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콘은 위안부 피해자 사진전을 왜 막았나
전쟁이 끝나고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 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있다. 사진작가 안세홍은 12년 동안 중국 여러 곳에 살고 있는 할머니들을 찾아 나섰다. 할머니들과 나눈 짧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80여 년 세월의 아픔과 한을 느끼며, 그 내면에 담긴 고통을 사진에 담았다.
글ㆍ사진 김이준수
2013.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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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1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짧은 기사 하나가 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녀 할머니가 향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단신. 이 할머니는 16세 때인 1941년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미얀마 양곤 등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고, 1946년에서야 귀국을 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나눔의집에 기거해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등 평생 질병에 시달렸다.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길 바랐지만, 그들은 끝내 할머니의 간절한 소원을 외면했다. 한국 정부라고 할머니의 그런 간절한 바람에 귀 기울이거나 특별히 한 것도 없었다. 이용녀 할머니의 사망으로 국내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57명으로 줄었다.

일본 정부는 공식 사과는커녕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배상 등에 눈 감고 귀 막고 있다. 더 나아가 일본 각료들은 망언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한국 정부라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지 못하고 있다. 이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1992년부터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어 1000회가 넘어섰다. 지난 18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도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들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다. 뭣보다 슬픈 것은 그들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안세홍 사진작가가 가장 안타까이 여긴 부분이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과 슬픔, 존재감을 잊히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현재의 것으로 함께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1998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어 사진전을 열고 『겹겹』 이라는 사진에세이를 펴냈다. 지난 9월 12일, 서울 평화박물관에서 『겹겹』 출간기념 안세홍 작가의 강연회가 열렸다.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자리가 꽉꽉 들어찼다. 일본인들도 함께 위안부 피해자들을 잊지 않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었다. 누구도 외면해선 안 되는 아픔이고 슬픔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위안부

위안부 피해자들은 중국 등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흑룡강 지린성에 사는 피해자 대부분은 혼자 지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결혼을 한 사람도 있지만,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비율도 열 명 중 여덟 명에 달할 정도였다. 말년은 더욱 어려웠다. 남편이 죽고, 자식도 없고, 양딸이나 양아들이 있어도 도움을 못 받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아파도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건강보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안 작가는 2001년 피해자들을 만나 이런 실태 등을 조사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동분서주 백방으로 뛰면서 가족을 찾아주고자 했다. 쉽지 않았다. 두 명 정도 가족을 찾았으나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한중일 정부가 상호 얽혀 있음에도 정보 공유조차 안 되고 있었다. 그는 한국정부(여성부)에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피해자들 국적이 한국이 아니라며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위안부로 끌려갈 당시 조선인이었고, 우리나라 사람인데도, 왜 도움을 줄 수 없는지 안 작가, 의심을 가졌다. 고민을 거듭 했다. 고민 끝에 결심했다. 사진을 찍어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를 알리자. 중국에 다시 갔다. 사진을 찍고 알렸다.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 이상의 힘은 싣지 못했다.

그는 다시 몇몇 단체와 할머니들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국적이 문제라면 국적을 바꾸자! 피해자 가운데 중국 국적이 절반. 국적 없이 시골에 계신 분이나, 북한 여권을 가진 분도 있었다. 국적을 바꾸는 일을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피해자들도 쉽게 믿지 못했다. 자신들을 외면한 국가였는데, 국적을 바꾸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니 믿기 어려웠다. 중국 국적이라고 혜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국적을 바꾼다는 결심도 쉽지 않았다. 그런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6개월 만에 8명 가운데 6명의 국적을 바꿨다. 많진 않지만 매달 조금씩의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게 됐다. 다만 2명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7년 정도 만주로 끌려가 위안부 생활을 하신 한 할머니는 도망을 갔다. 산둥까지 내려와서 지내다가, 일본말과 조선말을 하니까 스파이로 오해를 받아서 고문을 당했다. 마을 주민들이 보증을 서줘서 겨우 나올 수 있었다. 1957년 중국에서 해외 이주민족에 대한 신분증을 만들어줬는데,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명서여서 지금은 필요가 없는데도 소중히 간직하고 계셨다. 그거라도 없으면 중국에서마저 쫓겨난다고 생각하실 정도였다.”

진천을 고향으로 10개월 된 아들을 업고 서울에 돈 벌러 왔다가 일본군에 잡혀간 할머니였다. 만주로 끌려가 아들을 데리고 위안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7년 동안이었다. 안 작가가 처음 만났을 때가 92살이었던 할머니는 고향을 잊지 않기 위해 지도를 펼치고 매일 들여다보면서 고향을 기억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가족을 찾아 일주일 기한으로 꿈에 그리던 진천에 왔으나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말이 통하지도 않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4일 만에 중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단다.

