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아가도 좋은 곳, 프로방스 -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정수복
지난 4월 23일. 바람이 불긴 했지만, 여느 때보다 맑은 날씨의 주말이었다. 한쪽에는 소풍을 나온 듯 대형버스가 줄지어 있었고, 봄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201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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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구본창의 물건들, <구본창 사진전>
지난 4월 23일. 바람이 불긴 했지만, 여느 때보다 맑은 날씨의 주말이었다. 한쪽에는 소풍을 나온 듯 대형버스가 줄지어 있었고, 봄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구본창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YES24 독자들은 정수복 작가와 만났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을 전해준 정수복 작가와 큐레이터의 안내를 따라 구본창 사진전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지난 4월 말까지 진행되었던 구본창 사진전은 30여년 활동했던 구본창 사진작가의 작업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였다. 구본창은 1990년대 배병우, 주명진 등과 함께 사진예술바람을 일으킨 대표적인 작가이고, 그의 작품 중 백자 사진이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전시는 ‘컬렉션’이라는 주제로 구본창이 수십 년 동안 모아 온 개인적인 물건들을 통해 그의 사진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구본창은 여섯 살 때부터 그의 관심을 끄는 물건들을 간직해왔다. 컬렉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소년은 청자 항아리, 선풍기, 카탈로그, 동경 올림픽 안내서, 영화 <졸업>의 카세트 등을 모아두었다. 그의 방안을 가득 채우던 잡동사니들이, 그의 사진전 한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사진 프로젝션이 마련되어 있는 옆 공간 역시 구본창 컬렉션의 연장이다. 작가가 80년대 유학시절 여행하면서 찍었던 스냅사진과 귀국 후 88 올림픽 전후의 한국 모습을 수집한 것이다. 이러한 사진이 ‘작품’으로 수용되지 않았던 80년대 그가 수집한 다양한 일상 풍경들은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이 쪽은 80년대 독일 유학생 시절, 통독 이전의 풍경들이고, 맞은편은 유학 후 돌아온 한국의 풍경입니다. 80년대 급성장한 한국은 떠나기 전과 매우 다른 풍경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사진 속에서 작가가 이질적으로 느끼고 있는 서울의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아직 잔디도 깔리지 않은 흙 밭에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한강 공원에 모인 몇몇의 눈에 띄는 한복복장. 옛 것과 새 것이 엉성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이다. 그때의 모습이 유머러스한, 한편으로는 당혹스런 시선으로 담겨있다. 옛날 버스, 케익, 옷가게, 간판. 그야말로 ‘국산 느낌’ 물씬한 사진들. 그의 카메라 렌즈는 구석구석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2층에 전시된 사진작품들은 구본창이 다른 사람들의 개인 컬렉션을 찍은 작품들이다. 이타미 준의 달 항아리 컬렉션, 오사카 동양도자 박물관의 한국백자 컬렉션, 야나기 무네요시 한국 곱돌 컬렉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본창은 백자의 청아함이 자신의 성향과 비슷하다며 오래 전부터 사진을 통해 백자를 향한 특별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텅 비워서 채워지길 기다리는 백자가 보여주는 비움의 미학이 언제나 그의 마음을 끌었다.
프랑스 기메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탈 컬렉션도 눈길을 끌었다.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으로 찍힌 탈은, 1970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물로 받아 가져간 것들이다. 한국에서는 탈춤을 추고 난 직후의 탈에는 영험한 기운이 담겨 있다고 해서, 그 즉시 깨부쉈다. 이 당시의 탈은 선교사들이 선물로 가져간 것이 유일해, 한국에서는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각자 자유롭게 사진전을 둘러보고,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사회학자 정수복, 경계를 넘나드는 삶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근사한 브런치를 즐겼다. 정수복 작가는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에 삽입된,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져와 한 장 한 장 설명해주기도 했다. “프랑스도 카톨릭 국가라 묘지에 십자가를 세워둡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건, 무신론자이거나 인간의 의지대로 살겠다는 표시죠. 샤르트르, 카뮈 역시 십자가가 없습니다. 이름과 생년월일만 적혀 있어요.
이 사진은 아를르의 골목길 풍경입니다. 저쪽 희미하게 보이는 게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입니다. 1900년대 지은 건축물이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00년 된 건물도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죠.”
한 독자가 정수복 작가에게, 구본창 사진작가처럼 수집하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정수복 작가는 우표 수집을 오래 했다고 대답했다. “외국우표를 많이 모으면서 외국을 동경하게 됐어요. 한국우표도 기념일마다 우체국에 가서 샀고요. 지금은? 특별히 모으고 싶은 게 없어요.
외국 사람들이 파리에 오면 벼룩시장에 많이 가는데 뭘 사러 가는 거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집에 박물관 엽서 같은 게 많이 있네요. 일부러 모은 건 아닌데, 공연이나 전시 광고를 엽서에 많이 하거든요.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게.”
