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여자를 위한 부엌
싱크대는 문자 그대로 물을 받아 그릇을 씻거나 야채를 씻는, 대부분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우묵한 함지가 달린 부엌용 작업대를 이릅니다. 그런데 그 싱크대에 이상한 기호와 이상한 의미와 이상한 상징이 부여되었습니다. 어떤 대기업의 제품이 싱크대의 대명사가 되어, 집에 그 브랜드 싱크대를 넣고 싶어 하는 것이 제가 만난 많은 주부들의 꿈입니다. 어쩌다 그런 신앙이 생겼을까요.
글ㆍ사진 노은주,임형남
2013.08.21
작게
크게
집을 설계하면서 주인의 취향이나 성격이 가장 많이 반영되는 부분은 바로 부엌입니다. 주방이나 부엌 다 같은 말입니다. 한자어로 된 주방이라는 말이 어쩐지 더 현대적인 느낌이 들어서인지 점점 더 많이 쓰이고 있는 모양인데, 저는 부엌이란 말이 더 익숙합니다. 음식 하는 일을 즐기지만 그 과정을 남들이 보는 걸 싫어한다고 부엌에 꼭 벽을 치고 가려달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식구들과 대화도 나누고 TV도 함께 볼 수 있도록 개방된 아일랜드형 부엌을 만들어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즘은 후자가 대세입니다.

집을 짓기 위해 오랜 시간 설계하고, 오랜 시간 검토와 토론을 하고, 지난한 행정절차와 시공자 선정을 마치고 공사에 들어가려 하면, 다 되었습니다, 하는 순간 꼭 불거지는 문제가 부엌에 관련된 것입니다. 일반적인 가구와 집의 구성은 오랜 시간 협의하고 설계하고 시공한 대로 크게 방향이 바뀌지 않고 진행되는데, 부엌의 경우 많은 부분이 바뀝니다. 단순히 가구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창문의 모양도 바뀌고 동선도 바뀌게 됩니다. 식기세척기나 오븐, 김치냉장고 같은 기본적인 가전제품이 늘어나 생각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게 되고, 특히 부엌 가구의 대표 격인 싱크대가 가장 두려운 복병입니다.

싱크대는 문자 그대로 물을 받아 그릇을 씻거나 야채를 씻는, 대부분은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우묵한 함지가 달린 부엌용 작업대를 이릅니다. 그런데 그 싱크대에 이상한 기호와 이상한 의미와 이상한 상징이 부여되었습니다. 어떤 대기업의 제품이 싱크대의 대명사가 되어, 집에 그 브랜드 싱크대를 넣고 싶어 하는 것이 제가 만난 많은 주부들의 꿈입니다. 어쩌다 그런 신앙이 생겼을까요.

사실 싱크대는 예전에 우리네 부엌에서 어머니들이 쪼그리고 앉아서 불을 때고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하던 것을, 일어나서 작업을 하고 손쉽게 선반에 손을 뻗어 식기와 조미료를 넣고 빼낼 수 있게 만든 단순 수납장을 곁들인 작업대일 뿐입니다. 그리고 수납장으로 인해 부엌에서 발생하는 열과 습기가 벽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위생적으로도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상태가 지속되고, 싱크대를 구성하는 나무 소재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도장이 그다지 인체에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큰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되는데도, 어찌된 것인지 모두 눈 가리고 귀 막은 채 유혹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 견고한 신앙을 깰 수가 없습니다.

