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웃음)”
문제점, 불편한 점, 자꾸 이야기해야 한다
글뿐만 아니라 말씀까지 수려하신 김두식 교수님. 미처 다 옮기진 못했지만, 몇 차례 웃음을 투하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면서도 문제의식만큼은 분명히 공유하게끔 전달했다. 이야기는 계속됐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책이 하고 싶은 얘기, Back to the Bible! 성경책 좀 읽자는 거다.
“작년에 한국 유학생과 성경 공부 했는데, 정말 놀랐다. 초심자를 두고 일대일로 성경 공부를 했는데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이 분은 미국에서 공부하던 여성학자인데, 성경 속에서 과격하고 전복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예수님 모습을 발견해나가는 거다. 아직 나아갈 바를 정하진 못했지만, 늘 기도하고 계신 걸 보고 왔다. 지금 한국 교회 문제는 말씀이 많은 게 문제다.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넘치는데 한정된 몇 문장만 계속 설교가 되면서, 박력 있는 예수님. 도전적이고, 신적인 권위를 느낄 수 있는 말씀들이 전달이 안 되는 것 같다.”
예배 시간 내내 교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목사님 얼굴과 다른 사람들의 뒤통수뿐입니다. 이게 너무 당연해서 교인들은 누구도 이와 다른 교회 구조를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한 명의 지혜는 나머지 전체의 지혜를 압도하고, 한 명이 받는 계시는 나머지 전체가 받는 계시를 압도합니다. (…) 그에 반해 삶의 현장에서 무궁무진한 간증 소재들을 만나고 있는 신자들은 자기 삶을 나눌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p.26)
그래서 그는 몇 가지 제안을 한다. 꼭 목사님만 설교하란 법 있나? 교인들도 경험을 나누고, 함께 성경을 읽으면 어떨까? “목사님은 코디네이터를 하면 된다. 이런 재미있는 실험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일이 가능하면, 가까운 돌봄을 실천할 수가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 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돕지. 큰 교회는 바로 옆 사람 사정도 알 수가 없다. 회사가 어렵거나 망하면,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떠나간다. 교회에는 잘사는 사람이 많으니까.”
긍정적인 것은,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이 일어난다는 거다. “이런 얘기들을 하면 금방 생기가 돈다. 물론 결국 ‘현실적으로 어렵겠다’는 얘기가 나오더라도, 생명력이 돈다는 거다. 지금의 예배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얘기하고, 사람들은 영화관에 앉아 있듯 지켜보고, 돌아가는 거잖나. 좀 더 생명력 있는 교회를 만들어보자.”
이러면 바로 들어오는 공격(!)이 있다. ‘당신은 목회를 안 해봤기 때문에 하는 얘기야!’ 전통을 바꾸는 일이란 쉽지 않다. 목회자들이 비슷한 학습을 하며 신학교를 거쳐 온 전통이 이미 200여 년. 이런 예배가 지속된 기간도 못지않을 터. 교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므로,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의견이 지나치게 나이브하게 여겨질 수 있다. ‘애초부터 시작했으면 몰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말 나올 법하다.
허나 문제점을 발견했는데,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법. 그럴수록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문제를 물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자꾸만 이야기하고, 나누면, 움직인다. 바뀔 수 있다. “나에게 대안을 내놓으라고 한다.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사실 대안이 없다. 로스쿨 도입하면 사법부 비리 낮아질 거라고 했지만 학교 자체가 입시학원 비슷하게 바뀌었다. 뭔가 출발점이 잘못되었으면, 자꾸 이야기해야 된다. 그러면 의외로 녹는 것 같이 상황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게 남아선호사상이 아닌가. 20년 사이에 특별한 제도 도입을 한 게 아닌데도, ‘더 이상 그런 얘기 하면 안 된다’ 정도의 합일은 있는 것 같다. 20년 전에는 변할 거라고 생각 안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꾸 이야기하고 경험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니까 바뀌는 게 있더라. 지금 이상한 모습이 있다면 이상하다고 이야기하고, 올바른 게 무엇인지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는 ‘계속’ 이야기한다.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나눔과 돌봄이 있는 교회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예수님이 분명하게 보여 주신 방향은 아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헨리 나웬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른 것은 그 방향성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올라가라고 말하고, 더 높이 올라간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요즘 교회에서 가르치듯이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베풀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한 적이 함 번도 없으십니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즘 목사님들이 가르치는 복음에 따르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로마 황제로 세상에 오시는 것이 가장 편했을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영향력이 큰 자리에서 한 방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p.51)
진정성 있으면 통한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반복시키는 ‘목회자’라는 직분에 대해 얘기해보자. 양희송 실장님이 질문했다. 직업으로서의 목회와 구도자로서의 목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김두식 교수님은 “이 책은 굉장히 소박한 책”이라며 웃었다.
