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여자아이를 ‘순수하게 사랑했던’ 남자
네가 다녀간 뒤로 내가 겪어왔던 희귀한 병에 대해 듣는다면 너는 안쓰러워하고, 놀라고, 궁금해 할 거야.
글ㆍ사진 서진
201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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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스러운 게르트루드에게

1876년 10월 28일
크라이스트 처치, 옥스퍼드

네가 다녀간 뒤로 내가 겪어왔던 희귀한 병에 대해 듣는다면 너는 안쓰러워하고, 놀라고, 궁금해 할 거야.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굉장히 피곤하니까 약을 좀 주세요.”라고 말했지. 그가 말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은 약이 필요 없어요, 잠이나 자시오!”

내가 말했어. “아뇨, 이건 잠으로 해결될 종류의 피곤함이 아니에요. 얼굴이 피곤하거든요.”

그는 조금 걱정스럽게 보더니 말했어. “오, 피곤한 건 당신의 코(nose)입니다. 자기가 많이 안다고(knows) 생각하는 사람은 말을 너무 많이 하곤 하지요.” 내가 말했어. “아뇨, 코가 아니라 머리카락(hairs)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러자 그는 한층 더 걱정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어. “이제야 알겠군요, 당신은 피아노에서 너무 많은 선율들(hairs, 영국에서는 h가 묵음이라 airs라고 들림)을 연주해 왔어요.”

“아뇨, 정말 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내가 말했지, “그리고 그건 머리카락이 아니라, 코와 턱에 더 가까워요.”

그러자 그는 정말 걱정스럽게 보더니 말했어. “최근에 당신의 턱으로 많이 걸었던 적이 있나요?” 내가 답했어. “아뇨.” “음!” 그가 말했어. “도통 알 수가 없군요. 그것이 입술이라고 생각하나요?” “물론이죠!” 내가 말했어. “정확하게 바로 그거에요!”

그러자 그는 아주 걱정스럽게 보더니 말했어. “당신은 너무 많은 키스를 한 것 같습니다.” “음,” 내가 말했어. “난 내 어린 친구인, 꼬마 아이에게 키스 한 번을 했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요.” 그가 말했어. “딱 한 번뿐이었다는 게 확실합니까?” 나는 다시 생각했지. 그리고 말했어. “아마도 열한 번 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의사가 말했어. “당신은 입술이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그아이에게 키스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하죠?” 내가 말했어. “보세요, 나는 그녀에게 백팔십두 번의 키스를 빚졌단 말입니다.”

그러자 그는 뺨에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아주 걱정스럽게 보더니 말했어. “키스를 상자 안에 담에서 보낼 수도 있어요.” 그 때 나는 도버에서 샀던 작은 박스가 생각났어, 언젠가 꼬마 소녀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나는 전부를 아주 조심스럽게 담았지. 그것들이 안전하게 왔는지 혹은 가는 길에 하나라도 빠진 게 있는지 말해줘.

루이스 캐럴.


매리 리벅 마일햄에게

1885년 9월 6일
이스트본, 영국

사랑스러운 메이(May)

복숭아는 정말 고마워. 굉장히 맛있었다고. 복숭아를 하나 먹는 것이 너에게 키스를 하는 것만큼 좋았다니까. 물론 그 정도로 좋지 않았지. 내 생각에는, 정확하게 측정을 해야 한다면 사분의 삼만큼 좋았던 것 같아. 우리는 여기서 아주 사랑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 모래가 아름다워. 언젠가 너에게 건너가 바위 사이의 웅덩이에서 너의 손수건을 씻어주고 싶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해변을 방황하다가, 헛되이 너를 찾아.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 “메이(May)는 어디 있을까?” 그리? 멍청한 뱃사람이 대답해. “지금은 오월(May)이 아닙니다. 선생님. 9월이라구요.” 하지만 그건 내게 위안이 되지 않아.

언제나 너를 사랑하는,
C.L.D


작가소개

루이스 캐롤로 더 잘 알려진 레버렌드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Reverend Charles Lutwidge Dogson, 1832-1898), 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작가이고 충격적인 아동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속편 ‘거울 나라의 앨리스’, 서사시 ‘재버워키’ 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논리와 언어유희에 대한 그의 재능은 빅토리아 시대의 많은 편견에 도전했고, 현대 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캐럴은 그의 어린 친구 게르트루드 채터웨이를 그녀가 아홉 살 때 해변으로 휴가를 왔을 때 만났고, 계속 편지를 썼으며, 그녀가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휴가를 함께 보냈다. 그녀는 그의 부조리 시 「스나크 사냥」에 영감을 주었고, 그 작품은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캐럴은 매리 리벅 마일햄(Mary Livock Mileham),을 그녀가 열 살 적 해변을 떠돌아다닐 때 만났고 매리의 부모님이 2년 뒤 그들의 우정을 깰 때까지 자주 그녀를 만났다.


서진의 번역후기

이번 번역이 술술 넘어가서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코(nose)와 아는 것(knows), 머리와(hair,영국에서는 h가 묵음), 선율(air) 등 발음이 같은 단어로 장난을 치는 편지라 그냥 해석했다가는 이상한 뜻이 되지요. 두 번째 편지는 이름(May)과 5월(May)로 장난을 쳤지요. 이 편지를 받은 꼬마 여자 아이는 얼마나 키득거렸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작가들은 이상한 사람이 많지만, 캐럴은 그 중에도 상위권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보수적인 수학자였고, 말놀이에 능했고, 어쩔 수 없었지만 한동안 성직자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도중에 변하기는 했지만 당시 옥스퍼드 교수들은 성직에 종사하거나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야 했었답니다.