예전처럼 집 바깥에 부엌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 그것도 거실에 붙여서 만들다 보니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싱크대가 집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되는 것은 집안에서 살림하는 안주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시스템이 비슷하니 남들과 서로 비교하기도 쉽고, 집 안에서 거실 벽에 자랑스럽게 매달린 텔레비전 다음으로 보여주는 가구가 싱크대이니 사람들은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보기에는 기능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데도 상표가 무엇이 붙어 있는가에 따라 싱크대에 무척 높은 금액이 책정되고, 그에 대해서는 일고의 반성이나 검증 없이 수용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싱크대는 어떤 신분의 표식이나 신분의 완성, 혹은 욕망의 현재화 등등의 의미가 투영되면서 아주 골치 아픈 물건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전의 부엌, 그중에서도 대갓집의 화려한 부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혹은 어떤 프로그램으로 돌아갔는지를 자세히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돌이켜보면 우리네 부엌, 벽돌이나 흙으로 쌓고 시멘트로 말끔히 미장한 부뚜막과, 그 위에 밥을 짓는 솥이 얹혀 있고 혹은 그 솥에 물을 데워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던 그 부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 채소를 씻고 설거지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던 부엌. 찬장이라고, 그릇을 수납하는, 대부분 나무로 짜서 만든 가구가 있었고, 쌀통은 마루나 비교적 건조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된장, 고추장 등은 뒷마당의 장독대에 있었습니다. 그 위로는 안방에서 부엌의 낮은 공간과 지붕 사이를 이용해서 만들어놓은 다락이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주부의 동선은 길고 자세는 구부정해서 보통 힘들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허리를 굽히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심지어 더운 물과 찬물이 번갈아 나오는 깔끔한 수도꼭지가 달리고, 작업대 위 아래로 많은 그릇과 냄비와 조리도구들이 한꺼번에 수납되어 동선을 줄여주는 하나의 이름, ‘싱크대’가 등장하면서 주부들은 환호했습니다. 거기에 상하지 않게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찬장인 ‘냉장고’까지 등장하면서 모던 스타일 부엌이 완성됩니다.


우리는 늘 좀 단순하고 적당한 가격의 싱크대를 주인께 권합니다. 물론 설계 초기에는 그런 좋은 명분과 실리적인 제안에 모두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작 싱크대를 설치하는 시점이 되면 입장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들어오면서 우리가 모두 아는 고가의 싱크대가 부엌의 한쪽을 차지하게 됩니다. 싱크대 회사의 직원이 열심히 실측을 하고 가지만, 결국엔 늘 보아왔던 아주 익숙한 별로 다를 것 없는 싱크대가 들어옵니다. 게다가 그것도 유행이 있고 신제품이 나날이 등장하다 보니 그때그때 윗장, 아랫장, 그리고 다양한 상판들의 색상이라든가 재질을 가지고 수많은 의견이 오고 갑니다.

저는 싱크대의 그 복잡함, 선택사양을 죽 나열하고 짝을 지어보라고 하는 그들의 상술도 맘에 들지 않지만, 현대의 우리 삶은 왜 이리도 말도 되지 않는 옵션의 나열과 선택과 조합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가에 좌절합니다. 그 많은 옵션 자체가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로 시작하고, 그 안에서 어떤 반성이나 항의도 할 수 없고, 단지 우리는 고르고 써야만 한다는 것에 좌절합니다.

기본적으로 싱크대라는 것은 단순히 작업대입니다. 우리는 그저 편한 자세로 일을 하면 됩니다. 문 안쪽에, 상판 한 귀퉁이에 붙는 그 ‘라벨’에 집착해 두세 배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습니다.

사실 저는 부엌일 중에 요리는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닙니다. 다행히 입맛 까다로운 식구가 없어서 가급적 몇 가지로 메뉴를 줄이는데도 한국 음식이란 게 차려보면 그릇 수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거지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이상하게도 그릇에 거품을 묻히고 닦아내는 그 시간 동안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릅니다. 종일 머리를 싸매고 책상 앞에 앉아 고민했던 문제들이 얼결에 시원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보니, 저는 설거지 거리 앞에 서는 일을 좋아합니다.

대신 저는 요리하는 시간 동안 서 있어야만 하는 것은 싱크대의 가장 불합리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싱크대 아래엔 보통 냄비나 프라이팬, 기타 잡동사니를 수납하는 장이 들어가 있는데, 그러다 보니 무릎을 넣을 데가 없어서 의자를 갖다놓고 앉을 수가 없는 형식입니다. 특히 한국요리는 몇 시간 동안 끓이거나 데치거나 하면서 조리과정을 계속 지켜보아야 하는 종류가 많은데, 이왕이면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앉아서 기다리면 안 될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엌의 싱크대는 기성 제품이 아니라, 다리를 마치 일반 회의테이블처럼 따로 철제로 맞추고, 상판은 인조 대리석을 주문해서 4미터 길이의 긴 책상 같은 모양으로 조립했습니다. 싱크대는 책상보다는 10센티 미터 정도 높은 편이라 일반 의자로는 불편하니 스툴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도마를 놓고 하는 칼질도 앉아서 하고, 양념도 앉아서 섞고, 볶음이나 무침도 앉아서 할 수 있는 싱크대가 완성되었습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앉아서 책을 읽거나 딴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영 불성실해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너무나 편안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저는 거기에 ‘게으른 여자의 부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무척 흐뭇해했답니다.