“엄청난 고민을 해서 해답을 제시하겠다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 목사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프로페셔널적인 면모, 엄청난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 중의 하나로 돌아와 달라. 소박한 차원에서 당신들도 인간이라는 걸 이야기하자는 거다. 물론 어떤 교회는 이런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러니까 목사님의 위상이 교회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는 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희송 실장님이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도 도 닦을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개신교 수도원 같은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억하는 분들을 생각해보라.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좋은 말씀을 남기시고 소박하게 사신 분이다. 역사를 일으킨 사람을 좋은 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 불려 나가는 목회자의 모습 말고, 그 스스로도 구도자인 모습을 보고 싶다. 하나의 인간으로 신앙적 싸움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우리들 앞에 너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그런 분이 없진 않지만, 잘 안 보인다는 거다. 결국 목회자의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인데, 충분히 다른 방식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번번히 말씀한 것처럼, 이 책은 어떤 처방이나 해결방법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고 들쑤신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런 들쑤심에 꿈틀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간절히 회복해야 할 문제는, 이런 생명력이다. 아웅다웅 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문제점을 공유하는 것. 다른 생각일지라도 같은 마음, 같은 취지로 이야기 나누는 것. 하나님 뜻대로, 성경 말씀대로 좀 더 선한 방향으로 힘을 모으는 것.
“계속 고민했던 건, 이러한 일들이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 작은 찻잔만 벗어나면 아무도 모르는 문제일 수 있는 거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지금의 진보 개혁 세력이 부딪치는 문제와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찻잔 안에 태풍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너무 공격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도망가게 만드는 것 같다. 자꾸 가르치려고만 한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찻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웃음)”
너울너울 사람들 마음속 물결을 타지 못하고, 그 자리만 맴도는 찻잔 속의 태풍. 모두가 내 문제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찻잔 속만 요란할 뿐이다. 정말 그렇다. 무척이나 다양한 처지, 상황, 배경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에, 같은 문제점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환경문제, 정치 문제, 종교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중대한 문제이지만, 혹자에게는 남의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그 사람이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더 밀접한 사람들이 문제를 등한시하는 경우도 많다.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기 때문이다. 찻잔을 넓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의 교회됨, 지금부터 ‘실험’하자!
‘그래, 이거 진짜 문제야. 바뀌었으면 좋겠어’ 생각의 물결을 일으켜야 한다. 내 마음에 문제의 찻잔을 기꺼이 들이붓는 일이 필요하다. 마음이 앞선다고 해서, 찻잔 밖의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외면하지 않고, 지금 당장 해일이 일지 않더라도, 조금씩 그렇게 흔들어야 한다. 문제를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공유할 수만 있다면, 많은 문제가 나아질 수 있다. 남아선호 사상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함께 이야기할 장이 없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함께 이야기할 장이 없다. 진보 지식인은 보수 언론에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조중동에 글을 안 쓰기로 한 지는 오래인데, 조중동에도 좋은 기자들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 안 읽는 매체, 한겨레, 경향에 글을 싣고 우리끼리 ‘대박이야!’ 하지.(웃음) 그러니까 조중동에는 실을 글이 없어서 더 형편없는 글을 싣게 되고.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얘기를 시작하면, 다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요즘 느낀다. 진정성 있는 사람과는 자꾸 이야기하면 통한다.”
