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PD, 에세이스트, 『침대와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슬픔과 기쁨』 등을 쓴 저자이자 독서가. 이것 하나하나가 정혜윤이라는 사람의 정체성이다. “각자 몇 개의 정체성이 주렁주렁 있잖아요. 그 중 어떤 정체성을 내가 선택하는 거죠. 이 지상에서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라는 정혜윤은 『인생의 일요일들』을 쓰면서 ‘일요일의 순간을 모으는 사람’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그 시간은 행복했다. 제비의 분방함, 부드러운 하늘이 주는 감동을 내가 갖는 언어로 설명해내려 애쓰는 일은 분명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그 행복이 책을 타고 독자에게 전해진다.
정혜윤 PD는 이 행복, 좋아하는 것들의 정체와 이유를 찾고 좋아하는 것들을 더 늘리는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삶은 자주 나를 상처 입히고, 짓누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에 약해지고 무너져 있기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동시키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을 내는 사람들에게 정혜윤 PD는 자신이 가진 많은 ‘인생의 일요일’을 소개하고 싶었다.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일요일의 시간들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이 한 뼘 더 넓고 깊은 곳으로, 조금은 살 만한 곳으로 남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인생의 일요일들’을 수식하는, 와 닿는 문구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삶이 내 안에 모이는 시간,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 같은 것들인데요. 멋진 편지를 받은 기분이 들었어요.
이 책에 ‘책이 오늘의 운세’라는 표현이 나오죠. 좋아하는 책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오늘의 운세를 삼았다는 내용인데요. 일종의 토템이죠. 책이 제게 그런 존재였던 거예요. 살면서 책으로부터 받은 힘이 정말 큰데요. 그런 책을 나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책을 읽은 후에 좀 더 힘을 얻거나 기분이 나아질 여지가 페이지마다 있는 책 말이죠. 어디를 펼치든지 보는 순간 훨씬 더 기분이 밝아지고 무게가 가벼워지는 책을 쓰고 싶은 소원이 제게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이 좀 더 힘을 내길 바랐어요.
사람들이 더 힘내길 바란 이유가 있었겠죠?
마음이 쓰라리거나 복잡하지 않은 삶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사랑, 일, 인간관계 혹은 가족 때문에 어디선가는 남몰래 내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들이 다 있단 말이에요. 하다못해 발톱 통증까지 포함해서요.(웃음)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은 결코 아니죠. 당연히 좋지 않은 날도 있고, 힘을 못 내겠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고, 마음이 밑바닥을 치는 날도 있는데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하고 힘을 내려고 한다는 거죠. 그냥 ‘끝낼래’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그럴 때 정말로 도움이 되는 책을 쓰고 싶었어요.
덕분에 각자의 ‘인생의 일요일’이란 무엇인지도 따져보게 돼요.
찰스 부코스키 책의 한 구절인데요. 라디오를 듣는데 말러 교향곡이 나오죠. 이때 찰스 부코스키가 혼잣말을 해요. “계속해 말러, 계속해 말러”라고요. 좋으니까 하는 말이죠. 바로 그 ‘계속해’라고 할 때의 순간이에요. 어떤 순간이 너무 좋아서 ‘여기 조금만 더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이대로 조금 더 있고 싶어’ 하고 생각하는 거요.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영혼이 더 밝아졌다는 뜻이겠죠. 일시적일지라도 다른 걱정은 없다는 뜻이겠죠. 그걸 ‘일요일’이라고 표현한 거예요. 순간의 충족성이 있는, 내가 좀 더 회복되는 시간 말이에요. 그것은 어느 오아시스 같은 시간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저는 그런 시간이 개인의 일상에 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지상에 있는 것이 편안해지는 시간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책을 읽은 분들도 책을 읽고 내게는 언제가 일요일의 시간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고요.
맨 처음 그런 마음이, 이 책이 저자의 마음속에서 시작되는 장면이 궁금하네요.
