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의 두번째 소설집 『아내들의 학교』가 출간되었다. “IMF 이후 청년 세대의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특화해 그려냈다”라는 평을 받으며 김준성문학상을 수상한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 (민음사, 2014) 이후 삼 년 만이다. 문지문학상 수상작인 「행복의 과학」을 포함해, 2014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써내려간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은 그전보다 강력해진 목소리로 우리의 귀를 당긴다.
그 목소리는 특히 바로 지금, 국가와 시대를 초월하여 벌어지고 있는 여성혐오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에서부터 ‘몰래카메라’와 같은 은밀한 폭력에 이르기까지, 박민정은 여성혐오와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소설 속으로 가져와 그간 ‘덜 시급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여성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온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써내려간 『아내들의 학교』는 이 시대 여성 소설이 어떻게 다시 쓰일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치열하고 설득력 있는 응답이다.
소설가 박민정은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문화연구학과를 졸업했다.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단편소설 「생시몽 백작의 사생활」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가 있다. 제22회 김준성문학상, 제7회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싸워나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2014년에 첫 소설집 『유령이 신체를 얻을 때』를 출간한 후 3년 만에 내는 소설집입니다. 수록작 중 하나인 「행복의 과학」으로 올해 문지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셨고, 다른 작품들도 여러 문학상 후보에 오르면서 많은 관심을 받고 계신데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두번째 소설집을 출간하신 기분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책을 준비하면서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그것에 대해 들려주셔도 좋겠습니다.
작년 가을에 이사를 했는데요. 살아보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낯선 동네였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사방 백 리 사정을 모르는 동네에 짐을 풀자마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전직 대통령과 관련된 스캔들, 문단 내 성폭력 파문…… 물걸레질을 하다 뉴스 화면을 보면 국회 청문회장에 띄워진 스크린에 아는 사람들의 이름(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명단)이 지나갔고, 어떤 날엔 밤새 트위터를 보면서 울었습니다. 누군가의 폭로를 읽으면 내가 꼭 사건의 공모자인 것처럼 여겨졌고 너무 끔찍해서 잊고 싶었던 일들이 다시 되살아나기도 했고요. 소설 「A코에게 보낸 유서」에서 주인공이 자신이 책임편집을 맡은 책에 대한 반응을 찾아보며 “자신으로서는 불운이었지만 맞게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이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 같습니다. 원점으로 빠르게 내달리는 초침처럼 시간이 흘러가고, 어떤 일들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저는 부지런히 소설을 발표했고 소설집도 출간했습니다. 훗날 조금 편안해진 마음으로 이 시간들을 돌이켜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내들의 학교』를 읽으면서 작가님이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 존재하는 종교인 ‘행복의 과학’에 대한 핍진한 서술, 소련이었던 시절의 러시아에 대한 생생한 묘사 등이 인상적이었는데요, 다양하고 방대한 역사 가운데서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 있는지요.
예전부터 일본 근현대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요. 러시아의 격변기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습니다. 머리통에 점이 크게 난 아저씨가 웃으며 ‘이제 자유 세상으로!’ 하던 장면이 왠지 생생하게 기억나거든요. ‘자이니치’, ‘고려인’, ‘조선족’에 대해 학창 시절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의문과 원망이 있었고, 그러면서도 특정한 시기가 되면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기억하자거나 애국 열사들을 기려야 한다고 선전한다는 것이 기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태어나 살아온 조건들, 198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 분명 있고요. 무엇보다도 대학 시절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보고 꼭 이런 작품을 써 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계속해서 역사를 공부하게 된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표제작인 『아내들의 학교』는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동성 연인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보통 이들이 부딪히게 되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아내들의 학교』의 설정이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해주신다면요.
몇 년 전 크게 인기를 끈 홈 드라마에 게이 커플이 등장했습니다. 중산층 대가족의 소소한 갈등과 대화합을 다룬 가족 드라마에 등장하는 게이는 제가 보기에는 ‘이제 우리 자식들 중에는 이런 애들도 있을 수 있어, 그래도 우리 자식인데 감싸 안아야지 어쩌겠어?’ 하는 정서가 반영된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그들이 잘생긴 외모와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있었던 건 물론이고요. 그때 저는 이 드라마에서 다뤄지는 퀴어라는 것이 중산층 대가족이 맞닥뜨린 새로운 과제쯤으로 여겨졌고, 그들 부모에게 퀴어를 용인하는 일은 정상가족을 재정비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으로부터 출발해 ‘동성혼 합법화 이후’라는 설정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이므로 ‘근미래’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소설 속에서 의도적으로 휴대전화 대중화가 된 시기를 실제와 비슷하게 설정해놓는다든지 해서 바로 지금 여기와 다를 바가 없다는 뉘앙스를 풍기려고 했는데 충분히 반영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내들의 학교』를 비롯해 소설집 전체에 인상적인 여성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여성의 욕망은 억눌러야 하는 것으로 다뤄져온 그간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소설 속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지요. 여성들에게 채워진 족쇄를 풀어주는 것만 같아 책을 읽으면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는데요, 작가님이 소설에서 여성 인물을 묘사할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는지 궁금합니다.
