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의 측면돌파] 초고 쓸 때 연필이 멈추면 안 돼요 (G. 박연준 시인)
시인으로는 최초로 ‘김하나의 측면돌파’를 찾아주신 분입니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와 산문집 『소란』,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내 아침인사 대신 읽어보오』를 쓰셨고요. 이번에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과 사랑을 글 속에 담아내셨습니다. 박연준 시인님 모시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글ㆍ사진 임나리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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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지나치게 아끼는 것은 무거워진다. 섣불리 들 수조차 없이 무거워진다. 내 맘대로 옮길 수도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이 무거워져, 그 앞에 서면 쩔쩔매게 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함부로 할 수 없는 것. 무거운 존재. 그 심장 속에 갇혀, 나도 점점 무거워진다.

 

박연준 시인의 에세이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속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작가는 프리다 칼로의 삶과 예술을 자신의 언어로 옮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무릅쓰지 않은 사랑은 천천히, 고요히, 오래 간단다. 안전한 강물처럼 흐르지. 그건 평온하고 근사한 일일 거야. 누구나 바랄지도 모르지. 그러나 무릅쓴 사랑은 순간에 영원을 살다 사라질지라도, 무거운 바다처럼 생을 압도해. 정말이야. 생을, 압도해.“ 프리다 칼로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인터뷰 - 박연준 시인 편>


김하나 : 예전에 김연수 작가가 그런 말을 했었어요. 강연장에서 약간 농담처럼 했던 말인데, 소설가는 직업이지만 시인은 직위 같은 거라고. 그래서 그런지, 다른 분들께는 ‘작가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시인님’이라고 하려니까 입이 조금 어색한 거예요. 시인들 사이에서, 또는 시인이 되시기 전에, 좋아하시는 시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호칭을 하셨나요?

 

박연준 : 음... ‘선생님’이라고 하거나 ‘언니’, ‘선배’, 동기나 후배들한테는 이름 부르거나 ‘~씨’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저도 사실 쑥스러워요. 누가 직업을 물어보면 시인이라고 말한 적 한 번도 없고요. 오히려 작가라고는 하는데, 시인이라고 말하기는 쑥스러워요. ‘내가 무슨 시인인가’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요. 시인이 직위라는 말도 맞는데, 제가 생각할 때는 어떤 상태인 것 같아서 ‘요즘 시인이 아닌 것 같은데?’ 싶을 때도 있어요(웃음).


김하나 : 오늘 이 순간에는 시인 상태인 것 같으세요?


박연준 : 아뇨. 덜 떨어진 상태예요, 지금(웃음). 시인은 아닌 것 같고... 모르겠습니다(웃음).


김하나 : (웃음) 그러면 ‘내가 시를 쓸 수 있겠다, 내 안에서 뭔가 시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다’는 걸 감지한 건 언제쯤인 것 같으세요?


박연준 : 열다섯 살에 제가 처음으로 ‘열다섯’이라는 시를 썼어요. 그때 ‘뭔가 묵직한 걸 쓰고 있구나’ 하고 그 시를 새 공책에 옮겨 적어놨어요. 그게 시를 쓰는 것에 대해 처음 인식하던 순간인 것 같은데요. 제가 고3 때까지 뭔가를 쓰면 그 공책에 적어놓게 되더라고요. 옷을 잘 다려서 넣어놓듯이.


김하나 : 그 노트가 아직도 있나요?


박연준 : 네, 있어요. 불태워버려야 돼요(웃음). 너무 유치한 게 많아서(웃음).


김하나 : (웃음)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고, 이제 ‘시인’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분이 되셨음에도, 초창기에 썼던 것들은 다 부끄럽고 불태우고 싶은 거로군요.


박연준 : 네. 그래서 첫 시집은 잘 펼쳐보지도 않아요(웃음).

 

김하나 : 이번 책은 의외였어요. 프리다 칼로에 대한 책을 내신 게 흥미롭게 느껴졌는데요. 박연준 시인이 프리다 칼로를 사랑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박연준 : 음...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제가 대학 때였는데, 동질감을 분명히 느끼는 게 있었을 것 같아요.


김하나 : 그림을 딱 보고?


박연준 : 그림도 그렇고요. 끈질긴 속성이라고 할까, 제가 디에고 리베라였으면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웃음). 사랑을 포기하지 않아서 결국에는 승자가 되는 사람. 저도 이 책을 쓰다가 진절머리가 나서 정이 떨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몇 달 동안 원고도 안 봤어요. ‘싫은데 어떻게 쓰지?’ 싶었어요. 그런데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결국에는 외면할 수 없는 존재더라고요. ‘괜히 프리다 칼로에 대해서 쓴다고 했나’ 하고 고민한 적도 있었어요. 감정이 자꾸 입혀져서.


김하나 :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서문을 읽고 참 좋았는데요. 프리다 칼로가 사랑에 승리하는 지점에 대해서 끌어안으며 들어가는 서문을 보고 저도 비슷한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프리다 칼로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 속이 터지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 것을 숭고한 것으로만 그려냈다면 이 책을 읽기가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그런 부분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프리다 칼로의 어떤 부분을 뚫고 나가서 닿을 수 있는 부분까지를 책으로 만들어내신 것 같아서 아주 좋았어요.


박연준 : 그렇게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저도 고민했던 게, 김하나 작가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지점인데요. 엄밀히 말해서 프리다 칼로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거든요. 이렇게 사랑하라고 누구에게도 권할 수가 없고요. 인생도 마찬가지고, 작품도 그렇게까지 고통스럽게... 저도 그렇게 써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점점 성장하면서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프리다 칼로는 이미 완결된 상태의 삶을 살다가 죽어버린 사람이니까, 이 사람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보기가 괴로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이야기되어질 수 있는 사람이겠구나, 그래도 의미가 있는 사람이야, 라는 믿음을 가지고 썼어요.