보수적인 캐럴은 독신으로 남았지만 유난히 어린 여자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들과 함께 재밌게 놀거나 소풍을 가는 것을 평생 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도 ‘진짜’ 앨리스와 아이들에게 즉석으로 들려준 이야기가 인기가 있어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사진에도 관심이 많아 인물, 특히 여자아이들을 주로 찍었습니다. 세간에는 캐럴이 유아성도착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지만, 캐럴과 놀았던 여자아이들은 나중에 커서도 그와 함께한 시간이 무척 유쾌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으며, 불쾌했던 기억은 전혀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지는 아이를 사랑했기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이 150년을 넘게 꾸준히 사랑받는 작품을 쓸 수 있었겠지요.

또한 이 작품에 영감을 받은 그림, 영화, 문학은 또 어떤가요? 번역을 하는 김에 신기한 동화쯤으로만 생각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영문판으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저작권 만료라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Do cats eat bats?, do bats eat cats?’ 라는 말장난이 나와 웃어버렸네요.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들




 
#서진 #루이스 캐럴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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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d1318

2013.02.01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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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1.15

어린 여자애들을 좋아한데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인지 루이스 캐럴을 로리콘으로 의심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어쩐지 마이클 잭슨이 생각나게 하네요. 소송 걸린 적도 한두번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앨리스 시리즈 읽으면 읽을수록 감탄할 수 밖에 없어요. 역시 수학자라서 그런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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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1.09.27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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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소설가, 한페이지 단편소설 운영자.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12회 한겨레 문학상 수상. 2010년 에세이와 소설을 결합한 『뉴욕 비밀스러운 책의 도시』 출간. 세상의 가장 큰 의문을 풀 책을 찾아 헤매는 북원더러.(Book Wanderer) 개인 홈페이지 3nightson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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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캐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동화작가로 자리매김한 루이스 캐럴의 본명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통해 전 세계적인 동화작가 된 루이스 캐롤은 1832년 1월 27일 영국 체셔 지방의 유복하지만 엄격한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공회의 지역 교구 주임 사제였던 아버지 때문에 16년 동안 사제 사택에서 생활했다. 어린 시절부터 말장난, 체스 게임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사립학교인 리치먼드 스쿨과 럭비 스쿨을 졸업한 뒤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열일곱 살 때 백일해를 앓으면서 오른쪽 귀에 이상이 생겼으며 이후 말을 더듬게 되었다. 1851년 옥스퍼드대학교의 크라이스트처치칼리지에 입학했고 1855년부터 1881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으나 말을 심하게 더듬은 탓에 그리 인기 있는 강사라 할 수는 없었다. 말을 더듬는 버릇과 내성적인 성격을 지녔지만 유일하게 아이들과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을 위한 잡지를 발행하는 등 창작과 편집에 소질을 보여, 1856년부터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관심이 많아 여덞명의 어린 동생들을 위해 직접 삽화를 그린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은 이후 사진으로 옮겨갔고, 1856년 카메라를 산 캐럴은 주로 여자 아이들 사진을 찍으며 24년간 사진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캐럴은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사진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특히 크라이스트처치대학 학장의 세 딸과 친하게 지냈고, 그중 각별했던 둘째 앨리스 리델을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썼다. 템스강에서 함께 피크닉을 갔던 열살 난 앨리스 리덜과 자매들(단과대 학장의 세 딸)에게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탄생했다. 바로 그 이야기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의 줄거리였던 것이다. 이 책은 『지하 세계의 앨리스』라는 이름의 자필로 쓴 이야기 책이었으나 후에 맥밀런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로 하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제목이 변경되었다. 순종과 도덕을 가르치는 기존 동화와는 달리, 주인공이 신기하고 허무맹랑한 캐릭터들과 만나 모험을 하는 파격적인 동화였다. 1865년 출판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렸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화가 됐다. 그 기발한 상상력 때문에 환상문학의 효시가 된다. 하지만 생전 그는 자신이 세계적 베스트 셀러가 된 앨리스의 원작자라는 사실을 밝히기를 거부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간 루이스 캐럴은 그의 어린소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소아성애도착증 환자가 아니었는가 논쟁의 대상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은 수많은 나라에서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뮤지컬 등으로 각색되며 많은 이들의 창조적 영감에 불을 지핀 사랑스러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외에는 그 속편격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1ice Found There』(1871) 등의 유머와 환상이 가득찬 일련의 작품으로써, 근대 아동문학 확립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난센스 문학의 고전이 된 이 두 작품 외에도 장편소설 『실비와 브루노』(전2권, 1889, 1893)를 비롯해, 난센스 시 『요술 환등 외』(1896), 『스나크 사냥』(1876), 『운율 그리고 이성』(1882)을 출간했고 『논리 게임』(1887)과 같은 퍼즐 및 게임에 관한 책들도 여러 권 집필했다. 옥스퍼드 대학 내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어느 옥스퍼드 학생의 기록」(1874)을 비롯한 다양한 풍자 팸플릿을 쓰는가 하면, 『유클리드와 현대의 맞수들』과 『상징 논리』(1896) 같은 논리학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빅토리아 시대 유명 인사들과 아이들을 찍은 사진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아마추어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성직자 서품을 받았지만 1881년 강단에서 물러난 뒤에도 설교단에 서지는 않았고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1898년 『세 일몰』의 교정쇄와 『상징 논리』의 2부 원고를 마무리하던 중 길포드에서 숨을 거두었고, 조촐한 가족장 후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의 소설이나 시는 현대의 초현실주의 문학과 부조리문학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간주되며, 넌센스 문학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