가슴 아픈 사연은 이어진다. 2003년에 만난 한 할머니는 안 작가와 만나기 전 2~3일 전부터 뇌출혈로 피를 토해서 마을 사람들이 돌보고 있던 상태였다. 1943년 위안부로 끌려가 성병에 걸렸으나 치료도 받지 못했다. 일본군이 방치하고 버려뒀다. 실제로 성병에 걸려도 본인이 부담해서 치료를 해야 했었다. 제대로 치료를 못 받다보니 계속 병에 시달리면서 지내야 했다. 안 작가와 만날 당시 영양부족에 혈압이 거의 없는 상태였는데, 그가 며칠 있는 동안 기운을 조금 차렸던 할머니는 재작년 12월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했다.

“상하이에서 만난 박오득 할머니는 청도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도망을 계속 갔으나 잡혀 와서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계속 도망을 가니 피해자를 마사지 숍에 팔았다. 심부름을 하면서 지냈는데, 알고 보니 아편이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군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평생을 그 마사지 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계셨다. 무릎이 워낙 좋지 않아 내려올 수가 없었던 거다.”




겹겹 프로젝트는 계속 된다

그는 ‘겹겹’이라는 책의 제목을 짓게 한 할머니의 사진을 보여줬다. 대개 주름은 옆으로 지는데, 할머니가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겹겹이 세로로 주름이 지는 모습. 70년 전 당한 고통이 이후에도 이중삼중으로 쌓이면서 한의 덩어리가 됐다고 해서 겹겹이라는 제목을 지었다는 것이 안 작가의 설명이었다.

“대부분 할머니들에게 안 좋은 부위가 굉장히 많았다. 무릎이 안 좋거나 알츠하이머에 걸린 분도 계시고. 나눔의집으로 돌아온 한 할머니는 지금 92세인데, 친딸 두 명에게 한복을 선물 받았다. 한복을 입고 집 앞에 나와 계신 장면을 찍었다. 할머니는 한복을 입고 사진 찍는 걸 무척 좋아하셨다. 책 표지사진으로도 썼다. 그렇게 열 세분 할머니를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있다. 여덟 분이 돌아가셨고, 나머지 분들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살아계신 다섯 분 가운데 두 분은 한국에, 세 분은 중국에 계신다. 할머니들과 연락을 종종 하지만 어느 순간 연락이 안 될 때가 있다. 작년에 연락이 안 돼 생사라고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찾아갔을 때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건강이 악화되셔서 병중에 계신 분도 있고.”

기억하고 싶었다. 기억돼야만 했다. 그들은 또 다시 어디로 가야할까. 그저 찬바람에 실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일까. 안 작가의 고민은 좀 더 깊어졌다. ‘겹겹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자 사진전을 생각했다. 쉽지는 않았다. 인지도도 없는 사진작가의 사진전이 쉬울 리는 없었다. 그래서 2~3년 동안 다른 주제의 사진전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면서 불러주는 곳마다 강연을 다녔다. 다양한 사진과 강연에 대한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지인들과 함께 만든 것이 겹겹 프로젝트였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는 사람만 왔다. 보이는 사람만 보였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고 관심이 없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으로 끝. 무관심 혹은 우익 등에 의한 잘못된 정보가 배포되고 있었다. 무관심을 관심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2012년, 위안부 피해자 사진전을 준비했다. 카메라회사 니콘의 갤러리에서 해보자는 생각에 사무국에 사진을 보냈다. 한 달 만에 연락이 왔다. 6월에 2주 동안 전시가 잡혔다는 연락이었다.

“단순히 사진이 아닌 역사라고 생각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마음의 공감은 물론 위안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본의 12개 주요 도시에서 전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안부 피해자 사진을 나만 찍은 것이 아니다. 다른 사진가들과 공동 사진전을 계획했다. 사진전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강연회를 통해서 했다. 피해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을 계속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니콘이 사진전을 방해했다. 사진전 한 달을 앞두고 사진전을 중지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안 작가는 이를 거부했다. 겹겹 프로젝트를 만든 것도 사진전 중간에 방해를 예상해서였다.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많은 사람들 힘을 모았고, 발 빠르게 대응을 했다. 언론, 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서 도쿄 신주쿠 니콘 살롱에서 사진전(2012.6.26.~7.10)을 열었다.

“법원이 나의 손을 들어줬다. 니콘은 내가 사진을 통해 정치적인 활동을 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시설이 자기들 것이고, 언제든 중지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법원은 계약 관계가 성립했고, 정치적 활동이 아닌 문화적 활동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사진전을 여는 와중에도 관객을 제한하고 과도한 감시와 경비를 하고, 협박까지 했다. 니콘 직원들과 그렇게 싸우면서 진행을 했다. 페이스북 등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도움을 받아 2주 동안 7900명이 다녀갈 정도로 사진전은 성황을 이뤘다.”