독자들은 정수복 작가에게 프랑스 생활에 관해 질문했다. 앞으로도 프랑스에만 살 거냐는 질문에 작가는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이죠. 아직은 파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라며 웃었다.
파리에서, 서울에서 오가며 살다보면 이쪽도 저쪽도 정착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이다. 경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정수복 저자는 “그런 관찰자적인 입장이 익숙하다”고 대답했다. “구본창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구석에 있는 학생들을 주목한다고 한 적이 있어요. 내가 바로 구석에 있는 학생이었죠. 말을 잘 못하고, 하루에 고작 네 번 정도 입을 떼었어요. 밥 먹을 때만.(웃음) 그때도 거리를 두고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곤 했어요.”
그는 이렇게 경계인으로서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을 사랑한다. “공부할 때도 그랬죠. 사회학에 흥미가 없으면, 문학, 종교, 정치학으로 자유롭게 오갔어요. 매력적이지만, 물론 이렇게 하다보면 주류가 될 수 없으니 배척을 당하기도 하죠.(웃음)”
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두 개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두 개의 입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나 나름대로 판단하여 나만의 입장을 가지려고 노력해왔다. 진정한 지식인은 기존의 입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분류가 불가능한’ 자기만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지식인은 현실 세력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사고를 하기 때?에 어느 진영에 분명히 속한 사람들이 힘을 쓰는 현실 세계에서 대우받기가 힘들다. 그래도 나는 분류가 불가능한 독자적 지식인으로 살아갈 것이다.(p.113)
예술, 혁명, 자유…… 프랑스의 매력이란
정수복 작가는 블란서의 매력을 “자유로운 삶,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수 있는 삶”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사람들이 프랑스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과학, 기술 유학은 독일로, 미술, 문학 등 예술은 프랑스로 유학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본 사람들 머릿속에 박혀 있었지요. 당시 일제 개화기 때 동경에 유학 간 한국 지식인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예요.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고 기념관이라서, 불란서 해방 이후에 국문학자나 미술가들이 프랑스로 많이 갔어요. 특히 1910년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유학 가서 당시 피카소나 모드리아니와 교류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군부독재시절, 학교를 다녔던 저자는 프랑스가 예술보다는 자유, 혁명의 풍경으로 간절하게 다가왔을 테다. “저는 1961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5.16 쿠데타, 계엄령 때문에 7시만 되면 집에 불이 다 꺼지고, 대학원생 때 박정희가 죽는 등, 상황이 내내 답답했어요. 자루 속의 삶이었달까요.
들어간 입구만 있지 나갈 데가 없었어요. 머리도 맘대로 못 길렀고, 사생활까지 철저하게 간섭당한 시대였으니까요. 그러다 프랑스 68혁명을 접하고, 밑으로부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보게 된 거죠.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얘기처럼 프랑스는 개인주의적인 나라에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자아를 실현하는 삶이 거기 있었죠. 정해진 룰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원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삶이에요.
‘럭셔리’라는 문화가 있는 것도 맞죠. 그런 화려함에 끌림도 있었을 거예요. 당시 1980년대 한국은 신흥 공업국으로 제 3세계라고 불리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때 유학해서, 럭셔리 문화를 보고 다니는 게 양심에 불편해, 한 번도 백화점에 가지 않았어요. 이런 문화, 예술, 혁명이 프랑스의 힘과 매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자는 남들이 다 미국으로 유학갈 때 프랑스행을 선택했다. “그렇게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 두렵진 않았냐”는 독자의 질문에 그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우, 정말 자랑스러웠죠.(웃음) 좋았어요. 원했던 삶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대가를 치러야죠.”
느리게 사는 삶이 있는 곳, 프로방스
책날개에 정수복 저자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사회학자이자 작가이며 ‘전문적인 산책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의 담당 편집자가 지었다는 ‘전문 산책자’라는 이름이 저자의 마음에도 독자의 마음에도 인상 깊게 다가왔다.
저자는 프로방스가 “조급증에 걸려 삶을, 시간을, 풍경을, 음식을, 포도주를, 사람을, 햇빛을, 바람을, 정적을 음미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의 “조급증을 치료하는 요양의 장소”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일정 기간을 지내다보면 무엇이든 깊이 느끼고 음미하고 교감할 줄 아는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프로방스는 결코 능률과 실질과 효율을 숭상하는 바쁜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며 무언가를 배우고 견문을 넓히려는 사람들이 찾아갈 곳도 아니다. (…) 세속의 허영을 뒤로하고 느리게 살려는 사람들이라야 숨어있는 프로방스의 진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말의 오후. 머리 위로 해가 떠오를 즈음, 우리는 자리를 치우고 쿀어섰다. 정수복 작가는 가져온 사진을 독자들에게 선물해주었다. 모두 제 갈 길로 흩어져 돌아갔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같은 풍경 하나를 담아갔다.
