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최초의 유행은 1990년대의 유산이다. 음원 순위 정상에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유행가 CD 트랙리스트와 거의 흡사한 노래들이 안착해있고, 거리마다 울려 퍼지는 옛 가요는 모두의 과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 무한도전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이 온 나라를 타임머신에 태웠다. 음원 차트 성적이 단순한 대중의 관심 집중도를 투영한다고 해도 현재 레트로에 바치는 헌신은 상당한 수준이다.
기현상이라면 기현상이다. < 응답하라 > 시리즈, 추억의 가수들을 소환한 < 히든싱어 > 등 단발적 복고의 흐름은 존재했으나 이처럼 폭발적인 유행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1990년대 가요계의 중심에 서 있었던 1970년대, 1980년대 생들뿐만이 아니라 태어나지도 않았을 현 십 대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다. < 무한도전 >이라는 포맷 자체 파워를 고려하더라도 그 옛날 역사 속에 잠겨있던 김건모, 이정현, 김현정, 소찬휘, 터보를 다시금 현실 속에 숨 쉬게 한 대중의 사랑은 확실히 흔치 않은, 가요계의 '사건'이다.
최초의 '뻔하고', '단순한' 기획이라 평가받았던 '토토가'가 불러온 복고의 재림은 역으로 현시대가 얼마나 빈곤한 문화적 갈증 상태에 빠져있는지를 반증한다. 한국 문화 역사상 제반은 가장 풍족하면서도 콘텐츠 적으로는 가장 빈곤한 때가 요즈음이다. 허울만 좋은 음원 차트는 오디션 프로그램 등장곡, 드라마 OST, '직캠'의 자극과 논란의 아슬함을 무기로 삼은 노래들의 우후죽순 난립이다. 그 완성도를 일일이 평가하기 어려울 정도의 성과 차용, 천편일률이 가득하다. 염증을 느끼는 이들이 찾을 곳은 유튜브 속, 음원 어플리케이션 속의 과거뿐이다. 행복했던 학창 시절, 청춘 20대 시절의 1990년대는 그중에서도 가장 익숙한 보금자리이자 '문화적 피난처'다.
1990년대 가요가 다소 어설픈 테크노 리듬과 투박한 가사로 완성도 면에선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그 아우라는 감히 현재의 빈곤함이 맞설 것이 못 된다. 대한민국 경제&문화의 최전성기였던 IMF 이전의 1990년대는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행복했던', '살만했던' 시절로 남아있다. 늘어난 수요에 맞춰 수많은 장르의 각축전이 벌어졌고,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는 슈퍼스타들이 탄생했다. 1990년대를 열어젖힌 신해철부터 십 대를 주도층으로 격상시킨 서태지와 아이들, 발라드의 황제 신승훈이 나타났으며 팔색조 매력을 갖춘 김건모는 250만 장 앨범을 팔았다.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시절의 가요는 대중의 눈과 귀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멜로디가 있었고,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쿨, 터보와 같은 그룹의 노래는 말 그대로 우리의 노래, 팝 그 자체였다. 이미지 면에서도 소홀하지 않아, 엄정화의 고혹, 이정현의 강력한 퍼포먼스, 소찬휘의 폭발적 가창은 수많은 후배의 귀감이 되었다. 투박했을지언정 억지로 지어내지 않았다. 작금의 가요계에선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이 '토토가' 열풍에서 교훈을 얻고 개선을 찾아낸다기보다는 그저 그 타성에 젖거나, 이를 이용한 한 철 장사에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대 가요가 환기하는 추억의 아름다움은 쏟아지지만, 그 장단점과 개선의 여지, 현 가요계가 본떠야 할 부분과 과감히 쳐내야 할 부분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토토가'에 등장한 기성 가요는 단순히 한 단어로 정의하기엔 너무나도 넓었던 그 시절의 음악 토양 중 일부임에도 대중은 이를 전체로 인식한다. 저명한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놀즈의 저서 『레트로 매니아』를 인용하자면, '디지털 미래가 아날로그 과거의 최면에 걸린 꼴'이다.
미디어에 좌우되는 가요계 흐름 또한 우려스럽다. < 나는 가수다 >, < 무한도전 가요제 특집 > 등의 전례를 보듯 방송 주도 하의 가요 열풍은 결국 미풍에 그치고 말았다. 비록 그 저의는 순수한 것이라 해도 산업 전체가 방송에 이끌려가는 현실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대중의 자연스러운 의제 형성보다는 몇몇 프로그램, 산업, 개인의 의제가 중심이 되는 문화계 모습은 옳지 않다.
얼마 전 완결된 네이버 웹툰 < 미결 >은 시간 여행의 개발로 인해 모든 창의력이 잠식되고 과거의 레퍼런스만을 문화적 낙으로 삼는 미래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추억을 기념하는 것과 옛것에 얽매이는 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하지만, 추억 향유 그 이상의 대안을 내놓기엔 현재 대한민국 가요계의 자생력이 너무나도 낮아 무비판적 수용에 그치고 만다. 레트로의 함정은 지금보다 더한 독창성과 자립성의 잠식을 불러올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복고를 통한 새로운 미래의 창조냐, 아니면 더욱 깊은 과거로 흘러만 가느냐. 단순히 1990년대 가요에만 국한되지 않은 21세기 문화 산업의 핵심 화두다.
'토토가' 자체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초기 기획대로 이 특집은 단순히 '1990년대 스타들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기억하는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준 것뿐이다. 문화계 경종을 울린 복고의 역습은 너무나도 즐거운 축제 속에 날카로운 맹점과 변화의 필요성을 깊이 녹여놓았다. 기억할 것은 하나다. 선택은 2015년을 살아가는 우리, 바로 이 순간 현재에 달려있다는 것.
2015/01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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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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