김하나 : 저는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접했던 프리다 칼로의 그림, 생애에 대한 글과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속살에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책 뒤에 보면 정여울 작가가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프리다 칼로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소울메이트를 만난 것이다”라고 쓰셨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김하나 : 때로 고통이 예술의 촉매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박연준 시인이 예술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통으로 점철됐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인생에서 예술을 어떻게 뽑아내었는지,


박연준 : 자세히 나와 있는 평전도 있고, 해설이나 평론은 저보다 훨씬 잘하시는 분들이 전 세계적으로 많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계속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결국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고 이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잖아요. 장르가 번역이 된다면. 저를 가능한 배제하고. ‘이 사람 안으로 들어가서 시로 나온다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 작업을 ‘그림 번역’이라고 이름 붙여서 해봤는데요.


김하나 : 그건 아주 용감하면서 새로운 부분인 것 같아요.


박연준 : 그런가요(웃음). 그런데 하니까 재밌더라고요, 저는.


김하나 : 읽기에도 재밌었습니다.

 

김하나 : 그림을 번역하실 때, 그림을 가만히 보면서 뭔가가 번역이 되어 나오기를 기다리시나요? 아니면 시간 맞춰서 차곡차곡 해나가시는 편인가요?


박연준 : 오래 전부터 봤던 그림이기 때문에 좀 익숙했고, 그래서 그림 선정을 할 때만 고민을 했고요. 시를 먼저 쓰다가 잠깐잠깐 그림을 불러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재밌는 게, 제가 초고를 쓸 때 연필이 멈추면 부정 탔다고 생각해요(웃음). 가능한 안 멈춰야 돼요, 초고는. 그래서 그림을 볼 시간이 별로 없이 많이 써놔요. 퇴고를 할 때 고칠 수 있으니까.


김하나 : 연필을 떼면 부정 탄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있었어요? 열다섯 살 때부터?


박연준 : 그런 건 아니에요.

김하나 : 그러면 언젠가부터 생겼어요?


박연준 : 20대 때부터...


김하나 :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박연준 : 네. 그런데 요즘 자꾸 멈춰져서(웃음)... 부정 탄 시들이 너무 쌓이고 있는데요(웃음).


김하나 : (웃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박연준 : 그래서 ‘생각이 안 난다고’ 쓰기도 해요. 연필을 떼면 안 되니까.


김하나 : 그건 속에 있는 걸 어쨌든 덩어리째로 꺼내놓기 위한, 사실 굉장히 집중력이 있어야 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아예 반대로 완전히 열어놓는 것이기도 하고요.

박연준 : ‘생각’ 보다 무의식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생각은 이성이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사실 많은 시간 이성이 지배하잖아요. 그래서 힘든 것 같아요.


김하나 : 그렇죠. 정신줄을 놓기가 쉽지 않죠. 그러면 그게 박연준 시인만의 일종의 시작법이기도 하겠네요. 초고를 연필을 떼지 않고 일단 써나가 보는 것.

박연준 : 그렇죠. 몇 쪽을 쓸 때도 있고요.

 

김하나 : 20대의 박연준 시인도 사랑 앞에서 두려워했던 부분이 있을까요?


박연준 : 사랑 앞에서 두려움이 너무 없어서 탈이었는데요. 굉장히 부정적이었던 것 같기는 해요. 사랑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김하나 : 이 책에도 20대에 대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1년 안에 굉장히 많은 회사를 다니고 그만두고, 굉장히 노력했지만 보수도 못 받은 채 견디지 못하고 또 그만둬야 했고. 그 부분도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일단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일을 하는데, 그것보다 시를 소중히 여겼다는 것.


박연준 : 그렇죠. 그래서 이 책에 보면 (『렛미인』 의) 드라큘라처럼, 너무 아름다워서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 존재처럼, 시가 그런 존재였다고 썼는데요. 나는 나가서 일을 해서 최소한의 돈을 벌고 그 아이를 돌봐야 하는, 약간 애인처럼, 그런 느낌이 있었죠.

김하나 : 그때가 20대의 고통 같은 것과 닿아 있는 거죠.


박연준 : 네, 닿아 있죠. 20대에는 조금 무모했던 것 같아요. 무식하고 무모하고. 두려움은 없었는데 제가 친구를 하고 싶지는 않은 존재였던 것 같아요(웃음). 왜냐하면 너무 펄떡였거든요. 불안정하니까.


김하나 : 그런 것들이 지금은 사라지거나 다른 걸로 바뀌었나요?


박연준 : 저에게서 가끔 나올 수는 있겠지만, 많이 다독여졌어요. 정말 누군가와 사랑을 주고받으려면 내가 건강해야 된다는 걸 서른 무렵에 얼핏 알게 되면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거든요. ‘나의 이런 파닥임이나 부정적인 감정이 상대방에게 뭔가 안 좋은 에너지를 주겠구나, 그건 나쁜 거야’라는 생각이 들어서, 차분하게 가라앉을 수 있는 책도 읽어보고요.

 

김하나 : 독자들이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를 읽으면서, 사랑에 대해서 어떤 질문을 던지면 좋을 것 같으세요?


박연준 : 사랑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제가 ‘배신’이라는 꼭지에서 그렇게 썼거든요. ‘당신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만이 배신이 아니라 나에게 감정이입하지 않는 게 배신이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가 상처 받겠구나, 라는 생각만 해도 덜 상처 줄 수 있잖아요. 모든 배신은 감정이입의 실패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랑할 때 서로가 감정이입을 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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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박연준시인 #초고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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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리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