예전에 독자와의 만남을 갔는데 한 분이 피곤에 지쳐 벽에 기대고 있는 거예요. 그분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사인을 받으러 오셨더라고요.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더니 소방관이라고 하시면서 출동 전에 소방차 앞에서 책을 읽으신다는 거예요. 힘을 내려고 책을 읽는다고요. 그때 약속을 했어요. 출동 전에 읽을 만한 책을 꼭 쓰겠다고요.(웃음) 사실은 그 약속의 결과예요. 또 한 번은 어떤 할아버지가 강연 때마다 매번 오셨어요. 『삶을 바꾸는 책 읽기』강연이었던 것 같은데요. 네 번째 쯤 됐을 때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죠. 그분이 암 환자셨던 거예요. 병원에서 시간이 너무 안 가잖아요. 제 책 뒤편에 인용된 책 목록을 보셨는데 하나도 아는 게 없더래요. 살아 나가서 이 목록에 있는 책을 다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리고 정말로 퇴원을 해서 다 읽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분도 정말 큰 영감을 주셨죠. 『인생의 일요일들』을 쓸 때 정말로 이 두 분을 생각하며 썼어요.
쓰면서도 참 평화로웠을 것 같아요.
쓸 때 행복감이 굉장했어요. 궁금했어요. 왜 이 글을 쓸 때 이렇게 행복한가. 이를 테면 오늘 일몰이 참 예쁘지 않니, 라고 하는데 그것이 왜 예쁘고 좋은가를 표현하려고 굉장히 애를 썼던 거예요. 사람들은 꽃구경을 가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걸 좋아할까요? 그걸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실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느껴요. 더 나은 일이 벌어지기를, 더 좋은 일이 생기기를, 더 좋은 일을 해볼 수 있기를 기도하죠. 그런 것들이 얼마나 다른 것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지 모르겠어요. 하늘이 맑다는 이유로, 무지개가 떴다는 이유로 굉장히 좋은 기운을 받잖아요. 그렇게 제가 세계로부터 받은 좋은 에너지를 표현했기 때문에 굉장히 기뻤어요.
누구에게나 있지만 눈 밝은 사람에게만 발견되는 에너지란 생각도 들거든요. 내 삶의 일요일을 곰곰이 따져보는 게 얼마나 소중한 힘인지도 말이죠.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많은 것들은 사실 사소한 것들이에요. 사소하지만 어느 날은 결국 그런 것들로부터 위안을 받는단 말이에요. 마음이 아주 슬퍼본 사람은 알 거예요. 갑자기 눈앞에 너무 예쁜 꽃이 피어 있는 걸 희망의 징조로 여긴단 말이에요.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딘가에는 마음을 기탁해서, 에너지를 나누면서 더 좋은 상태가 되려는 마음이죠. 가장 나쁜 일, 가장 슬픈 일조차 그곳에 함몰되지 않는 상태로 바꾸고자 하는 마음, 이걸 굉장히 귀하게 여긴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 어떤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을까요?
살면서 도저히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슬픈 처지의 사람들이 오히려 남을 위하면서 힘을 내는 걸 많이 봤어요. 경이로웠어요. 저 사람은 적개심과 환멸감을 품고 냉소적이거나 공격적으로 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그들이 오히려 더 큰 걸 생각하는 거죠. 그때 받은 감동들이 대단해요. 사람에게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높은 차원이 있다고 생각했고요. 그게 저를 굉장히 숙연하면서 기쁘게 했어요. 나도 저 방향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한 할아버지가 분노에 몸을 떨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테이블을 주먹으로 꽝 치면서요.
“선박 사고가 나서 아이들이 몽땅 죽은 곳이 한국 아니요? 선장과 그 일을 저지른 모든 놈들에게 저주 있기를…”
“그 애들은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래, 그 애들의 부모는 어떻게 살고 있소? 그 애들의 형제자매는 어떻게 살고 있소? 그 애들의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소? …그 애들의 방은 어떻게 됐소? 그 애들의 책과 옷은?”(170-171쪽)
예를 들어볼게요. 이런 이야기예요. 세월호 유족 한 분은 아들을 잃었어요. 시신이 늦게 올라와 시신을 만져보지도 못하고 장례를 치렀고요. 오랫동안 실어증을 앓았어요. 그분이 담양에 고등학생들을 만나러 가는데요. 그 자체가 너무 고통이죠. 담양행 자체가 어마어마한 직시의 용기를 의미하는 거죠. 그렇게 담양의 고등학교를 갔는데 남학생들이 오더니 그냥 그분을 안아준 거예요. ‘엄마 고마워’ 하면서요. 그런데 그 순간 이분이 불끈 힘을 내는 거죠. 실어증을 뚫고요. 우리 아들은 죽었지만 내가 지킬 아이들이 더 많다, 이 아이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뭐든 해봐야겠다, 생각하죠.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에요. 그가 보여준 엄청나게 슬픈 용기, 그런 사람들까지도 힘을 내게 하는 에너지, 뭔가를 위해 자신의 힘을 쓰고 있는 삶, 그런 것들이 제게는 가볍지가 않았어요.