김두식 교수님은 아침에 일어나 조선일보를 3회독 하신다는(!) 장인어른 이야기를 꺼냈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고,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단다. “그 앞에서는 ‘아, 정말 나쁜 놈이네요’ 하고서는 칼럼에 글 쓸 땐 완전 딴소리를 하는 거다. 헌데 그걸 보고서도 별 얘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서서히 설득이 되어 간다는 거다. 장인어른이 갑자기 진보적이 된다는 게 아니라, 이전에는 가만히 앉아서 ‘재떨이!’ 하시던 분이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한다는 거다. 상호 신뢰 속에서는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 결코 일반화될 수 없다. 그럴 법하지만, 분명 아닌 곳도 있을 거다(물론 더한 곳도 있으리라 본다). 어쩌면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가 지적한 문제에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신도와 교회 속사정, 그 거리, 사실 마냥 가깝지만도 않다. (돌아보자, 어쩌면 관객-영화관의 관계와 비슷할 수도 있다. 충격!) 슬프게도, 교회 내부로 가까이 갈수록, 그 안에서 상처받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단다. 그럼 이거 문제 아닌가? 이렇게 느낀 사람이라면, 이 책 한번 차근차근 읽어보시길. 이왕이면 혼자서 말고 여럿이. ‘계속 이야기하자’는 저자의 말마따나, 여럿이 계속 이야기하면서, 우리 공동체의 선한 길을 도모해보자. 갈 길이 멀겠지만, 그렇게 먼저 시작해보는 게 중요하다. “물론 치밀한 기획 없이 시작하면 실수도 많고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실험도 우선은 누군가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324)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증시로 남겨 두고 가신 조직은 교회뿐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 정치적이며, 충분히 세상을 바꿀 힘이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그런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언제나 로마의 거짓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 저는 이제 그만 ‘기독교 거시기’를 접고 교회로 돌아가자고 호소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교회로 은둔하자는 말씀은 아닙니다. 저는 과거에도 저의 신앙과 정치적 신념의 기초 위에서 사회를 향해 제 목소리를 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다만 기독교의 이름, 하나님의 뜻을 내세운 일을 할 때는 먼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부터 돌아보자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다 무너지고 나서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p.293)
책의 첫 장 머리말은 이런 저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도대체 누가, 왜, 무엇이 법학자 김두식 교수님으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책을 쓰게 했나?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 나라다. 하지만 그 자유가 곧바로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자고로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종교 전쟁이라 했다. 종교는 정치, 문화, 사회 등등과 함께 뭉뚱그려놓고 보면, 신문 카테고리의 한 목록일 뿐이지만, 개인적으로 헤아려보면, 종교는 결코 정치, 사회, 문화와 비중이 같을 수 없다. 종교는 개인의 삶과 훨씬 내밀하고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종교 자유 국가에서도 종교 얘기는 결코 함부로 꺼낼 만한 소재가 아니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황에 따라 혹독한 공격을 받거나 좋은 분위기 깨기 십상이다. 모든 종교가 결국엔 사랑을 설파하고, 소통과 평화를 주장하는데도, 종교에 대한 이야기만큼은 쉽게 소통되기 어려워 보인다. 이거 왜 그럴까?
하나 더. 그런데 대체 요즘, 왜 이렇게 뉴스에 종교 지도자들이 많이 보이는 걸까? 애석하게도 선한 일, ‘알흠다운’ 일로 비치시는 건 아닌 것 같고, 의아하게도 자꾸 정치 뉴스에 등장하신다. 저 스님, 저 목사님 요즘 정치하시나? 돌이켜보면, 정치와 종교. 그다지 낯선 조합만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구분이 안 된다. 옷으로, 머리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는 것 외에 정치인과 종교인, 집단적으로 등장하는 그들, ‘소탕, 진멸, 붕괴, 축출’ 이런 무시무시한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들. 아무리 봐도 딱히 구분되진 않는다. 뭐가 문제일까?
이런 궁금증, 비단 나만 가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두식 교수님이 이 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를 들고 오자, 반응 사뭇 뜨거웠던 걸 보면 말이다. 교수님은 이런 얘기를 해보자는 거다. 피하고 싶었다는 말, 이해도 간다. 대한민국에서 종교 얘기. 사실 예민한 거니까. 자칫하면, 사회가 아닌 교회에서도 몰매 맞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아무나 못했던 얘기. 그래서 반갑다.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의 김두식 교수님께 들을 수 있어서 더 반갑다.
저자를 법학자로만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라는 책이 의외일지도 모른다. 이력을 보니, 교수님이 교회와 인연을 맺은 지 꽤 오래다. 오랜 시간 교회 속의 세상에 몸담고 있던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풍경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저자와 직접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특별한 시간, 지난 3월 19일, 합정동 양화진 책방에 마련되었다.
