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씨와헌책잔치
독자에게 직선으로 책을 전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었던 ‘느릿느릿 배다리씨와 헌책잔치’. 이날의 경험 덕분에 내가 열고 싶은 책방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느릿느릿 배다리씨와 헌책잔치
내가 애정을 갖고 소개한 책이 손님에게 좋은 반응을 얻거나 출판사에서 살뜰히 책을 판매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때 느끼는 뿌듯함이 컸지만, 서점에서 일하며 채워지지 않는 2%의 갈증이 있었다. 그건 독자와의 교감이었다. 서점원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 책을 고르는 것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어떤 서점원은 독자에게 직접 책 권하는 일을 조심스러워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쩌다 한 번씩 손님에게 선물할 책을 골라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 눈이 반짝였다. 선물할 상대방의 나이와 성별, 직업과 관심사, 취향 등을 꼼꼼히 물어본 다음 좋아할 만한 두세 권의 책을 소개하는 일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손님과 나누는 일처럼 느껴져 기뻤다. 서점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여 갈수록 타인과 책으로 교감하는 즐거움에 대한 갈증이 점점 심해졌다.
일의 재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주관적인 문제다. 일이 내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의 가능성에 기회를 줄 생각을 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회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나를 위해서 말이다. “일이 지루하다”라고 투덜대기 전에 ‘그럼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은?’이라며 고민을 해보면 안 되는 것일까. (『태도에 관하여』, 30쪽)
『태도에 관하여』를 읽다가 머릿속에 번개가 반짝 쳤다. 왜 갈증을 꼭 서점에서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서점에서는 일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갈증은 서점 바깥에서 채우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의 서점 바깥으로의 외출이 시작되었다. 독서모임에 참가해 함께 책을 읽었고, 일본 서점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나누기 위해 여행책방 ‘일단멈춤’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책방만일’의 일일 책방지기를 맡은 날에는 일본의 개성 있는 책방을 쏘다니며 수집한 책과 소품을 전시했다. 서점 바깥에서 책으로 소통하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땡스북스에 책을 입고하러 온 6699press 재영 님에게 ‘느릿느릿 배다리씨와 헌책잔치’ 참여 제안을 받았다. 재영 님은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를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해 오고 있었는데, 헌책잔치도 그중 하나였다. 재영 님이 알려준 사이트에 접속하니 “책과 사람이 만나 새로운 인연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느긋하고 소박한 잔치에 당신을 초대합니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정기적으로 대형 중고서점에 들러 다 읽은 책을 정리하곤 했지만, 볕 좋은 시월의 토요일에 가을바람도 쐬고 헌책방 거리 구경도 할 겸 이번만큼은 편리함 대신 낭만을 좇아 보기로 했다.
헌책잔치 전날, 세 가지 기준으로 책을 추려 냈다. 샀던 책인지 모르고 또 사서 난감한 책, 다 읽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은 책, 읽으려고 했지만 여러 핑계로 읽지 못하고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책. 그중에서 상태가 나쁜 책을 빼고 캐리어에 들어갈 삼십 권 정도를 선별해 가격을 매겼다. ‘저렴한 가격의 헌책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재미난 책을 많이 가져올 텐데 다 팔 수 있을까?’ 묵직한 캐리어를 다시 끌고 돌아올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어떻게 하면 이 책들을 다 팔고 가볍게 돌아올 수 있을지 진지하게 궁리하기 시작했다.
‘다 읽은 책은 내가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을 소개하면 될 텐데, 아직 읽지 못한 책은 어떡하지?’, ‘아,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샀는지 얘기하면 되겠다.’, ‘대화를 나누는 게 부담스러운 손님도 있을 테니 포스트잇에 손글씨로 설명을 써서 붙이는 게 좋겠는 걸.’, ‘이 책은 어디서 샀더라?’ ‘이 책은 왜 또 샀지?’ ‘이 책은 이 대목이 참 좋았는데…….’