도처에 그리스는 있어요
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딱 하나의 이야기만 가져간다면 저는 단연 쇠똥구리 이야기를 꼽을 거예요. 그것은 틱낫한 스님의 ‘종이는 종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정말 멋진 이야기였거든요. 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세요?
그리스 이야기를 썼지만 사실은 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에요. 가장 빛나는 곳, 가장 천상의 평화를 누리는 곳인데요. 나플리오의 하늘은요, 그냥 전체가 분홍 바다예요. 보면 정말 충격 받아요.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고요. 지구가 그렇게 저한테 다정해보인 적이 없었어요. 분홍 꽃잎이 떠다니는 어떤 곳에 있는 것 같았어요. 이런 순간이 있어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정서적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사람과 함께 있는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옆에 갑자기 너무 많은 제비가 신나게 나는 거예요. 정말 귀여웠어요. 근심 걱정 없는 세계를 보는 느낌이었죠. 그날 정말 많은 에너지를 받았어요.
시기적인 면도 영향이 있었겠죠? 2015년에 그리스를 다녀오셨잖아요.
네, 그때가 한참 제가 세월호 방송 하고, 개인적인 일도 있고 해서 상당히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슬프기도 하지만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까 싶었을 때죠. 어떤 삶을 ‘살았다’ 할 만하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컸어요. 기왕 산다면 잘살고 싶어진 거예요. 이제는 약해지는 것, 핑계를 대는 것, 이런 걸 스스로에게 허용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해도 다른 길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다만 그런 고민을 안고 그리스에 간 거죠. 그런데 정말로 이 책에 쓴 여러 가지 표현들은 과장이 아니에요. 너무 빛났고, 너무 또렷했어요. 그리스라서 생긴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제 시선이 그걸 열렬히 찾고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리스가 아닌 어디라도 그랬겠네요. 여행 하는 이유를 ‘출국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라고 꼽기도 했으니까요.
맞아요, 정말 선명하게 ‘이거였구나’하고 느낀 곳이 그리스였지만 도처에 그리스는 있어요. 도처에 해안선은 있고, 도처에 바위산은 있죠. 제가 마니에서 상상 속의 대화를 하잖아요.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무엇인가, 계속 질문하잖아요. 마음이 무거웠을 때 제비처럼 가벼워져서 날듯이 살고 싶긴 한데 그러기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할까, 하는 질문이 집요했던 시기였어요.
질문에 대한 답은 찾으셨나요?
테바이의 소나무 언덕에서 찾은 것 같아요. 저 자신이 누군가에게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나는 서막이 되는 거죠. 저는 누군가에게 좋은 일의 시작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조금만 배려하면, 조금만 노력하면 타인의 삶이 훨씬 덜 힘들어진다는 걸 굉장히 많이 느껴요. 왜냐하면 저도 힘들 때 하다못해 경비원 분이 “오늘 왜 표정이 어두워?”라며 염려하는 시선을 보내면 그것 때문에라도 밝아지고 싶었으니까요. 하늘, 바다, 한 편의 글, 시에서 늘 구원을 받았고요. 그것이 없는 척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세상에 좋은 것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거죠. 제 해답은 그때 품었던 끝없는 질문에 계속해서 충실하고자 하는 거예요.