문제는 많은데 대책은 없어 보입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을 알고 나서 슬픔과 탄식을 느끼지 않을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이런 슬픔과 탄식 속에서 대부분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침묵하는 길을 택합니다. 기도 외에는 해법이 없다고 느끼는 까닭이지요. 그러다보니 교회 문제에 대한 침묵은 신실한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표지처럼 자리잡았고, 교인들은 갈수록 개인화, 파편화되어 갑니다. 교회 문제에 대해 교회에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문화를 깨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애통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슬픔을 느껴본 적이 없는 분들은 지금 조용히 이 책을 덮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저는 애통하는 분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다음 책장을 열도록 하겠습니다.(p.33)
교회 이야기, 아직은 때가 아니다?
“계속 곱씹게 되고, 주위에 추천하게 됩니다. 아버님께 읽어보라고 권해드리면서, 목사님께도 한 권 사드리겠다고 했더니,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시네요.”(ID: candymok) 오늘 이 자리, 참여 신청 사연을 소개하며 이야기의 문을 열었다. 모인 참석자들은 공감하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마냥 우스운 얘기가 아니라는 것 역시 모두 공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호기심에, 누군가는 간절함을 가지고 모인 자리. 청어람 아카데미의 양희송 실장님이 사회를 맡았고. “소박하게 모였으니, 하드코어로 진행하는 게 어떻겠냐(웃음)”며 저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는 김두식 교수님의 네 번째 책이다. 네 권의 책이 의미가 남다를 텐데, 이번 책은 어떤가?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에서도 교회 얘기를 많이 했다.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게 전도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오히려 교회 얘기를 할 때는 세상 얘기를 해서 책 제목이 맥락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평화의 얼굴』이다. 고민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얘긴데, 가장 안 팔린 책이다.(웃음)”
책을 쓸 때뿐만 아니라, 잡지의 사설, 칼럼에서도 반드시 존댓말을 쓴다. 읽기 쉽게끔 쓰면서도, 정확하게 말하고자 한다. 이런 글쓰기에 영향을 미친 것이 있다면?
“책 많이 읽은 어머니가 계셨고. 나는 누나, 형 아래로 늦둥이다. 그렇게 자라, 형이 읽는 책을 같이 읽어왔다. 낮에 지강유철 전도사님과 인터뷰를 했는데, 어쩌면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형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못 하게 이상한 형이 있는데,(웃음) 형을 보면서 저런 인간이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컸다. 형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돌이켜보게 되더라. 형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미국 사람들은 다 반말을 쓰는데, 왜 영화관 자막을 보면, 남자는 여자에게 반말로 번역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존댓말로 번역하느냐고 묻더라. 그런 언어에서 차별이 나타난다. 다같이 존댓말을 쓰거나 반말을 써야 하는데, 반말을 쓸 수는 없으니 누구에게든지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글쓰기에 제일 많이 영향을 준 사람이 형인 것 같다.
아내는 이 책 전체의 톤을 결정했다. 늘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아내가 그러더라. ‘교회 개혁을 얘기하는 건 좋은데, 왜 그 얘기를 하는 당신 얼굴이 행복하지 않으냐’고. 같이 일하는 분 중에 천사 같은 교수님이 한 분 계시다. ‘앞에 그렇게 공격적인 얘기를 하면, 그분이 그걸 읽고 도망가지 않겠나.’ 그 교수님을 머리에 떠올리고 다시 읽어봤다. 시니컬하지 않고, 비난하지 말고, 마음 아파하며 고민하는 마음을 전하라고 해서 고친 게 이 수준이다.(웃음)”
책이나 칼럼의 내용이 공격적인데도, 존댓말로 풀어내니까, 흔히 얄밉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을 한다.(웃음)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도 예의를 갖추는 재주는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다.
