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의 블랙코메디를 재현하다
피아니스트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청년과 스무 살 차이가 나는 연상녀와의 사랑이라는 충격적인 설정으로 시작된 <밀회>는 예술대학과 예술재단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비리로 가득한 권력의 이면을 보여주느 데에 주력했다. 그 드라마를 만든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가 다시 뭉쳐 만든 <풍문으로 들었소>는 법률가 집안을 중심으로 하여 전작에서 보여준 인간의 욕망을 은유적인 듯 직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밀회>와 마찬가지로 <풍문으로 들었소>는 자극적인 설정을 밑밥으로 깔고 시작한다. 미성년자의 혼전 임신과 출산.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을 목표로 입시 준비를 하던 아이들이 수능이라는 목표를 두고 당분간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애틋한 마음을 나누다 충동적으로 벌인 단 한 번의 일이었다. 철없다 탓하기엔 기숙사 책상서랍에서 콘돔을 찾아 피임도 했다. 다만 사용법이 잘못되었던 것인지 덜컥 임신하고 말았다는 걸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남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기 쉬운 추문과도 같은 소재를 던져놓지만 드라마는 자극적 상황에 집중하기 보단 그 상황이 펼쳐지는 영역의 둘레를 훑는다. 재력과 권력을 가진, 그리고 그것이 당연히 아들을 통해 세습될 것이라고 믿는 아주 우아하기 짝이 없는 한 법률가 집안과 그 주변. <밀회>와 마찬가지로 드라마가 펼쳐지는 주된 공간들은 재벌을 소재로 다룬 여타 드라마의 규모로 보여주는 세트들과도 엄연히 차별이 된다. 집의 구조나 분위기에서 압도적으로 고상함을 풍긴다. 등장인물들과 전작과 마찬가지로 기품을 유지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한정호(유준상 분)은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이다. 선대부터 이어져온 법률가 집안이라는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본인도 재학 중에 사시를 통과할 정도였다. 정, 관, 재계 특권층의 비밀을 손에 쥐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인사에도 깊이 관여에 좌지우지하는 대한민국의 실세로서 돈뿐만 아니라 권력까지 쥐고 있다.
전직 장관의 막내 딸로 상류층 사이에서도 귀부인으로 통하는 최연희(유호정 분)은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남편인 한정호의 여성편력도 잘 참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서울대 수시합격 소식의 기쁨과 함께 찾아온 만삭의 여고생 하나 때문에 그간 세련된 처신과 우아한 화술을 소용이 없게 되었다.
서봄(고아성 분)은 맹랑하다. 미혼모가 된 상황에서도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 결심할 정도로 꿋꿋했다. 연락이 끊어졌던 한인상(이준 분)이 찾아와 다행스럽게도 홀로 그 문제를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했지만 인상이 상상도 못했던 엄청난 집안의 귀공자라는 걸 알고도 크게 동요치 않는다. 중요한 건 인상이와의 사랑과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잘 키우는 것밖에 없다. 서봄은 유발자이자 목격자로서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이면을 관찰하게 된다.
도덕이 아니라 법을 따르라
한정호는 자신 앞에 덜컥 나타난 서봄이 마땅치 않다. 그러나 싫은 표정 한 번 짓지 않는다. "우린 저 애가 누군지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이런 속내를 들키지 않는다. 능력과 지혜와 인품을 다 갖춘 사람으로 보여져야 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사후처리 끝날 때까진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절대 하자가 있어선 안돼! 융숭히 대접해!”, "친자확인 결과 나올 때까지는 저 애를 최대한 안심시켜야 한다. 최상의 배려와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줘라" 마음이 없더라도 법적 하자가 없을 것. 대형 로펌의 대표다운 처신이다.
최연희는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싶지 않으나, 아들에게서 드러난 그 충동적 기질에 어디에 연유하고 있는지 보여주듯,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서봄에게 "어디서 말 대답이야. 너는 수치심도 없니. 천박한 게"라는 폭언을 내뱉는다.
한정호와 최연희는 서봄과 한인상을 떼어놓기 위해 온갖 계략을 펼치기 시작한다. 몇 가지 계획들이 물거품이 되고 친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는 아들과 떼어놓기 위해 아이들 몰래 서봄의 부모에게 17억의 위자료를 제시하기까지 한다. 비서를 통해 그런 제안을 받고 화가 난 서봄의 엄마가 한정호의 집까지 찾아간다. 현관에서 마주한 최연희는 아무렇지 않게 집에 놀러 온 친구라고 둘러대며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왜 거짓말 하느냐"고 따져 물으며 분노를 퍼부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듣고선 비서에게 몸을 의지해 피신을 한다. 충격을 받아 의자에 몸을 기대며 내뱉는 대사는 “태어나서 저런 여자 처음 봐. 저런 여자의 딸이라니 더 싫어”였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을 앞에 두고 아닌 척 뻔뻔하게 거짓말을 내뱉는 여자. 저런 여자는 나도 처음 봤는데 그런 걸로 치자면 인간은 자기 반성이 참으로 안 되는 동물 중의 하나이다. 한정호 역시 자신이 비호하는 세력에 대해 폭로 기사를 쓰려는 잡지사 편집장을 불러 자식 일이라면 참 어쩔 수가 없다며 외국인학교 부정입학과 관련해서 얽혀 있는 편집장을 은근히 협박한다.
마음이 텅 빈, 그래서 오히려 더 문제인 그들에겐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좋고 좋은 것이었다.
우우우~ 풍문으로 들었소
고상한 척 하느라 잘 억눌러져 놓았던 실체는 작은 균열 하나로 주르륵 새어 나온다. 한인상의 혼외출산은 한정호와 최연희 사이의 추문으로 주변에 의혹을 만들고 하나씩 해둔 거짓말들이 드러나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드러난다. 이제 막 시작한 이들의 우아한 놀이는 현재의 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점점 더 모양새가 빠질 것이다. 얼마나 추악한 본심을 드러내며 순수한 사랑에 흠집을 만들어낼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부모의 계략에 대항하기 시작한 한인상과 서봄의 혼인신고가 어떤 국면을 맞을지 기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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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며 제법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만큼 현명해졌으며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걸 수줍어하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재생능력으로 사랑할 때마다 소녀의 마음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해내고 쉽게 두근거린다. 『사랑만큼 서툴고 어려운』, 『나를 만져요』 등을 썼으며,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를 운영 중이다.
rkem
2015.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