좋은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먹긴 하지만 세상에는 그것을 아래로 잡아끄는 것들이 너무 많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책은 균형 감각이에요. 삶에 아무 일이 없어서 읽는 책이 아니라 분명히 끌어내리는,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이 있음에도 읽는 책이거든요. 책에도 지옥에서 꽃 한 송이 들고 균형 감각을 맞췄다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이런 책이나 우리가 갖는 일요일의 시간 자체가 사실은 균형 축이에요. 나머지 시간은 어렵고, 힘들고, 쓰라리죠.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살 수가 없고요. 먹고, 일하고만 살 수 없듯이 일요일의 시간으로 균형 축을 맞춰주는 거예요. 이 시간이 더 늘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각자 몇 개의 정체성이 주렁주렁 있잖아요. 그 중 어떤 정체성을 내가 선택하는 거죠. 재즈 애호가라든가 피콜로 연주자라거나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거나 말이에요. 이 지상에서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공감해요. 적극적으로 선택해 나의 것으로 삼는 정체성이 하나쯤은 있어야 해요.
아무도 주어진 사회적 역할로만 살 수는 없어요. 제 경우 이 글을 쓰는 순간에는 ‘일요일의 순간을 모으는 사람’이 제 정체성이었어요. 일요일의 기억들을 모으는 사람이요. 이 정체성이 정말 행복했어요. 좋아하는 것들을 쓰면서 그 기운 속에 있는 거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로 우리를 에워쌀 수 있어요. 그것은 내가 무엇에 영향을 받을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사물들은 분명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요. 우리는 늘 영향 받는 존재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엇에 영향 받을지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가령 저는 책에 영향 받기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또 돌고래만 보면 좋아요. 제비만 보면 정말 좋아요. 나는 이들에게 영향 받기를 선택했어요. 일요일이란 그것들에 지속적으로 영향 받는 시간인 거죠. 그래야만 균형이 맞춰져요.
안 할 일을 찾는 것
앞서 책을 토템 삼았다고 하기도 하셨고, 책에 영향 받기를 선택했다고도 하셨는데요. 어떤 책들은 특별히 더 와 닿잖아요. 저자에게 그런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할아버지, 제 능력 이상으로 해봤습니다.” 이 한 문장을 항상 외우고 있었어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에 나오는 말인데요. 아침마다 ‘오늘의 운세: 내 능력 이상으로 한다’(웃음) 이렇게요. 사실 저는 그렇게 무엇을 많이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한 거죠. 책의 어떤 문장을 외우고 있다는 건 그 말에 영향 받겠다는 뜻이에요. 그 영향으로 원래의 나보다 좀 더 나은 모습으로 힘을 내 살아보겠다는 의미죠. 오늘의 운세로 다가온 그 문장의 힘으로 좀 더 분투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제 책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되기를 너무나 원해요.
최근에 새로 발견한 책도 있을까요?
틈이 많진 않지만 틈나는 대로 책을 읽어요. 제가 좋아하는 책은 가령 이런 거예요. 흰눈썹긴목뜸부기라는 새가 있다고 해봐요. 걔네들이 멸종 위기인데 수많은 나라의 농민들이 의견을 모아 새끼 새가 자랄 때까지 풀을 베지 않기로 약속을 해요. 그래서 이 새들이 멸종을 면해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해요. 내가 할 일이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풀을 안 베면 되잖아요.(웃음) 내가 어떤 일을 조금 더 해서 남이 조금 덜 힘들어질 여지가 있는 책들을 좋아하는 거죠. 책이 저한테 힘을 준다는 건 바로 그런 뜻이에요. 할 일을 찾는 거고요. 혹은 안 할 일을 찾는 것과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삶의 철학처럼 들리기도 하는데요.
사실은 복잡한 마음의 소유자지만(웃음) 약함을 허용하지 말고 최대한 강해지면 좋겠어요. 그럴 때 많잖아요. 본심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말을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가능하면 남을 덜 힘들게 하는 게 강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책, 그런 책이 좋은 책이고요.
문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멋진 정체성 같아요.