“칼럼을 쓸 때에는 제 안에는 늘 두려움이 있는 것 같다. 교회에서 컸기 때문에 말 한마디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고, 끝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과거에 칼럼 하나 쓸 때는 백 번쯤 읽어본 것 같다. 우리 목사님 얼굴 떠올리면서 쭉 읽어보면 고칠 게 생긴다.(웃음) 그러다 장로님 한번 생각하면서 다시 읽고, 검사 연수원 친구 생각나면 그 시선으로 다시 읽어본다. 그렇게 모든 공격적인 시선을 방어하면서, ‘~할 수도 있겠지만’ ‘~ 내 생각이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방어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공포를 느낄 때는, 안 다루는 게 상책이다.(웃음) 『평화의 얼굴』은 금기시되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고,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조계 내부의 누추한 풍경을 밝혀서, 앞으로 정상적인 법조계 생활이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힘들고 거북하고 어려우면 안 하는 게 보통인데 꼭 해내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건 할 얘기가 있는 거겠지. 남이 못 보고 지나치는 게 자꾸 눈에 들어오는데, 그것은 얘기하라는 어떤 소리가 아닌가 싶고, 결국 늘 그렇게 확인이 되었던 것 같다. 나름대로 모험이었는데, 나중엔 보면 별일 아닌 걸 그렇게 겁을 냈나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 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날 때리지 않았고, 형 덕분에 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좋은 직장을 다녔다. 소수자의 편을 든다고 했지만 한번도 소수자가 된 적 없었다. 나에게 왜 이렇게 복을 주시나. 이런 점이 어떤 책임감을 남긴 것 같다. 누가 갑자기 나타나서 ‘너 이단 아냐? 왜 동성애를 옹호해!’ 할까봐 무서운데, 불쑥불쑥 용기가 나는 것 같다.”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꽤 많은 사람이 읽었다. 주변에서 반응은 어떤가?
“이번같이 이메일을 많이 받고. 온갖 분들이 연락을 주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곳곳에서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 이상적인 실험을 하고 있고, 앞선 세대와 전혀 다른 걸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도 사람이 안 오는 현실에 슬퍼하는 젊은 목사님들도 많고. 평신도들의 격려도 많이 받았다. 저변이 생각보다 넓다고 느꼈다. 사실 두 가지 마음이 있었는데, 우리 교회 목사님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절대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웃음) ‘어우, 끝까지 잘 읽었어’ 하시더라. 그게 무슨 뜻인지. ‘너 누군지 알았어, 임마’ 이런 뜻인지.(웃음)”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이다. 이 정도 얘기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주제들, 곳곳의 포인트들이 있을 텐데, 사람들이 잘 반응하는 곳, 혹은 예상 외 반응이 있었던 곳이 있다면?
“『불멸의 신성가족』은 같은 편한테 비판을 많이 받았다. ‘대안이 없다, 어쩌란 말이냐?’ 그 책은 법조계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를 보여주려고 한 책이었다. 인간 사회가 중첩되어, 정의가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를 말하려는 거지. 법조계만 비판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생각같이 전달이 잘 안 된다고 느꼈다. 반면에 이번엔 좀 달랐다. 동성애 비슷한 얘기만 하면, 이단으로 몰려 걱정했는데, 정작 아무도 그 얘기를 안 하는 걸 보면…… ‘4, 5, 6장 읽고 쓰러져서 7장까지 가질 않았구나(웃음)’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구나 싶다. 책이 내가 의도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잘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이 있다. 아마 이 책에 큰 불만을 가질 사람들은 절대 이런 책을 안 읽을 것이기 때문에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웃음)”
문제점, 불편한 점, 자꾸 이야기해야 한다
“작년에 한국 유학생과 성경 공부 했는데, 정말 놀랐다. 초심자를 두고 일대일로 성경 공부를 했는데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이 분은 미국에서 공부하던 여성학자인데, 성경 속에서 과격하고 전복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예수님 모습을 발견해나가는 거다. 아직 나아갈 바를 정하진 못했지만, 늘 기도하고 계신 걸 보고 왔다. 지금 한국 교회 문제는 말씀이 많은 게 문제다.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넘치는데 한정된 몇 문장만 계속 설교가 되면서, 박력 있는 예수님. 도전적이고, 신적인 권위를 느낄 수 있는 말씀들이 전달이 안 되는 것 같다.”
예배 시간 내내 교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목사님 얼굴과 다른 사람들의 뒤통수뿐입니다. 이게 너무 당연해서 교인들은 누구도 이와 다른 교회 구조를 상상조차 하지 못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한 명의 지혜는 나머지 전체의 지혜를 압도하고, 한 명이 받는 계시는 나머지 전체가 받는 계시를 압도합니다. (…) 그에 반해 삶의 현장에서 무궁무진한 간증 소재들을 만나고 있는 신자들은 자기 삶을 나눌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p.26)
그래서 그는 몇 가지 제안을 한다. 꼭 목사님만 설교하란 법 있나? 교인들도 경험을 나누고, 함께 성경을 읽으면 어떨까? “목사님은 코디네이터를 하면 된다. 이런 재미있는 실험을 했으면 좋겠다. 이런 일이 가능하면, 가까운 돌봄을 실천할 수가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 줄 아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돕지. 큰 교회는 바로 옆 사람 사정도 알 수가 없다. 회사가 어렵거나 망하면,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없다. 떠나간다. 교회에는 잘사는 사람이 많으니까.”