사진전은 일본 후루토 갤러리, 외국인 특파원 클럽은 물론 오사카 프리젠 갤러리, 삿포로 시민회관 등에서 이어졌다. 한국에선 류가헌 갤러리와 국립 대구박물관에서 전시를 했다. 그 외 앙코르포토페스티벌, 미국 뉴저지 팰리사이드파크에서도 사진이 전시됐다. 그리고 사진을 모아서 일본에서 먼저 책이 나왔다. 한국에서도 책을 꼭 내야한다는 지인들의 권유로 안 작가는 한국의 여러 출판사와 만났고, 서해문집에서 흔쾌히 책을 내자고 해서 『겹겹』 이 나왔다. 영문판도 추진 중이다. 책에 이은 겹겹 프로젝트의 추가 활동도 이어지고 있다. 할머니들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한중일 겹겹 프로젝트, 지울 수 없는 흔적’이다. 3개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1.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집 고치기
2. 흑룡강성 이수단 할머니 간병하기
3. 필리핀 인도네시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
“지금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남아 있는 나라는 한국, 북한, 대만, 중국, 필리핀, 동티모르, 인도네시아, 호주(네덜란드인), 일본 등이다.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은 누군가 자신들을 기억해주는 것이거든. 죽는 것, 잊히는 것에 대해 걱정도 많이 하신다. 죽어서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씀도 많이 하신다. 재작년 돌아가신 할머니는 양딸이 있는데도, 들판에 뼛가루를 버렸다고 하더라. 우리들이 할머니들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집 고치기 프로젝트는 지금 텀블벅에서 후원도 받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잘 되면 할머니가 따뜻한 겨울을 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관심 부탁한다.”




Q&A

할머니들 촬영은 어떤 방식으로 했나?

처음부터 카메라를 들이대진 않았다. 할머니들도 위안부라고 밝히지도 않으셨다. 시간을 두고 나를 기억할 때까지 찾아간다. 그렇게해야 할머니가 마음을 연다. 또 찍고 싶은 할머니 표정이 있을 때가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할머니의 표정을 본 뒤, 나중에 그 이야길 반복한다.

일본에 유학 가서 일본인 친구와 위안부 이야기를 나눴는데, 모르는 친구들도 많더라. 알고 있어도 관심이 없더라. 충격을 받았다. 실망도 했다. 할머니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나 분노가 대단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의식 있게 행동하는 일본인에 대해서도 할머니들이 아시는지?

중국에 계신 할머니는 아시아 정세 등에 대해 전혀 모르신다. 정보도 없고. 할머니들의 정서는 딱 두 가지다. 일본군에 대한 원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평생 제대로 된 가족을 가져보지 못한데 대한 한이 크다. 일본인들이 그런 것은 무관심도 있지만, 일본식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왜 자꾸 들춰내느냐. 조용히 묻어두면 좋게 지나간다. 왜 할머니를 괴롭히느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일본인이 많다. 물 타기라고나 할까. 일본 우익이 주는 장학금이 꽤 많은데, 그들의 교육을 받으면 사람이 진짜 달라진다. 세뇌다.

한국정부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원 등은 어떻게 되나?

한국정부는 할머니들에 대해 신경 안 쓰길 바란다.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관여하길 싫어한다. 정부에 도움을 많이 요청했지만, 개인에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최근 여성부 장관이 한국뿐 아니라 해외에 계신 할머니를 일일이 찾아뵙겠다는 소릴 했는데, 그 의도는 좀 더 지켜봐야겠다. 어떤 할머니는 국적 회복을 안 하셨는데, 정부에서 언제부터인가 지원금을 줬다. 국적 회복을 안 하면 안 주더니 세월이 지나면서 유연해진 거지. 위안부 문제는 여자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인데, 더 많은 일본인들이 알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올해 일본에서 사진전을 더 할 계획은 없나?

이번 11월 나고야에서 열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고, 12월 도쿄에서도 열 계획이다. 올해는 책을 만드는데 집중하고 집 고치기에 집중하느라, 사진전은 신경을 많이 못 썼다.

이 일을 하는 목적과 이 일을 하면서 힘들 텐데, 원동력이 있다면?

내가 마음이 편해서다. 처음 할머니들을 만나 뵙고 외면할 수 없었고, 자꾸 뵈면서 머리보다 가슴으로 움직이게끔 만들어주셨다. 지난해 사진전이 취소되면서 굉장히 힘들었다. 5kg이나 빠졌는데, 할머니들 사진을 보면서 이걸 꼭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 힘으로 할머니가 지켜줄 것이란 생각으로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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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 안세홍 저 | 서해문집
사진작가 안세홍은 12년 동안 전쟁이 끝나고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 살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 나섰다. 할머니들과 나눈 짧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80여 년 세월의 아픔과 한을 느끼며, 그 내면에 담긴 고통을 사진에 담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조선인 할머니들뿐만 아니다. 중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태평양 연안의 나라들과 심지어는 많은 일본여성들이 전쟁을 치르는 일본군에게 인권을 유린당했고, 아직도 성폭력이라는 기억의 고통 속에 살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겹겹이 쌓인 할머니들의 한 맺힌 가슴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 책 속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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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