이유가 있는데요. 저는 읽고 정말 좋으면 그렇게 살고 싶어 해요.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늘 궁리하는 사람으로서 독서를 하니까 어떤 문장은 정말 나한테 도움이 된단 말이에요. 원래의 나로서는 책이 없다면 이런 생각은 할 수도 없어요. 원래의 나는 그런 멋진 생각은 꿈도 못 꿔봤어요. 그런데 책이 있으니까 좀 닮아야겠어(웃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 때문이지 사실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분명히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에요.
그것은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기도 하겠죠.
『리어 왕』 마지막 부분에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하지 말고 느끼는 것을 말하자’라는 표현이 나와요. 리어 왕은 정점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사람이죠. 그렇게 추락한 사람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 이것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생각해봐요. 우리는 느낀다고 말하지만 안 느낄 수도 있어요. 안다고 하지만 모를 수도 있죠. 어떤 날은 무엇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그렇게까지 진심은 아닐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나는 과연 살아 있는 건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사람인가, 싶어져요. 그런데 옆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것도 못 느끼는 게 지옥의 핵심이죠. 저는 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최대한 관대한 것, 최대한 친절한 것, 그것 외에 달리 제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더 찾아야겠지만요. 지금 알고 있는 것은 그거 하나예요.
CBS 세월호 2주기 특집 다큐 <새벽 4시의 궁전>으로 한국방송대상 다큐멘터리 부문 작품상을 받기도 하셨어요. 잘 알려졌듯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 『그의 슬픔과 기쁨』도 쓰셨고요. 그것들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돼요.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 말이죠.
라디오 PD, 독서가 등을 다 합친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루하루가 모인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살려고 굉장히 노력을 해요. 그래야만 꼭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것 외에는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요. 최대한 친절하고, 꼭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하게 짠하고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것 외에는 말이에요. 그 판단을 하려고 애쓰는 거죠. 그리고요. 저는 책읽기가 취미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항상 죽기 살기로 읽어요.(웃음)
그렇다면 쓰는 건 어떤 마음에서 비롯되나요?
언제부턴가는 제가 쓴 글을 제가 닮아가고 싶어서 써요. 몽테뉴도 그런 표현을 했잖아요. ‘내가 쓴 글이 나를 만든다’고요. 저도 같아요. 지금의 나보다 글을 쓴 뒤의 내가 더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내가 쓴 글이 나한테 영향을 많이 미쳤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책 쓸 때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늘 끝까지 가요. 그런데 그 책이 별로라면 그것은 저의 한계인 거예요.(웃음) 더 잘할 수 있는데 안 한 적은 없어요. 모든 책은 그 당시의 저고요. 어떤 책이 이전 책보다 나아졌다면 그것이 큰 기쁨이겠죠. 그러니까 책을 쓰는 것은 내가 어딘가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기쁨을 줘요.
앞으로 꼭 써보고 싶은 책도 있겠죠?
사랑. 제가 인간이 다 똑같지 않다는 걸 말하면 사람들은 별로 안 믿을 거예요. 그 말을 깊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저는 인간성의 깊이를 말하는 거예요. 사람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면이 너무 많아요. 특히 그 사람이 길을 잃었을 때, 아주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다시 길을 찾는 삶의 기술, 그것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봐요. 그때 길을 잃게도 하고, 찾게도 하는 게 사랑이에요. 내가 누구와 함께, 어떤 관계로 이 삶을 헤쳐 나갈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관찰했어요.
독자의 ‘인생의 일요일들’을 응원하는 한 마디를 부탁드려요.
힘든 일이 있어도, 삶의 한쪽이 굉장히 쓰라려도 그냥 이대로 무너지지 않고 어떻게든 겪어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이 책을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럴 때 제가 곁에 있고 싶은 심정으로 쓴 부분이 꽤 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각주로 자신의 ‘인생의 일요일’을 생각해보고 적어봤으면 좋겠어요. 확실히 그걸 쓰다보면 행복감이 들어요. 저는 일요일이 너무 많거든요.(웃음) 그리고 계속 더 가보자고요. 우리가 일요일들에서 힘을 얻는 이유는 여기서 더 가보려고 하는 거예요. ‘인생 별 거 있어’라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요. 조금 더 강해지기 위해 이런 시간이 필요해요. 사람이 어떻게 당하고만 살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죠.
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