긍정적인 것은,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여기저기서 좋은 반응이 일어난다는 거다. “이런 얘기들을 하면 금방 생기가 돈다. 물론 결국 ‘현실적으로 어렵겠다’는 얘기가 나오더라도, 생명력이 돈다는 거다. 지금의 예배는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얘기하고, 사람들은 영화관에 앉아 있듯 지켜보고, 돌아가는 거잖나. 좀 더 생명력 있는 교회를 만들어보자.”
이러면 바로 들어오는 공격(!)이 있다. ‘당신은 목회를 안 해봤기 때문에 하는 얘기야!’ 전통을 바꾸는 일이란 쉽지 않다. 목회자들이 비슷한 학습을 하며 신학교를 거쳐 온 전통이 이미 200여 년. 이런 예배가 지속된 기간도 못지않을 터. 교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므로, 전통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기에 그의 의견이 지나치게 나이브하게 여겨질 수 있다. ‘애초부터 시작했으면 몰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말 나올 법하다.
허나 문제점을 발견했는데,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법. 그럴수록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문제를 물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당장 해결되지 않더라도, 자꾸만 이야기하고, 나누면, 움직인다. 바뀔 수 있다. “나에게 대안을 내놓으라고 한다.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가 사실 대안이 없다. 로스쿨 도입하면 사법부 비리 낮아질 거라고 했지만 학교 자체가 입시학원 비슷하게 바뀌었다. 뭔가 출발점이 잘못되었으면, 자꾸 이야기해야 된다. 그러면 의외로 녹는 것 같이 상황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게 남아선호사상이 아닌가. 20년 사이에 특별한 제도 도입을 한 게 아닌데도, ‘더 이상 그런 얘기 하면 안 된다’ 정도의 합일은 있는 것 같다. 20년 전에는 변할 거라고 생각 안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꾸 이야기하고 경험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니까 바뀌는 게 있더라. 지금 이상한 모습이 있다면 이상하다고 이야기하고, 올바른 게 무엇인지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는 ‘계속’ 이야기한다.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나눔과 돌봄이 있는 교회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예수님이 분명하게 보여 주신 방향은 아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헨리 나웬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길이 세상의 길과 다른 것은 그 방향성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올라가라고 말하고, 더 높이 올라간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계속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요즘 교회에서 가르치듯이 “더 높이 올라가야 더 많이 베풀 수 있다”는 복음을 전한 적이 함 번도 없으십니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셨습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즘 목사님들이 가르치는 복음에 따르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로마 황제로 세상에 오시는 것이 가장 편했을 겁니다.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영향력이 큰 자리에서 한 방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p.51)
진정성 있으면 통한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반복시키는 ‘목회자’라는 직분에 대해 얘기해보자. 양희송 실장님이 질문했다. 직업으로서의 목회와 구도자로서의 목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김두식 교수님은 “이 책은 굉장히 소박한 책”이라며 웃었다.
“엄청난 고민을 해서 해답을 제시하겠다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 목사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프로페셔널적인 면모, 엄청난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 중의 하나로 돌아와 달라. 소박한 차원에서 당신들도 인간이라는 걸 이야기하자는 거다. 물론 어떤 교회는 이런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러니까 목사님의 위상이 교회마다 다른 경우가 있다는 거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희송 실장님이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도 도 닦을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개신교 수도원 같은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억하는 분들을 생각해보라.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좋은 말씀을 남기시고 소박하게 사신 분이다. 역사를 일으킨 사람을 좋은 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교회에 불려 나가는 목회자의 모습 말고, 그 스스로도 구도자인 모습을 보고 싶다. 하나의 인간으로 신앙적 싸움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우리들 앞에 너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그런 분이 없진 않지만, 잘 안 보인다는 거다. 결국 목회자의 위상과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인데, 충분히 다른 방식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가 번번히 말씀한 것처럼, 이 책은 어떤 처방이나 해결방법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고 들쑤신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그런 들쑤심에 꿈틀대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간절히 회복해야 할 문제는, 이런 생명력이다. 아웅다웅 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문제점을 공유하는 것. 다른 생각일지라도 같은 마음, 같은 취지로 이야기 나누는 것. 하나님 뜻대로, 성경 말씀대로 좀 더 선한 방향으로 힘을 모으는 것.