데뷔하고 지금까지 쓴 소설 중에 그나마 ‘연애’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이 『아내들의 학교』인데요. 사실상 이 연애도 멜로드라마와는 거리가 멀지요. 그래도 소설을 꾸준히 읽어주신 분들이 말하기를, 제가 처음으로 실감나는 연애 이야기를 쓴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여성과 여성이 서로에게 매혹을 느끼고 사랑하는 부분에서요. 사실 소설의 화자를 남성으로 설정하고, 남성이 바라보는 세상을 그리는 게 더 편했습니다. 제가 배운 문학이 대부분 그랬기 때문에요. 습작기 대부분을 남성 화자의 시선으로 보낸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랬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난 진짜 여성 인물을 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소설의 언어로 그려지는 허구의 여성과 현실의 여성이 어떻게 다른지 직접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요. 그러나 여전히 문학에서 재현되는 여성 인물이란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여성 작가도 대부분 그걸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요. 싸워나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책의 맨 앞에 놓인 「행복의 과학」 「A코에게 보낸 유서」 「당신의 나라에서」를 일컬어 강지희 평론가는 ‘초국가적 여성혐오 3부작’이라고 칭했는데요. ‘여성’이라는 정체성만으로 누군가의 증오와 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현실을 서늘하게 보여준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님은 초기부터 여성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오셨지만, 여성문제와 관련한 많은 이슈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요즘의 상황에서 여성문제와 관련한 소설을 쓴다는 건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지요.
강지희 평론가가 정확하게 해설했듯 「행복의 과학」의 마지막 장면은 강남역 살인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쓰지 못했을 장면이었습니다. ‘행복의 과학’이라는 종교에 관련한 소설을 써보고자 오래전부터 구상했지만 그 사건을 겪기 전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마무리되었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보통 여성 작가들은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불리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편협한 시각’을 가졌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페미니즘과 관련한 문학작품을 썼다는 ‘이력’은 어떻게든 낙인으로 작용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많은 독자 분들을 만나지 못했고,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거의 듣지 못한 채 써왔습니다. 그랬기에 담대하게 작가 자신이 원하는 소설을 써올 수 있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 시간이 꽤 길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책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을 꼽으라면 「A코에게 보낸 유서」에 등장하는 박영희를 들고 싶습니다. ‘젊고 예쁜 한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박영희가 살해당하기 전까지의 삶에 대해 온전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일기가 특히 마음에 남았습니다. 특별히 ‘일기’를 소설에 삽입하기로 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떤 식으로 들려주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듯한데, 이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듣고 싶습니다.
박영희의 일기를 쓰며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가해자인 기노시타 미노루의 음성이 피해자 박영희의 음성보다 생생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그의 기이한 자기변명이 박영희의 솔직한 토로보다 매혹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 언어가 가해자의 언어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꿈으로 이어져 며칠간 악몽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보내면서, 이 소설에는 반드시 박영희 그 자신의 음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확신이 굳어졌습니다. 설령 기노시타 미노루에게 잠식될지언정, 박영희가 어떻게 말했는지 꾸며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로 말이에요. 소설 속 박영희는 공부를 했거나 책을 많이 읽거나 글을 써본 경험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가 일기를 쓰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그 일기를 통해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모두 쏟아내는 것은 작가인 저에게도 중요한 이야기였습니다.
‘작가의 말’에 다음과 같이 써주셨지요. “얼마 전부터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어머니는 내게 ‘네가 이제야 삶에 도전하려는 마음이 생겼나보다’고 했다. 그 말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수영뿐 아니라 소설쓰기를 통해서도 작가님은 삶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치열한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소설이 나오는 것 같다는 인상 때문이었는데요, 작가님이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꼭 쓰고 싶은 소설은 어떤 것인가요?
어머니는 농담처럼 하신 말씀인데 제게는 쉬이 넘길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이제껏 그 어떤 것에도 도전하지 못하고 겁만 내며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에 산다는 건 제게 재미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잣집 아이도 아니었고 삼남매의 맏딸이었고 허약했고 그다지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던 제게 집이건 학교건 불편한 곳이었고 별다른 취미도 없었으니까요. 다만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소설을 쓰게 된 것도, 분노하거나 말할 줄 알게 된 것도 전부 어떤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는 제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므로 계속 배워가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누군가는 ‘끊임없이 배우고 싶다’는 제 말을 비웃었습니다. 그건 작가로서 자존심도 없는 거라고 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앞으로도 친구들에게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쓸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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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의 학교박민정 저 | 문학동네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에서부터 ‘몰래카메라’와 같은 은밀한 폭력에 이르기까지, 박민정은 여성혐오와 관련된 다양한 사례를 소설 속으로 가져와 그간 ‘덜 시급한’ 것으로 취급되어온 여성 문제를 전면으로 들고 나온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문장
2017.09.17
jijiopop
2017.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