img_book_bot.jpg

사람을 살리는 집 노은주,임형남 공저 | 예담
집을 짓기 전에, 이사를 가기 전에, 인테리어를 바꾸기 전에, 집에 대한 기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길 권하는 책이다. 노은주ㆍ임형남 부부 건축가는, 〈KBS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에 멘토 건축가로 출연하고, 〈SBS스페셜 ‘학교의 눈물’〉에서 ‘소나기학교’의 기획을 맡는 등, 대중과 소통하는 건축가로도 유명하다. 저자들은 집이 가족의 관계를 존중하고 있는지,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이 되는지, 단열과 환기에 대한 오해는 없는지 등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 과연 사람을 살리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노은주,임형남 저자의 집 이야기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나는 어떤 집에 살아야 행복할까?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부엌 #싱크대 #주방 #사람을 살리는 집 #노은주 #임형남
5의 댓글
User Avatar

공우민

2013.08.31

엄마가 늘 넓고 좋은 싱크대를 갖고싶다고 노래를 부르셨는데,
이 글을 읽으니 더 와닿네요 ㅎㅎ 나중에 이사갈 때 이책 읽고 건강한 설계를 고민하고 고안해야겠어요
답글
0
0
User Avatar

미미의괴담

2013.08.27

우와, 좋은 아이디어네요! 부엌에서의 편안한 모습이 상상됩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sweetspring6

2013.08.22

싱크대에 대한 고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엌에 대한 고찰이 엿보이네요. 앉아서 칼질하고 조리하면 진짜 편하겠죠???
답글
0
0

더 보기

arrow down
Writer Avatar

노은주,임형남

노은주
1969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건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월간 플러스, 공간사에서 건축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수목건축에서는 건축기획을, 서울포럼에서 웹진기획을 했다. 리빙TV의 「살고 싶은 집」, 교보웹진 「Pencil」 등을 통해 비평 활동을 했으며, 1999년부터 함께 가온건축을 운영하고 있는데 ‘가온’이란 순우리말로 가운데·중심이라는 뜻과, ‘집의 평온함(家穩)’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가장 편안하고, 인간답고, 자연과 어우러진 집을 궁리하기 위해 이들은 틈만 나면 옛집을 찾아가고, 골목을 거닐고, 도시를 산책한다. 그 여정에서 집이 지어지고, 글과 그림이 모여 책으로 엮이곤 한다.
홍익대, 중앙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SALUBIA Time capsule’, ‘외침과 속삭임’(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환원된 집’(이루 갤러리)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2011년 ‘금산주택’으로 공간디자인대상을 수상했고, 2012년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2012년 에 멘토 건축가로 출연했으며, 그 외 <명사들의 책읽기>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집주인과 건축가의 행복한 만남》 《서울풍경화첩》 《이야기로 집을 짓다》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등이 있고, <세계일보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임형남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주)간삼건축, (주)삼우설계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다루다가 (주)SF도시건축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1999년부터 함께 가온건축을 운영하고 있는데, ‘가온’이란 순우리말로 가운데·중심이라는 뜻과, ‘집의 평온함(家穩)’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가장 편안하고, 인간답고, 자연과 어우러진 집을 궁리하기 위해 이들은 틈만 나면 옛집을 찾아가고, 골목을 거닐고, 도시를 산책한다. 그 여정에서 집이 지어지고, 글과 그림이 모여 책으로 엮이곤 한다.
홍익대, 중앙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SALUBIA Time capsule’, ‘외침과 속삭임’(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환원된 집’(이루 갤러리) 등의 전시회를 열었다. 2011년 ‘금산주택’으로 공간디자인대상을 수상했고, 2012년 한국건축가협회 아천상을 수상했다. 2012년 에 멘토 건축가로 출연했으며, 그 외 <명사들의 책읽기>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집주인과 건축가의 행복한 만남》 《서울풍경화첩》 《이야기로 집을 짓다》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등이 있고, <세계일보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