“계속 고민했던 건, 이러한 일들이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이 작은 찻잔만 벗어나면 아무도 모르는 문제일 수 있는 거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지금의 진보 개혁 세력이 부딪치는 문제와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찻잔 안에 태풍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너무 공격적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도망가게 만드는 것 같다. 자꾸 가르치려고만 한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찻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웃음)”
너울너울 사람들 마음속 물결을 타지 못하고, 그 자리만 맴도는 찻잔 속의 태풍. 모두가 내 문제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찻잔 속만 요란할 뿐이다. 정말 그렇다. 무척이나 다양한 처지, 상황, 배경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에, 같은 문제점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환경문제, 정치 문제, 종교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만큼 중대한 문제이지만, 혹자에게는 남의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그 사람이 연관이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더 밀접한 사람들이 문제를 등한시하는 경우도 많다.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기 때문이다. 찻잔을 넓혀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의 교회됨, 지금부터 ‘실험’하자!
“진보와 보수가 함께 이야기할 장이 없다. 진보 지식인은 보수 언론에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조중동에 글을 안 쓰기로 한 지는 오래인데, 조중동에도 좋은 기자들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 안 읽는 매체, 한겨레, 경향에 글을 싣고 우리끼리 ‘대박이야!’ 하지.(웃음) 그러니까 조중동에는 실을 글이 없어서 더 형편없는 글을 싣게 되고.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얘기를 시작하면, 다 말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요즘 느낀다. 진정성 있는 사람과는 자꾸 이야기하면 통한다.”
김두식 교수님은 아침에 일어나 조선일보를 3회독 하신다는(!) 장인어른 이야기를 꺼냈다. 매일 아침 신문을 읽고,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단다. “그 앞에서는 ‘아, 정말 나쁜 놈이네요’ 하고서는 칼럼에 글 쓸 땐 완전 딴소리를 하는 거다. 헌데 그걸 보고서도 별 얘기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 서서히 설득이 되어 간다는 거다. 장인어른이 갑자기 진보적이 된다는 게 아니라, 이전에는 가만히 앉아서 ‘재떨이!’ 하시던 분이 집에서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한다는 거다. 상호 신뢰 속에서는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교회의 문제. 결코 일반화될 수 없다. 그럴 법하지만, 분명 아닌 곳도 있을 거다(물론 더한 곳도 있으리라 본다). 어쩌면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가 지적한 문제에 동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평신도와 교회 속사정, 그 거리, 사실 마냥 가깝지만도 않다. (돌아보자, 어쩌면 관객-영화관의 관계와 비슷할 수도 있다. 충격!) 슬프게도, 교회 내부로 가까이 갈수록, 그 안에서 상처받고 돌아가는 사람도 많단다. 그럼 이거 문제 아닌가? 이렇게 느낀 사람이라면, 이 책 한번 차근차근 읽어보시길. 이왕이면 혼자서 말고 여럿이. ‘계속 이야기하자’는 저자의 말마따나, 여럿이 계속 이야기하면서, 우리 공동체의 선한 길을 도모해보자. 갈 길이 멀겠지만, 그렇게 먼저 시작해보는 게 중요하다. “물론 치밀한 기획 없이 시작하면 실수도 많고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그래도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대부분의 좋은 일들이 그렇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실험도 우선은 누군가 용기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p.324)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증시로 남겨 두고 가신 조직은 교회뿐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그 존재만으로 정치적이며, 충분히 세상을 바꿀 힘이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그런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언제나 로마의 거짓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위협이 되었습니다. (…) 저는 이제 그만 ‘기독교 거시기’를 접고 교회로 돌아가자고 호소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사회 활동을 접고 교회로 은둔하자는 말씀은 아닙니다. 저는 과거에도 저의 신앙과 정치적 신념의 기초 위에서 사회를 향해 제 목소리를 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럴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다만 기독교의 이름, 하나님의 뜻을 내세운 일을 할 때는 먼저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부터 돌아보자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다 무너지고 나서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습니다.(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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