지난 4월 말까지 진행되었던 구본창 사진전은 30여년 활동했던 구본창 사진작가의 작업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시였다. 구본창은 1990년대 배병우, 주명진 등과 함께 사진예술바람을 일으킨 대표적인 작가이고, 그의 작품 중 백자 사진이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번 전시는 ‘컬렉션’이라는 주제로 구본창이 수십 년 동안 모아 온 개인적인 물건들을 통해 그의 사진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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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창은 여섯 살 때부터 그의 관심을 끄는 물건들을 간직해왔다. 컬렉션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소년은 청자 항아리, 선풍기, 카탈로그, 동경 올림픽 안내서, 영화 <졸업>의 카세트 등을 모아두었다. 그의 방안을 가득 채우던 잡동사니들이, 그의 사진전 한 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사진 프로젝션이 마련되어 있는 옆 공간 역시 구본창 컬렉션의 연장이다. 작가가 80년대 유학시절 여행하면서 찍었던 스냅사진과 귀국 후 88 올림픽 전후의 한국 모습을 수집한 것이다. 이러한 사진이 ‘작품’으로 수용되지 않았던 80년대 그가 수집한 다양한 일상 풍경들은 지금 이 순간 또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이 쪽은 80년대 독일 유학생 시절, 통독 이전의 풍경들이고, 맞은편은 유학 후 돌아온 한국의 풍경입니다. 80년대 급성장한 한국은 떠나기 전과 매우 다른 풍경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사진 속에서 작가가 이질적으로 느끼고 있는 서울의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아직 잔디도 깔리지 않은 흙 밭에 돗자리를 깔고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 한강 공원에 모인 몇몇의 눈에 띄는 한복복장. 옛 것과 새 것이 엉성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풍경이다. 그때의 모습이 유머러스한, 한편으로는 당혹스런 시선으로 담겨있다. 옛날 버스, 케익, 옷가게, 간판. 그야말로 ‘국산 느낌’ 물씬한 사진들. 그의 카메라 렌즈는 구석구석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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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 전시된 사진작품들은 구본창이 다른 사람들의 개인 컬렉션을 찍은 작품들이다. 이타미 준의 달 항아리 컬렉션, 오사카 동양도자 박물관의 한국백자 컬렉션, 야나기 무네요시 한국 곱돌 컬렉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본창은 백자의 청아함이 자신의 성향과 비슷하다며 오래 전부터 사진을 통해 백자를 향한 특별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텅 비워서 채워지길 기다리는 백자가 보여주는 비움의 미학이 언제나 그의 마음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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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기메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탈 컬렉션도 눈길을 끌었다. 우는 듯, 웃는 듯 묘한 표정으로 찍힌 탈은, 1970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물로 받아 가져간 것들이다. 한국에서는 탈춤을 추고 난 직후의 탈에는 영험한 기운이 담겨 있다고 해서, 그 즉시 깨부쉈다. 이 당시의 탈은 선교사들이 선물로 가져간 것이 유일해, 한국에서는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각자 자유롭게 사진전을 둘러보고,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사회학자 정수복, 경계를 넘나드는 삶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근사한 브런치를 즐겼다. 정수복 작가는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에 삽입된,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져와 한 장 한 장 설명해주기도 했다. “프랑스도 카톨릭 국가라 묘지에 십자가를 세워둡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건, 무신론자이거나 인간의 의지대로 살겠다는 표시죠. 샤르트르, 카뮈 역시 십자가가 없습니다. 이름과 생년월일만 적혀 있어요.
이 사진은 아를르의 골목길 풍경입니다. 저쪽 희미하게 보이는 게 로마시대 원형 경기장입니다. 1900년대 지은 건축물이 아직까지 쓰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00년 된 건물도 찾아보기 힘든데 말이죠.”
한 독자가 정수복 작가에게, 구본창 사진작가처럼 수집하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정수복 작가는 우표 수집을 오래 했다고 대답했다. “외국우표를 많이 모으면서 외국을 동경하게 됐어요. 한국우표도 기념일마다 우체국에 가서 샀고요. 지금은? 특별히 모으고 싶은 게 없어요.
외국 사람들이 파리에 오면 벼룩시장에 많이 가는데 뭘 사러 가는 거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집에 박물관 엽서 같은 게 많이 있네요. 일부러 모은 건 아닌데, 공연이나 전시 광고를 엽서에 많이 하거든요.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게.”
독자들은 정수복 작가에게 프랑스 생활에 관해 질문했다. 앞으로도 프랑스에만 살 거냐는 질문에 작가는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사는 게 가장 이상적이죠. 아직은 파리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라며 웃었다.
