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할 때 『나를 더 사랑하는 법』이라는 미란다 줄라이의 책을 읽었다. 미란다 줄라이는 글도 쓰고 영상도 만들고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이라는 영화의 감독이기도 하다. 그녀와 헤럴 플레처가 함께 만든 ‘나를 더 사랑하는 법’이라는 웹사이트에는 일종의 나를 더 행복하게 각종 방법에 대한 각종 과제들이 제시되었다. 그러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그 과제를 실행하여 올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의 머리 땋기,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책의 한 장면 재현하기 등이다. 나를 정말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나는 당장 이 처방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이것들이 내가 한 과제들이다.
보시다시피 내 하루는 별 것 없다. 하지만 별 것 없는 하루야말로 가장 부러운 하루라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아이들이 먹을 음식을 생산하는 부엌 아가씨이기도 하고, 독서가이기도 하고, 애서가이기도 하며 가끔 글을 팔아 약간의 돈을 마련한다. 다음 프로젝트는 하고 싶은 전화 내용 써보기다, 비참하고, 슬프고, 한심하다.
그 : 이 말 하려고 전화했어. 난 그동안 미쳤었나 봐. 내 정신이 아니었어. 모든 걸 다 내가 잘못했어. 제발 나를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돼? 앞으로 당신을 여신처럼 대하면서 살겠어. 내가 보호해주고 다시 다정해질게. 내 곁에만 있어주면 돼. 내가 당신에게 했던 미친 것 같은 말들도, 다 내가 미쳐서 그랬던 거야. 내 정신과 의사가 그렇게 말했어. 제발 돌아와.
나 : 일단 만나서 커피나 한 잔 해요.
써놓고 보니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 같다. 이 비굴한 피. 그러면 실제로 피가 보이는 다른 프로젝트로 넘어가 볼까. ‘상처를 사진으로 찍고 이야기 해보기’라는데, 상처에는 내가 전문가다. 내가 남에게 입히든, 남이 나에게 입히든, 특히 내가 내게 입히는데 능하다.
스무 살 때부터 화학적 물질 부족으로 인한 우울증을 앓았다. 병명은 ‘리스트컷 증후군’. 일본에서 <라이프> 등의 순정만화로 인해 널리 알려진 이 병은, 한 마디로 자기 팔뚝을 베는 것이다. 뭐 죽을 만큼 베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적도 있긴 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관심병자로 오해받기 쉽지만 이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삶에 대한 의지가 높은 경우가 많다. 내가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처절한 고통으로 뱉듯이 말할 수 있지만, 몸을 벨 때의 그 통증이 가슴 속에 찾아오는 통증보다 훨씬 약하다.
인간이란 참 알량한 존재이기 때문에, 정신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몸이 아프면 정신의 고통보다 신체의 고통이 훨씬 아프게 느껴진다. 그 순간 찾아오는 안도감은 대개 눈물과 함께 찾아온다. 살아 있다, 아아,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과 죽고 싶다는 생각의 그 경계 사이에서 삶이라는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의지는 리스트컷 증후군 환자에게 오히려 살도록 힘이 되게 하도록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나도 죽으려 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아마 내가 죽고 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나를 죽이지, 나를, 나를, 나를... 그 상처를 이기지 못해 기꺼이 살해자가 되려던 나의 시도는 실패했고, 나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따위는 이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슬픔이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그렇지만 아버지, 이해하시죠...? 아버지는 아시죠?
이것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코웃음을 치며 없애 버린 뒤 나에게 입힌 상처다. 금방 나아서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가끔 나에게 왜 저런 것이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으로는, 다 필요해서 생긴 일이겠지, 필요해서...
그렇게 생각하지만, 종종 이가 갈리곤 한다. 이 상처를 남긴 뒤 그가 차갑게 웃으며 “내가 죽인 그 OOO 말이야”, 하던 말이 잊히지 않아서이기 때문일까.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그토록 잔인하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원래 사랑과 잔혹은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나를 죽였더라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너 대신 그 OO가 죽은 줄 알아” 하고 말하곤 했지만 차라리 나를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를. 제발, 나를. 나를. 나를.
이런 생각들을 없애기 위해 격렬하고 힘들다는 운동을 검색해 시작했다. 영화 <300>의 출연진들이나 <닌자 어쌔신>에 출연하기 위해 비가 했다는 운동인데 스파르탄이 될 생각은 없지만 이 고통을 육체적 고통으로 누르기 위해 시작했다가 박스 점프를 하자마자 정강이 살이 쭉 찢어졌다. 아마 내가 비육우라면 꽤나 무가치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프로젝트, 응원의 피켓 만들기. 이것만은 진심으로 나에게, 여러분에게도.
아마도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은 미란다 줄라이가 되는 것밖에 없는 것일까. 고통을 잔뜩 토해 놓고 보니 이 글은, 뇌와 심장으로 뱉어 놓은 토사물 같다. [혐]이라는 말꼬리라도 붙여야 될 것 같다. 혹시라도 내가 뱉어 놓은 토사물들 때문에 이 책까지 오해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미란다 줄라이의 변명을 하고 싶다. 그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다. 내가 이 책의 용법을 잘못 사용한 것뿐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지, 고통을 극복하게 해 주는 책이 아니었는데.
이 책의 올바른 용법은, 지금 나처럼 좀 정상이 아닌 상태의 사람들 말고 아주 정상적인 상태에서 좀 더 자기를 사랑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아주 유용하겠다. 특히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연인들에게,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친구들 사이에 꼭 권하고 싶다. 죽어가는 사람과 시간 보내기 같은 무거운 숙제들도 있지만 상대방의 몸에 있는 점들을 연결해서 별자리 그리기, 누군가의 머리 땋아 주기 같은 사랑스러운 과제들도 잔뜩 있어 풍성한 과제들을 직접 실습하다 보면 나를 더 사랑하는 방법이 아니라 ‘너를 더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간이 좀 지난 다음, 그런 곳이 있다면 말이지만 내가 ‘정상’이라는 곳으로 돌아온다면 이 과제를 다시 한 번 해 보고 싶다. 적어도 피를 줄줄 흘리지 않는 상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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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칼럼니스트)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를 증명이라도 하듯 '88만 원 세대'이자 비주류인 자신의 계급과 사회구조적 모순과의 관계를 '특유의 삐딱한 건강함'으로 맛깔스럽게 풀어냈다 평가받으며 이십 대에서 칠십 대까지 폭넓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에세이스트. 『네 멋대로 해라』, 『뜨겁게 안녕』,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불량 소녀 백서』 등을 썼다.
봄봄봄
2014.07.20
현진씨 머리를 내가 따주고 싶소.
teo07
2014.04.05
" 고통을 통해 획득된 인식에 대해 - 오랫동안 끔찍할 정도의 고통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성이 흐려지지 않는 병자의 상태가 명철한 인식의 획득을 위해 가치가 없지는 않다. 무서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에서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세계를 내다본다. 그에게서는 건강한 사람의 눈이 보는,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기만적인 매력들이 사라진다. 고통을 통해 이렇게 최고의 냉정함을 회복하는 것은 그를 그 환상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며 더 나아가 아마 유일한 수단이다. 최고의 고통을 맛보는 순간에 자신에 대해 통찰하게 되었다."
p.s 옛날에 중고등학교때 니체를 염세주의자라고 배웠는데 완전 잘못된 가르침이었더라구요. 니체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긍정의 삶을 살다간 지성인이었습니다. 저는 김현진님이 정말 이 세상 최고의 작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넘지 못할 산을 숙제로 내주시지 않습니다.
teo07
201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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