헌책잔치가 끝난 이후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짐을 싸다 말고 아닌 밤중에 책 속으로 추억 여행을 떠났다. 일러스트가 귀여워서 구입한 『3시의 나』는 제목 그대로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아사오 하루밍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일 년간 매일 오후 세 시에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를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이다. 매일 일기를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사둔 걸 깜빡하고, 리퍼브 도서 반값 할인할 때 또 한 권을 사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잇에 이렇게 썼다.
“오늘 하루를 기록해 두고 싶어서 일기를 쓰려고 마음먹지만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죠. 이 책의 저자는 귀여운 일러스트와 짧은 글로 매일 오후 세 시에 무엇을 했는지 일 년간 기록해 책으로 냈답니다. 일기를 쓰고 싶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책입니다.”
이 책을 살 때 나의 마음이 어땠는지, 이 책을 읽고 내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책에 담긴 나의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형 중고서점에 책을 팔 때는 경험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책 한 권 한 권마다 포스트잇 메모를 써 붙이느라 새벽 늦게 잠든 탓인지 다음 날 어처구니없게 늦잠을 자서 헐레벌떡 집을 나섰다.
도착하니 이미 잔치가 한창이었다. 서둘러 갖고 온 책을 진열하자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포스트잇이 붙은 책들이 펼쳐진 낯선 풍경에 손님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젯밤 책을 꼼꼼히 살펴보며 소개글을 쓴 덕분인지 손님과의 대화도 한결 수월했다. 손님 한 분 한 분과 눈을 맞추며 어떤 책을 찾고 있는지, 지금 고른 책은 어떤 재미가 있는지 등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책을 고르던 손님이 『엄마 딸 여행』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여행 작가인 저자가 엄마와 직접 다녀온, 엄마의 눈높이에 맞춰 세심하게 고른 전국 스물다섯 곳의 여행지가 담겨 있는 가이드북이다.
“이 책은 제가 결혼을 앞두고 엄마와 둘이서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서 샀던 책이에요. 부모님 모시고 다녀오기 좋은 곳들이기도 하지만 아이와 함께 일박 이일로 다녀오기 좋은 국내 여행지가 잘 소개되어 있어요.”
“안 그래도 이제 아이가 좀 커서, 남편이랑 아이 데리고 주말에 일박 이일 국내 여행을 다녀볼까 하던 참이었거든요. 저 이 책 주세요.”
“네, 사천 원입니다. 요즘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잖아요. 가족들과 즐거운 추억 만드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결국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와 여행을 떠나지 못했지만, 손님만큼은 이 책을 통해 가족과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마음을 담아 팔다 보니 가져온 책은 금세 동이 났다.
‘느릿느릿 배다리씨와 헌책잔치’가 끝난 이후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을 독서모임 도서로 선정해 소개하고 함께 읽는 순간, 일본 헌책방에서 발견한 뜻밖의 책을 사람들과 나누는 순간, 책을 추천받아 간 손님이 내가 골라준 책은 믿고 읽을 수 있다며 다시 한 번 추천을 부탁하는 순간, 헌책잔치에서 책과 함께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네던 순간. 그런 순간순간들을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서점 일이 좋아진 순간부터 언젠가 독립해서 내 책방을 열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해 왔지만, 늘 ‘아직은 아니야’라고 생각했다. 모아 놓은 돈도 없는데 창업 비용은 어떻게 할 것이며, 어찌어찌해서 문을 연다고 해도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땡스북스가 주는 안정감도 컸다. 여기서 몇 년 더 경험을 쌓고 독립하는 게 현명한 선택 같았다. 나는 지금 인내가 필요한 시기인데 무턱대고 용기를 내려는 건 아닐까 자꾸만 뒷걸음쳤다. 그런데 서점 바깥에서의 작은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어느 순간부터 이유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책을 전하는 방식에는 여러 모습이 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가장 자신 있는 방식은 독자와 눈을 맞추고 한 권 한 권의 책을 직접 전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이야말로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2015년 12월 31일, 나는 땡스북스를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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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임경선 작가가 말하는, 나를 살아가게 하는 다섯 가지 중요한 가치들
정지혜(사적인서점 대표)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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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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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