파리에서, 서울에서 오가며 살다보면 이쪽도 저쪽도 정착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 것이다. 경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정수복 저자는 “그런 관찰자적인 입장이 익숙하다”고 대답했다. “구본창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구석에 있는 학생들을 주목한다고 한 적이 있어요. 내가 바로 구석에 있는 학생이었죠. 말을 잘 못하고, 하루에 고작 네 번 정도 입을 떼었어요. 밥 먹을 때만.(웃음) 그때도 거리를 두고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곤 했어요.”
그는 이렇게 경계인으로서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을 사랑한다. “공부할 때도 그랬죠. 사회학에 흥미가 없으면, 문학, 종교, 정치학으로 자유롭게 오갔어요. 매력적이지만, 물론 이렇게 하다보면 주류가 될 수 없으니 배척을 당하기도 하죠.(웃음)”
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두 개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정해져 있는 두 개의 입장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나 나름대로 판단하여 나만의 입장을 가지려고 노력해왔다. 진정한 지식인은 기존의 입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분류가 불가능한’ 자기만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지식인은 현실 세력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 사고를 하기 때?에 어느 진영에 분명히 속한 사람들이 힘을 쓰는 현실 세계에서 대우받기가 힘들다. 그래도 나는 분류가 불가능한 독자적 지식인으로 살아갈 것이다.(p.113)
예술, 혁명, 자유…… 프랑스의 매력이란
정수복 작가는 블란서의 매력을 “자유로운 삶,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수 있는 삶”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사람들이 프랑스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과학, 기술 유학은 독일로, 미술, 문학 등 예술은 프랑스로 유학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본 사람들 머릿속에 박혀 있었지요. 당시 일제 개화기 때 동경에 유학 간 한국 지식인들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예요.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고 기념관이라서, 불란서 해방 이후에 국문학자나 미술가들이 프랑스로 많이 갔어요. 특히 1910년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유학 가서 당시 피카소나 모드리아니와 교류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군부독재시절, 학교를 다녔던 저자는 프랑스가 예술보다는 자유, 혁명의 풍경으로 간절하게 다가왔을 테다. “저는 1961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5.16 쿠데타, 계엄령 때문에 7시만 되면 집에 불이 다 꺼지고, 대학원생 때 박정희가 죽는 등, 상황이 내내 답답했어요. 자루 속의 삶이었달까요.
들어간 입구만 있지 나갈 데가 없었어요. 머리도 맘대로 못 길렀고, 사생활까지 철저하게 간섭당한 시대였으니까요. 그러다 프랑스 68혁명을 접하고, 밑으로부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보게 된 거죠.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얘기처럼 프랑스는 개인주의적인 나라에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자아를 실현하는 삶이 거기 있었죠. 정해진 룰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원하는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삶이에요.
‘럭셔리’라는 문화가 있는 것도 맞죠. 그런 화려함에 끌림도 있었을 거예요. 당시 1980년대 한국은 신흥 공업국으로 제 3세계라고 불리던 시절이었거든요. 그때 유학해서, 럭셔리 문화를 보고 다니는 게 양심에 불편해, 한 번도 백화점에 가지 않았어요. 이런 문화, 예술, 혁명이 프랑스의 힘과 매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자는 남들이 다 미국으로 유학갈 때 프랑스행을 선택했다. “그렇게 남과 다른 선택을 할 때 두렵진 않았냐”는 독자의 질문에 그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우, 정말 자랑스러웠죠.(웃음) 좋았어요. 원했던 삶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대가를 치러야죠.”
느리게 사는 삶이 있는 곳, 프로방스
책날개에 정수복 저자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사회학자이자 작가이며 ‘전문적인 산책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의 담당 편집자가 지었다는 ‘전문 산책자’라는 이름이 저자의 마음에도 독자의 마음에도 인상 깊게 다가왔다.
저자는 프로방스가 “조급증에 걸려 삶을, 시간을, 풍경을, 음식을, 포도주를, 사람을, 햇빛을, 바람을, 정적을 음미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의 “조급증을 치료하는 요양의 장소”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일정 기간을 지내다보면 무엇이든 깊이 느끼고 음미하고 교감할 줄 아는 능력을 회복하게 된다. 프로방스는 결코 능률과 실질과 효율을 숭상하는 바쁜 사람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며 무언가를 배우고 견문을 넓히려는 사람들이 찾아갈 곳도 아니다. (…) 세속의 허영을 뒤로하고 느리게 살려는 사람들이라야 숨어있는 프로방스의 진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말의 오후. 머리 위로 해가 떠오를 즈음, 우리는 자리를 치우고 쿀어섰다. 정수복 작가는 가져온 사진을 독자들에게 선물해주었다. 모두 제 갈 길로 흩어져 돌아갔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같은 풍경 하나를 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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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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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
2011.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